나를 본받으라(빌3:12-21) 2019. 9. 8
살아 있는 사람을 롤 모델로 삼는 경우에는 실망스러울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을 앞서 살다가 돌아간 이들에게서 배우고 본 받으려는 태도는 지혜로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부터 “나를 본 받으라”고 설파했던 유일한 성경의 인물이다.
그렇지 않나. 모세도, 다윗도, 솔로몬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교훈한 적이 없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 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히 자신을 본 받으라고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도 그렇게 교훈한 바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그러면 바울 사도는 자신의 그 무엇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오늘 날로 말하면 소위 스펙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읽으셨는데 앞부분을 보면 그는 자신이 어떤 길을 살아 왔는지를 짧게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력서에 쓸 내용이 많은 인물이었다. 5-6절이 사도 바울의 이력서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와 같은 이력은 율법을 준수해 가던 바리새인의 신앙 면에서 보면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난날을 뒤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복음 전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한 분을 얻고 나머지는 배설물처럼 여기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본 받으려한 신앙이 무엇일까. 10-11절을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삶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본 받아 나가는 삶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기도 혹은 저런 기도를 하며 살지만 진정으로 예수를 예수답게 믿는 성도라면 사도 바울처럼 이런 삶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맞다.
“가정 잘되게 해 주세요. 자식 잘 되게 해 주세요. 아들 딸 좋은 대학가게 해 주세요. 아들딸 시집 장가가게 해 주세요. 손주 태어나게 해 주세요. 가족 건강하게 해 주세요. 가족이 무탈하게 해 주세요. 직장 안정되게 해 주세요. 장사도 잘되고 사업도 잘 되고 범사가 잘되게 해 주세요. 형통하게 해 주세요.”이런 기도는 부처 앞에서도 하고 조상 대대로 장독대에 정한수 떠 놓고 달님 앞에서도 빌던 기도이다.
그러나 그게 기도의 본질, 신앙생활의 바탕은 아니다. 이번 윙윙 태풍 피해도 적지 않다. 전남 나주 지역에는 3,000만평 이상의 배 밭이 초토화 되었다. 요즘이 가을 햇살에 한창 다 자란 배가 단맛이 들어가고 수확을 준비할 때인데 어머 어마한 량의 배들이 낙과되고 말았다. 김 씨네 배 밭, 이 씨네 배밭, 박 씨네 배 밭 구별이 없이 휘몰아쳤다.
사도 바울의 고민은 배 농사가 잘되느냐 못되느냐의 고민이 아니었다. 올해 큰 바람 없이 여름과 가을을 지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고민도 아니었다. 오직 사도 바울의 생각을 가득하게 채우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그 부활의 권능을 주변의 사람들과 이 땅의 영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 이 한가지의 기도 제목을 갖고 씨름하고 있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제 2차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은 지금 로마 황제의 시위대 뜰에 갇혀서 지내고 있다. 연금 상태이다. 거기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고 빌립보서도 썼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행전 16장에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그 곳 지역 전도 중에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났다.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의 신자 제 1호이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과 그의 가족들이 바울에게 세례 받고 그 교회의 신자들이 되었다. 길거리의 귀신들려 점치던 여종도 귀신 떠나고 새 사람이 된 후에 그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 전도자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위해서 많은 후원을 한 교회였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로마의 옥에 갇혀 지내는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특별 기금을 모금하고 생필품을 모아서 꾸준히 후원한 대표적인 교회였다. 빌립보서 안에는 그런 감사 인사가 담겨 있다.
반면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간에 자리 잡은 할례 문제에 대하여 교훈하기도 하였다. 혹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같은 여인들이 교회 안에 불화를 일으키고 파당을 짓고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어지럽히는 소식을 듣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고 권면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그래서“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4)고도 권면하였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빌립보서 3장 18-19절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수는 없는, 부끄럽게 살아가는 이들을 염려하기도 하였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까지 하였겠는가. 왜냐하면 빌립보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교회는 들락날락거리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다운 믿음을 회복하고 주 안에서 하나된 믿음을 지켜 가라고 권면하면서 “나를 본 받으라”고 편지한 것이다.
푯대를 향한 삶.
우리는 다메섹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하기 이전의 사도 바울의 모습에 대하여 많이 안다. 예수 체험하기 이전의 바울 즉 바리새인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다.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해서 처단하고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자였다. 그랬던 그가 변화되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그 부활의 능력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 당시 빌립보교회 안에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것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적당히 세상 낙을 즐기고 타협하며 살아가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전에 받은 그 은혜이면 족하고 이 정로로 살면 의롭게 사는 것이고 라고 여기면서 자기(自己) 의(義)와 자기(自己) 완전(完全)에 빠져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고 병들어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저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자신이 깨닫아 왔고 믿고 있고 추구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동안 얻은 것도 많고 이룬 것도 적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선언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리고 하는 말이 무엇인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는 ‘디오코’라는 단어는 사냥개가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한 눈 팔지 않고 잡기 까지 추격해서 결국은 사냥감을 잡고야마는 그런 것을 표현한 말이다.
바울이 고백하는 그러한 신앙생활의 태도란 어떤 것인가. 13절에 보면,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가 아는대로 이미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잡았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었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성취했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루었는가. 그런데 그는 무어라고 고백하고 있나.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달려 가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중국 고사(古史)에,
解弦更張
해현경장
이란 말이 있다. “거문고 줄을 풀고 다시 고쳐 매다”라는 뜻이다. 거문고 줄을 풀어서 다시 제대로 매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악사가 연주하려고 한다 해도 제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한(漢)나라 사람 동중서(董仲舒)는 젊은 시절부터 《춘추(春秋)》를 공부하여 효경제(孝景帝) 때에 박사(博士)로 임명되었다. 벼슬을 탐하지 않고 몸가짐과 행동거지에 예가 반듯하여서 그를 선비들은 모두 스승으로 존경했다. 한의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100여명의 새로운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으로 천거된 이들이 있었다. 동중서도 현량의 자격으로 천자의 책문(策問)에 응했다. 한무제는 진 시황제, 당 태종, 영락제,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어느 날 무제가 동중서에게 국사에 대해 묻자 동중서가 대답했다.
“지금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의 뒤를 계승하여 썩은 나무와 같고 똥으로 덮인 담장과 같은 지경입니다. 아무리 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법이 나오면 간사한 짓이 발생하고, 명령을 내리면 속임수가 일어납니다. 마치 뜨거운 물로 끓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고, 땔감을 안고서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힘을 들이면 들일수록 무익할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거문고의 소리가 맞지 않으면 심한 경우에는 반드시 줄을 풀어서 새롭게 매어야만 연주가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지난날의 화려한 경력이나 자랑이나 받았던 큰 은혜나 심지어는 충성했던 남다른 업적이나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그 무엇이라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죄라도 심각하게 여겨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회개하되 주변의 일이나 사건이나 사람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오직 복음, 오직 예수, 오직 부활 신앙이 전파되는 일에 매진하는 태도 이런 신앙의 자세야말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한 삶.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삶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삶”을 말씀하는 것이다. 푯대가 달려가는 자가 바라보는 그 목표 자체라면 ‘부름의 상’이라는 것을 푯대를 향하여 목적지까지 잘 달려간 이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다. 그 나중의 영광이다.
우리는 요즘 이 시대에 소위 주목 받던 상위 1%에서 최고 상위의 0.1%대로 진입하려던 한 시대의 아이콘과 같은 그 한 사람에게서 그 자신과 그 가족과 그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속속들이 들어나는 인간의 추한 민낯을 보고 있다. 그게 인간이란 존재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하와에게 불순종한 범죄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나.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 가인에게 하나님이 또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가인은 대답하였다. “내가 내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니이까.”이것이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 의인이 있나. 하나도 없다. 로마서 3장이 말씀하였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12)
이 말씀은 “어리석은 인간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는 시편 14편 1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그런 인생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지금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나를 본 받으라” 그렇다. 오늘날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주일 날 잠시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면 다시 또 일주일 후에나 잠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이처럼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분주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각 사람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고 대답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과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부르심은 무엇인가.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향하여 제대로 잘 달려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15절에 보니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달리 생각하는 이들이란 복음의 본질, 신앙생활의 본질,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부활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서 달리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다시 18-19절을 보라.
적지 않은 사람,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고 그들의 나중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파렴치하게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화인 맞은 양심처럼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많았다. 그들은 배를 신처럼 섬기며 탐욕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일 대신에 땅의 일만을 생각하며 ‘먹자 마시자 놀자 취하자’ 하며 방탕한 생활,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교인행세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심각한 편지를 쓰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어떤가. 오늘 날 우리의 가족들은 어떤가. 나의 부모형제아들딸 손자 손녀 일가친척들을 돌아보라. 각 사람의 삶을 주목해 보라. 과연 나 자신과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 중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이들이 누구인가.” 주목해 보라.
그냥 파도처럼 밀려 왔다가 밀려가는 그런 세파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노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지는 않은가. 냉철하게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의 삶.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이다. <새번역성경>으로 20-2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19절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과 비교가 되는 말씀이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나.
시민권이란 표현 속에는 나라에 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 13절에 보면, “또 땅에서는 외국인가 나그네임을 증명한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어디 가면 여관이나 호텔에서 잠을 잔다. 아무리 화려 하고 좋은 호텔, 오성 급 그 이상의 호텔에서 잠을 잔다고 하여도 그 하룻밤은 나그네의 하룻밤이 아닌가.
장영자 씨는 올해 76살이다. 감옥에서 나온 후 7개월 동안 여전히 사기 행각을 벌였다. 지난 6월 13일에 서울중앙지법은 그에게 사기 혐의로 다시 5년 형을 언도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7개월 동안 고급 호텔 생활을 하면서 호텔비도 계속 밀려 있었다. 그는 푯대 없는 나그네 인생길을 가다가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나그네 인생 길에서 푯대를 향하지 못하고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천국 시민 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 그 나중은 지옥의 영원한 심판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살고, 이렇게 살면 그 나중이 멸망으로 치닫는 길인 것을 알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육체의 탐욕 가운데 배를 신처럼 섬기며 살면 그 나중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날이 찾아오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마음에 품고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요한복음 14장의 예수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14: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