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듣고 따르라(시81:1-4, 8-16) 2019. 9. 1
지난주일 오후에 출발해서 필리핀 북부 도시 투게가라오에 위치한 존 웨슬리 칼리지 안에서 진행된 원주민 목회자 세미나를 잘 마치고 돌아 온 것을 감사한다.
본문인 시편 81편은 아삽의 시이다. 아삽은 다윗 시대의 성가대 악장이었다. 이 시편은 초막절이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에 하나님을 경배하며 특히 출애굽의 예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이 누리는 은혜와 복에 대하여 말씀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 받은 심판에 대하여 교훈하는 찬양시오 교훈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1-4절의 말씀은 찬양의 내용이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 기쁘게 노래하며 즐겁게 소리쳐 찬양하라고 가르친다. 시도 읊고 소고도 치고 수금과 비파도 연주하라고 했다. 초하루와 보름과 절기 때에 나팔을 불라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율례와 규례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언제 어디서나 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는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켜 내셨기 때문이다.(시81:5,10) 동족을 애굽의 바로 왕에게서 구원한 것이 모세가 아니다. 10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라고 분명하게 강조하셨다.
이와 같은 시편을 통해서 시편 기록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만을 잘 섬기기를 기대한 것이다. 6절, 노예 생활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노예 생활하던 손에서 고생스럽던 광주리를 내려 놓게 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 7절,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건지고 응답한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8절과 13절에서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내 말을 듣고 따르라’고 정하였다. 8절에 보면,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이라 이스라엘아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간청이며 명령이다. 13절에도 보면,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지 말고 순종하고 따르라는 명령이시다. 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명령이시다. 8, 11, 13절에 보면 ‘내 백성’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그렇지 않나. 부모가 제 자식을 사람답게 제대로 가르쳐 보려고 하지 않나. 특히나 믿음의 가정은 하나님을 잘 섬길 줄 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시키려는 소망을 갖지 않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4절에 ‘그리하면’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누리는 영적 만족과 복에 대하여 약속하고 있다.
원수를 누르고 대적들을 치리라.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원수와 대적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원수’ 혹은 ‘대적’이라고 하면 대개 나의 밖에서 나에게 공격해 오는 외적인 그 어떤 힘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원수와 대적은 나의 안과 밖에 항상 있게 마련이다.
가령 7절에 보면,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라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이는 출애굽기 17장에 내오는 내용이다. 애굽을 떠난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떠나서 르비딤 지역에 장막을 쳤다. 그런데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었다. 생각해 보라. 200여만명의 물을 매 순간마다 해결해야 하는 것이 광야 생활이다. 양과 소등 짐승의 수는 그보다 열배는 더 많다. 결국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불만을 쏟아 놓았다. 성경은 그 상황을 모세와 백성이 다투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달려 들었다. 그 때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말하였다.
목이 마른 백성들은 물을 찾으며 아우성이었다. 모세를 향한 원망이 대단하였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 말라 죽게 하느냐”고 대들었다.
다급한 모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질 것만 같습니다.”그 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17:5-6)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였다.
모세는 그 곳 지명을 ‘맛사혹은‘므리바’라고 지었다. 그 뜻은 ‘시험’, ‘다툼’이란 뜻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다투며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르비딤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기적 사건이다.
그렇지 않나.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누가 공급해 주었는가. 마라의 쓴 물이 단 물이 되게 해서 마실 수 있었던 것은 누가 해 주신 기적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원수와 어떤 대적을 만나게 되는가. 출애굽기 17장의 르비딤 광야에서의 므리바 물 공급 기적 이후에 곧 이어 나오는 장면이 아말렉과의 전쟁 장면이다.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는 길을 막고 전쟁을 벌여 왔다. 아말렉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앞장세우고 르비딤 들판으로 싸우러 나가게 하였다. 모세 자신은 산꼭대기에서 전쟁 장면을 지켜보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두 손을 치켜들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산 꼭대기 기도의 현장에는 모세의 형 아론과 미리암의 남편 훌도 함께 있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하여 손이 내려 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다. 연세 많고 피곤해 하는 모세를 위해서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 놓았다. 모세가 거기 앉아 두 손을 들었고 양편에서 아론과 훌이 함께 잡고 서서 기도하였다. 저들 세 사람의 손은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않았고 전쟁에 이겼다. 하나님은 그 날의 전쟁 승리 내용을 책에 기록하고 여호수아에게도 자세하게 알려서 후대에 외워 들리라고 명하셨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아말렉을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출17:14)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다. ‘여호와의 깃발’이란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기념한 것이다.
원수와 대적은 이처럼 밖에도 있지만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왜 우리가 모세처럼 두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하고 아론과 훌처럼 서로 손을 맞잡고 기도해야 하는가. 왜 모세의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전쟁에 이겼고 왜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겼는가.
왜 늘 기도하자 기도하자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고 여러분 자신은 어떤가. 왜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의 손을 맞잡고 치켜 들어야만 하는가.
그래야 우리는 우리 속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원망과 불평과 시비를 잠식시키기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높이 드는 승리와 간증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삽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으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시81:13)
그리하면 하나님이 속히 나서셔서 원수를 누르고 하나님의 손으로 대적들을 치시겠다고 하셨다. 여기 14절에서 말씀하는 ‘내 손을 돌려서’라는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4절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은 매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늘 기도에 힘써야만 할 것이다.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의 나중을 보리라.
하나님께서 수 없이 많은 별의 별 기사와 이적을 행하여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미워하고 겉으로만 여호와께 복종하는 체하는 이들이 있었다.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시인하고 의지하지 않고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와 신자들 안에도 있다. 내 안에 내가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부린다. 성령을 훼방한다.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한다. 내 안에 서 주님을 팔아 버린 가롯 유다의 거역의 영과 배반의 영이 고개를 든다. 모세 시대의 고라 자손과 같은 반역과 모반의 영이 담합하려 한다. 사탄이 조종하고 나의 약한 믿음을 이용해서 믿음의 사람들을 조롱하려고 뱀처럼 고개를 들고 달려든다. 이 영적 사건들을 분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 가정이 시험에 들 때에 어떤 일로 시험에 드나. 가족들이 시험에 빠질 때에 무엇 때문에 시험에 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내어 버려두시는 것이다. 12절을 보라.
하나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완악한 상태로 내어 버려두고 그들의 임의대로 행하도록 내어 버려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15절 끝에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말씀은 마치도 지옥의 심판과 같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심판을 경고하신 무서운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어린 자식들이 뭘 잘 못하는 것이 있으면 깨닫게 하고 가르치고 교훈하고 책망해서라도 바르게 고쳐 주는 것이 정상적인 부모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자식이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어 버려둔다면 이는 무서운 심판이 시작이 아닌가.
공항에 보니까 지금도 중동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MERS, Middle East Respirator)를 경계하는 대형 안내판이 게시 된 것을 보았다. 필리핀은 돼지 콜레라가 번져서 온 나라가 비상이 걸린 뉴스를 접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전염병에 걸리면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 눈에 안 보이는 사소한 것 같은 것들이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좀 다른 예이지만 우리나라에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 동안 거의 1000만대의 가습기가 팔려 나갔다.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로 영유아와 임신모가 사망하거나 폐 손상 등 심각한 건강 피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통계로는 6309명이 피해를 입었다. 8년이 지난 2019년 8월 27일에 ‘가습기 살균제 참사 청문회’가 열렸다. 해당 기업의 대표 이사와 책임자들이 공동 사과 하였다. 가습기의 사용이란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인데 결국 사망에 이르거나 평생 폐질환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우상 숭배란 것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들으라고 강조하시나. 9절,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십계명 중에서 제 1, 제 2 계명을 준수하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실까. 왜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실까. 구원의 길과 영생의 길과 진리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한 길 뿐이다. 이 길을 깨닫고 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며 복된 길이다.
어느 나라에나 그러하지만 필리핀 사람들도 정령 숭배의 무속 신앙 가운데서 살아 왔다. 정령 숭배를 의미하는 애니미즘(animism)에 대해서 최초로 조사한 사람은 영국의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Sir Edward Burnett Tylor, 1832-1917) 경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연구의 창시자이다. 1871년 타일러는 종교가 애니미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원시문화> (Primitive Culture)를 저술했다. 애니미즘은 살아 있는 사물과 생명이 없는 대상에 혼이나 영을 부여하는 것이다. 애니미즘에서 보면 생명이 없는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 든 영과 더불어 산다고 주장한다.
탐험가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은 1519년 9월에 스페인을 출발해서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1521년에 마젤란이 그 곳에 도착하였다. 1521년 3월 6일에 괌을 먼저 발견하고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한지 일주일 만에 필리핀을 발견한 것이다. 도착 일주일 만에 세부 섬의 왕과 왕비와 800여명의 주민 전체에 세례를 주었다. 그 후 막탄 섬 탐사에 나섰다가 원주민과의 충돌로 41살 나이에 눈을 감았다.
그것이 가톨릭 전파의 시작이다. 그런 연유로 필리핀의 가톨릭 인구가 83%이다. 무속 신앙이 3%, 이슬람은 5%정도이고 개신교가 9%정도로 부흥하고 있다. 가톨릭이 대세이지만 저들 나름대로 토착화된 정령 숭배 신앙으로 살아간다. 검은색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거나 십자가 자체를 우상처럼 섬기기도 한다. 마치도 우리나라의 무속 신앙에 부적을 몸에 부착해 온 것처럼 저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적과 같은 의미로 지니고 장식하려 한다.
필리핀의 상권은 350년 식민지를 행했던 스페인계가 장악하고 있다. 그 중에 중국 화교의 경제력을 무시할 수 없다. 200여개의 글씨가 없는 언어로 소통하며 살아온 처처의 원주민들의 삶은 오늘 날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다른 나라 말을 빨리 습득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 영어를 할 줄 알고 타갈로그어를 가르친다. 문자 없는 자기 말이 200여 가지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저들에게 번져 가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복된 일인지 모른다. 이번에 방문한 뚜게가라오 도시는 필리핀 북부 지역을 총괄하는 필리핀 북부 연회 지역이다. 그 곳에 1988년에 설립된 감리교 신학교가 존 웨슬리 칼리지이다. 작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유치원부터 초중고와 대학교까지 6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어엿한 학교로 발전하였다. 대학의 총장과 유치원부터 초중고를 총괄하는 교장까지 두 사람이 모두 감리교 목사이다.
금번 세미나에 개강 예배는 총장이 설교하였다. 교장인 목사도 세미나 시간 내내 꼬박 꼬박 참석하였고 젊은 후배 목회자들과 어울려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더불어 시간을 가졌다. 스페인의 350여 년 간의 식민지 지배 영향인지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힘이 강세였다. 목회자들도 여성들이 더 많았다. 실제로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지도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최근에 필리핀 북부 지역에 개신교가 부흥하고 있다. 몇 주 전에는 존 웨슬리 칼리지 마당에서 1000여명을 초청한 전도 부흥 집회가 이틀 밤 열렸다. 그 때에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 받은 이들이 202명이라고 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인다.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 물론 저들이 성경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구원에 합당한 믿음을 얻는데 이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청종하는 백성들이 되길 원하신다.
내가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우리는 시편 81편 10절에 나오는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을 그 부분만 뚝 잘라서 사용할 때가 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곡해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출애굽을 계획하고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셨을 때에 하나님은 저들에게 광야에서 무엇을 먹고 살게 할까. 물은 어떻게 해결하며 살아가게 할까를 미리 예비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때로 불평과 원망 가운데 죽어갔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며, 공급하시는 하나님이다.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감싸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영에 날마다 순간마다 만족스러운 밀과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먹이시며 배부르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요즘 중국 정부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가르친다고 한다. 최근 중국의 기독교박해 감시단체 Bitter Winter가 밝혔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핍박하고 저들의 공산주의 체제로 국가를 경영하고 후대를 키워 내겠다는 어리석고 무서운 음모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잘 된 인생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민족의 역사가 있는가.
하나님은 “일용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며 택한 백성들의 영혼육에 만족함을 선물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예수의 요한복음 17장의 마지막 기도에 보면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하라고 하신 분부에 순종하였다. 그 하라 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 이것이 십자가 순종이요 부활의 열매이다.
좋은 결실의 계절에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열매 맺는 축복의 계절이 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