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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요18:15-27) 20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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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3-09 14:59 조회 9,529 댓글 0
 
             심문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요18:15-27)      2020. 3. 8



예수의 수난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다. 

가롯 유다의 배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를 붙잡으로 갔던 로마의 병사들, 천부장, 하속들, 대제사장 안나스, 그 해의 대 제사장  가야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헤롯 왕,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던 수를 헤아릴 수 없던 유대의 백성들, 구레네 사람 시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백부장과 로마의 군인들, 아리마대 사람 요셉, 니고데모,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열한 제자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 남녀와 사회적인 신분을 막론하고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들의 중심은 예수다.

예수는 가롯 유다를 통해 배반 받고 팔리신 채로 대제사장의 요구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로마의 병정들에게 붙잡혀서 끌려갔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를 통해서 심문을 받으셨다. 그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의 권력자인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고 사형 언도를 받으셨다. 총독 관저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가셔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죽으셨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새벽에 붙잡히셨다. 계속하여 차례대로 묵상해가는 요한복음의 오늘 분량은 붙잡힌 예수께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신 장면부터 이어진다. 예수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을 먼저 받고 얼마 후에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결박된채로 보내졌다. 24절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 아마도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는 대제사장의 관저 한편에 여전히 머물면서 예루살렘 성전 운영의 배후 실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오늘 내용은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와 마지막까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겁한 제자 베드로의 모습이 소개된다. “네가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의 예언이 적중하는 장면까지 대할 수 있다.
(요18:17, 25, 27) 


외롭고 고독한 길.
사람은 철저히 혼자다. 사람이 곁에 모이는 것은 자기 좋을 때이고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때이지 자신에게 손해가 올 것 같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 같으면 감히 누가 나서겠나. 대인관계라는 것이 대개 다 그렇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더욱 더 혼자다. 물론 임종을 지켜 봐 주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은 죽음 앞에 철저히 혼자이다. 

“대감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넘치지만 대감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다”는 옛말이 있지 않나. 

평소에 예수께 대하여 “주님 절대 죽으시면 않됩니다. 제가 대신이라고 죽겠습니다.” 이렇게 큰소리 치던 베드로인데 너무 비겁하고 야비하게 처신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그렇다고 아예 초반부터 도망가 버린 것도 아니다.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그 현장에서는 칼을 빼어 들고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리기 까지 했던 베드로이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 버렸어도 그나마 베드로는 또 다른 제자 한 명과 함께 붙잡혀 끌려가시는 예수를 따라서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가기는 갔다. 15절에서 말씀하는 또 다른 한 제자는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제자 요한일 것이라고 설명하는 해석에 비중을 둔다. 제자 요한이 나름대로 자신을 겸손하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는 대제사장과 평소에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그런 혜택으로 대제사장의 집 정문을 지나 그 집의 뜰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 곁에서 작지 않은 규모의 어업을 하던 요한과 야고보의 가정은 그 아버지 때부터 예루살렘의 제사장들 특히 대제사장들을 알고 지냈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런 덕분에 요한은 대제사장을 알았고 그 날도 불쑥 대제사장의 집 뜰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상황이 달랐다. 대제사장의 집 문 밖에까지는 따라 갔으나 쉽게 문 안에까지 들어 갈 수는 없었다. ‘문 지키는 여자’란 표현이 나오는데 유대 나라에는 여성들이 문을 지키는 경우가 흔했다. 대제사장의 집 문을 지키는 경비 업무도 여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그 문 지키는 여자에게 따로 말해서 문 밖에 서성거리던 베드로를 문 안에까지 들어 갈 수 있게 했다. 

그 때 문지키는 여자가 베드로를 알아 봤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그 때 베드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나는 아니다.”그 날 새벽의 날씨는 추웠다. 종들과 아랫 사람들이 뜰에 불을 피워 놓았는데 베드로는 어색하게 행동하면서 그 사이에 끼어 서서 불을 쪼이고 있었다. 이 장면을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그런 비겁하고 평소 같지 않은 유약한 행동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잘 묘사해 놓고 있다. 

마태복음 26장 58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고 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씩 이런 식으로 처세하는 이들을 대할 때가 있다. 사역 현장에서 아예 멀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늘 어정쩡한 처세를 하면서 강 건너 불을 구경하듯 하며 회색지대에서 행동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예수께서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던 그 날 그 새벽 베드로의 행동이 그러하였다. 

우린 여기서 이 땅에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외로움과 고독을 엿보게 된다. 물론 하나님은 그 누구의 도움이 필요 없이도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충분히 이룩하실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아들로서 하라고 분부하신 사명을 충분히 넉넉히 다 이룩하실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누구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인류 구원의 대업을 온전히 이룩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 보면 지난 삼년 동안 어떻게 가르쳐 온 제자들인데 지금 이 결정적인 순간에 곁에 남아 있는 제자가 베드로와 요한 뿐이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그 현장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간 것까지는 좋은데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안에서 행동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왜 갑자기 내가 창피한 생각이 들고 내가 갑자기 베드로처럼 비겁해진 것 같이 얼굴이 화끈거려지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우리가 뭐 굉장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고 주님을 대단히 사랑하는 것 같아도 다 거기서 거기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릴만한 그런 소지가 충분히 우리 안에, 내 안에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기기만이고 자기위선일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기도와 금식과 말씀 묵상과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치며 겸손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의지, 내 주관, 내 각오, 내 결심, 내 노력, 내 결단만 가지고는 않된다. 그런 신앙의 차원이 아니다. 신앙이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내 안에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 분이 자리 잡으시고 나를 주관하시도록 내어 드리고 비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 생명, 내 시간, 내 젊음, 내 건강, 내 재물, 내 지위, 내 그 모든 가진 것, 주어져 있는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그렇지 않나. 세계 각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못 들어가 사는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102개 나라가 대한 민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 재한하고 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마비되고 말았다. 그 동안 우리나라가 교만할 정도로 얼마나 승승장구했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엉망으로 해도 얼마나 하나님의 크신 복을 누리며 살아 왔나. 그런데 요지음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교회도 보라. 
천 명 모이는 교회는 조금 모이는 교회이고 삼천명이나 오천명쯤 모이면 좀 모이기 시작하는 교회처럼 여겨졌다. 서울 안에 일만 명, 이만 명, 삼만 명씩 모이는 교회들이 여기 저기 있다. 그런 교회들이 오늘도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일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휩싸여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 년이 다 지나도 백화점에 드나들 일이 거의 없이 지내긴 하지만 코로나 19확진자 한 명이 어느 백화점을 드나든 사실이 알려지면 그 날로 문을 닫아야 한다. 하루 매출 10억 20억이 순식간에 스톱 되고 만다. 무슨 생각이 드나. 바이러스 감염은 전쟁보다 두렵고 핵폭탄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 

그렇게 큰 소리치고 장담하고 떠들던 베드로가 왜 이렇게 비겁하게 처신하고 야비하게 행동하고 있나. 그 씩씩하던 베드로가 어찌하여 종과 아랫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서 불만 쪽이고 서 있는걸까. 그런 베드로의 모습 속에 숨겨져 있는 나의 영적 실상이 느껴지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그런 상황 가운데 홀로 외롭게 붙잡혀 결박된 채로 대제사장의 뜰 안으로 끌려 들어 가셨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끌려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외로움과 고독을 보게 된다. 22절에 보면 심문을 받으시던 예수를 예수 곁에 섰던 대제사장의 아랫 사람 하나가 손을 쳤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으로 누구를 치는 것은 가장 상대방을 모멸하고 부끄럽게 하며 무시하는 행위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그런 수모를 받고 또 받으셔야만 했다. 
<얼마나 아프셨나>(614장 찬송)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
하늘도 산과 들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 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나의죄 너의 죄와 우리의 모든죄를
모두 다 사하시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얼굴과 손과 발에 흐르는 그 귀한 피
골고다 언덕위를 붉게 물들이셨네
오 놀라운 사랑 크시고 끝 없도다
오 주님 사랑에 구원의 강물 넘치네


침착하고 담대한 대답.
예수는 그런 불의 하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으셨다. 비굴하거나 나약하지 않으셨다. 담대하셨다.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한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에게 예수의 제자들과 평소에 강조하던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침착한 대답을 이어 가셨다. 20절과 21절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의 대답의 요지는 무엇인가. 그 동안 자신은 쉬쉬하며 비밀 스럽게 말씀을 전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회당에서나 성전 안에서나 그 어디에서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공개적으로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하나님의 나라와 회개의 촉구와 받아들여야만 하는 복음을 전파하여 왔음을 밝혔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통해서 아는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예수의 병자 치유, 예수의 귀신을 다스리시던 현장, 심지어는 예수께서 죽은자를 살리시던 그 현장의 그 어떤 그 무슨 말씀이든 그 무슨 기사와 표적이든 은밀하게 행하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으셨나. 없다. 아니다. 예수의 출입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언제나 어디서나 공개적이었다. 그 곁에는 늘 열두 제자가 있었다. 그 곁에는 언제나 칠십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 곁에는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수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랐고 예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아 왔다. 예수는 기도 시간 이외에는 혼자 계신 시간이 전혀 없으셨다.

그 예수께서 안나스와 가야바의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계신 것이다. 예수께서 하도 용감하고 씩씩하고 담대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시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그 현장에 있던 이들이었다. 그 때 대제사장의 아랫사람 하나가 대제사장에서 충성심을 나타낸답시고 예수를 손을 때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예수는 침묵하지 않고 다시 대답하였다. 23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말을 잘못했다면 잘못한 증거를 대라. 그렇지 않고 내가 바른 말을 했다면 어째서 네가 나를 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상황이 이쯤 되자 예수를 더 이상 심문할 말이 궁색해진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를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결박한 그대로 보냈다. 

예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침착하고 담대하셨다. 왜일까. 빛은 어둠 앞에서 빛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는 불의 앞에서 떳떳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거짓과 음모와 술수 앞에서 비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은 아무리 크고 큰 악 앞에서라도 담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시절을 지내며 맞이한 사순절의 또 한 주일.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믿음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길 수 있을까를 깊이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또 새로운 한 주간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시작된 수난.
쓴 잔이라고 고백하시던 예수의 수난은 유월절 다음 날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는 로마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결박되고 끌려 가셨다.(요18:12-13) 안나스에게서 가야바에게로 보내질 때에도 결박된채로 보내졌다. 요즘도 포승줄로 묶는 경우를 보지 않나. 수갑으로 채우고 그걸 언론에 노출되지 않게 하려고 수건으로 가리거나 옷자락으로 가리기도 한다. 

수난이 없이는 영광의 순간이 없다. “NO CROSS NO CROWN”은 진리다.
고통과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곤고와 역경과 수모와 외면과 수치와 버려짐을 당하는 처절한 수난 그 끝에 부활의 새벽이 다가 온 것이 기독교 부활 복음의 시작이고 바탕이다.
큰 소리 치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후에 홀로 남으신 예수는 빌리도의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골고다로 향하셨다. 남은 사순절기가 요한복음의 묵상과 함께 든든히 세워져 가는 은혜의 절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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