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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열매를 많이 맺으면(요15:1-9) 20210502 어린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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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5-08 16:26 조회 7,901 댓글 0
 

                     열매를 많이 맺으면(요15:1-9)            2021. 5. 2  어린이주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포도나무의 비유로 교훈해 주셨다.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목적은 한가지이다. 포도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건축재나 가구 제작용 목공재료로 쓸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심지어는 불쏘시개로 쓰기에도 마땅치 않을 정도이다. 요즘은 레스토랑 입구에 간혹 죽은 포도나무를 잘라다가 큰 항아리나 화분에 담아서 장식용으로 쓰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사실 포도나무는 열매로 말하는 나무이다. 장식용이 아니다. 포도나무가 포도를 결실할 수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포도나무는 정원수도 아니다. 줄기가 뻗어 나가고 가지와 잎이 무성해도 별 멋도 없다. 그렇다고 꽃이 아름답다거나 향기로운 것도 아니다. 만약에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어린이 주일을 맞은 오늘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로 대답하는 나무이다. 포도나무는 맛있는 포도, 극상품 포도, 참포도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만 포도나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생각해 보라. 부부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중에 아들딸이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를 하루하루,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정성스럽게 키우기 위해서 애를 쓴다. 밤잠을 설쳐 가며 진자리와 마른자리 갈아 누이면서 사랑을 쏟아서 키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어 다니고, 걸음마하고, 옹알이하고, 재롱 피우고, ‘윙크 해 보라’고 하면 윙크 따라서 하고 그게 아들 딸을 낳아서 양육하는 목적인가. 자라날 때 그 나이에 어울리는 예쁜 옷, 예쁜 모자, 예쁜 신발 신겨서 귀여운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키우는 것이 목적이냐 말이다.


엄마 아빠 품에서 자라나는 어린 아들 딸이 사랑을 받고 훌륭하고 유능하게 장성해서 가정의 일꾼, 사회의 일꾼, 나라의 일꾼, 열방의 일꾼,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가정의 아들 딸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일꾼으로 양육할 수 있을까.

 

 

농부이신 아버지.

포도나무 비유가 교훈하는 내용의 포도나무 농사를 하는 농부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이 포도나무 농사를 하시는 전문 농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농부이시다. 많은 비와 가뭄을 주관하시는 농부이시다. 길거리에서 트럭에 잔뜩 대파를 파는 이에게 물어 보았다. “요즘 왜 그렇게 대파값이 비싸졌느냐”그는“지난해 여름에 너무 비가 오래 와서 대파 농사가 흉작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비의 양과 여름 더위의 정도를 주관하시는 농부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햇빛을 비추어 주시는 농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주관하시는 농부, 이슬과 안개와 우박이라도 주관하시는 농부이시다. 메뚜기와 깜부기 같은 재앙을 다스리시는 농부이시다. 


포도나무의 줄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는 것은 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서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유아교육학자 혹은 청소년 교육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교육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맞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 양육되는 것이다. 호랑이나 사자나 곰이나 사슴이나 노루와 같은 동물의 세계는 어미 동물이나 아비 동물에 의해서 본능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에 의해서만 세상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엄마, 아빠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이모, 외삼촌 혹은 언니나 오빠나 형이나 누나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아니면 양부모에 의해서라도 어려서부터 영향을 받으며 자라나는 것이다. 요즘처럼 홀부모 가정이 늘어나는 때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학교 교육이나 교회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트롯 신동 정동원(2007-)은 올해 14살이다. 그의 엄마 아빠는 헤어졌다. 엄마의 사랑을 못 받고 컸다. 아빠의 얼굴도 어쩌다가 보았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좋아하고 색스폰 연주를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서 트롯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지난해 2월 그의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손자 동원이는 자기를 오늘날까지 키워 주신 할아버지의 빈소를 의젓한 모습으로 지켰다. 


창세기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끔찍이 사랑하던 어머니 라헬을 통해서 태어났다. 이미 배다른 열 명의 형들이 있었다. 아버지 야곱은 열 한번 째 아들 요셉을 총애하였다. 아니 편애에 가까웠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베들레헴 길가에서 낳아 놓고 눈을 감았다. 야곱은 베들레헴 길가에 라헬을 위하여 돌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들에게 팔아 넘겼다. 노예로 팔아 버린 것이다. 요셉의 나이 17살 때의 사건이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 시장에서 애굽의 왕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 갔다. 


우리가 아는 창세기의 요셉은 어머니 라헬이 돌아가시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야곱을 다시 볼 수 없는 노예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다. 요셉의 나이 30살 때의 일이다. 그 후로 요셉은 110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까지 애굽의 총리였다. 요셉의 생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던 사람 요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창세기의 요셉을 아버지 야곱이 키웠나 어머니 라헬이 키웠나. 물론 일정기간 동안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셉으로 하여금 역사적인 인물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인생 농사의 농부이셨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부모 일찍 잃은 에스더는 어떠한가. 누가 에스더로 하여금 ‘바사’ 나라의 수산 궁에서 살아가는 아하수에로 임금의 왕후가 되게 하였는가. 에스더의 어머니인가 아버지인가. 아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손길에서 자라 난 에스더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가 포도원의 농부처럼 외로운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엄마 아빠를 내 곁에 농부로 세우셔서 나의 인생 농사가 가능하게 도우신다. 아니면 내 곁에 그 어느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라도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엄마 아빠나, 할아버지 할머니나 그 어떤 누군가의 손길보다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돌보신다는 점이다. 그 분이 나의 인생 농사가 풍년 농사가 되도록 친히 내 곁에 오셔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 주셔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려서부터 아들 딸들이 평생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에 의해서 자라나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바탕이다. 그냥 “유아 세례받게 한다. 교회 데리고 다닌다. 가정 예배를 드린다.” 그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아들딸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손길을 매 순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돌보고 키워내야 한다. 


그렇지 않나.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난 형제였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의 인생의 끝은 너무나도 달랐다. 아벨은 죽임 당했으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운명은 너무나 달랐다.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무슨 생각이 드나. “아니, 하나님도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셨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과연 어떤 마음가짐,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하고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무슨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야 할까. 우리는 나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의 아들딸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만 할까. 


내 인생 농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셔야 한다. 그렇지 않나. 요즘 날마다 출애굽기의 말씀을 대하고 있다. 출애굽 직전에 하나님은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그런데도 애굽의 임금 바로의 마음은 점점 더 완악해져만 갔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말씀을 대하다 보면 질문하게 되지 않나.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누구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감싸 주시기도 하고 누구의 마음은 바로왕의 마음처럼 완악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과연 나는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 않나. 


사실이다.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하루를 출발해도 하루 생활 중에 별의 별 일을 다 경험한다. 순간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순간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도 많다.


“그러면 내가 포도나무와 같은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인생의 어떤 농부로 모시고 살아가야 할까”하고 질문하고 그 대답을 찾아 나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고백해야 하는 신앙 고백이 있다. 하나님만이 포도나무와 같은 나의 인생길의 농부이셔야 한다는 점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에 나의 생을 맡겨 드려야만  전능하시고 유능하신 농부이신 하나님이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서 불에 태우시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 주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내 인생의 가지를 해마다, 봄마다 다듬으셔서 극상품 포도를 열매 맺는 인생으로 가꾸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출발은 그럴싸했으나 나중이 잘못된 성경의 인물들을 보라.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이 인생 끝날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내 포도나무 인생의 농부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가인이 그랬고, 에서가 그랬다. 사사 삼손의 나중이 그랬고,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인생 끝이 그랬다. 사울 왕의 나중이 그랬고, 솔로몬 왕의 나중이 그랬다. 예수의 제자 가롯 유다의 나중이 그랬다. 그러므로 시작도 중요하지만 나중이 더 중요하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시작도 달라야 하고 과정도 달라야 하고 마지막은 더욱 더 달라야 한다. 


2012년 9월 3일에 92살에 죽은 통일교 문선명(1920-2012)의 장례식 장면을 기억한다. 통일교도들이 경기도 가평 산 자락 7부 능선에 지어진 저들의 통일교 궁전에 모여 들었다. 수 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붉은 색 십자가 카펫을 펼쳐 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통일교의 문선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비의 교조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144,000명을 불러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단, 사이비가 극성을 부린다. 성경을 새롭게 해석한다. 거기 “무료 성경학원”에 수 만명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우는”심판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 아들 딸이 커서 어느 대학 나오느냐, 무슨 직장에 다니느냐, 무슨 사업을 하느냐, 월급이 얼마나, 연봉이 얼마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나의 인생의 농부 삼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참 소망,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참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

예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교훈하셨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포도나무이시다. 예수는 들포도, 산포도 나무가 아니시다. 예수는 신포도, 떫은 포도나무가 아니시다. 예수는 극상품 포도를 열매 맺는 참포도나무 줄기이시다. 모든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통해서 가지 끝에 영양이 공급되는 것이다. 포도 열매는 가지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줄기가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줄기에 붙어서 매 년마다 새 순이 싹으로 자라나서 그 가지를 이루고 거기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풍성한 포도 송이가 탐스럽게 잘 자라나서 먹음직스럽게 익은 포도 송이를 상상해 보라.


참포도나무의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가지를 맺고 잘 자라는 포도 송이는 극상품 포도 송이와 같은 인생이 되는 것이다.


미국 5불짜리 지폐의 얼굴 주인공인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대통령을 지냈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는 56살에 암살범에 의해 숨졌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참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께 잘 붙어서 살아간 복음 인생이었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가 93년 동안 고난의 시절을 뒤로하고 그런 극상품 포도 인생으로 살다가 주께로 돌아간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예수와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288장 찬송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의 고백처럼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런 찬송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삶을 매 순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교회 다녀 주고, 예배드리는 자리에 함께 자리해 주고, 속회 같이 해 주고 그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안에서 예수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는 교훈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포도나무의 줄기란 말이다. 줄기가 없는 가지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포도나무의 뿌리에 닿아 있는 것이 뿌리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가 근본이다. 예수가 바탕이다. 예수가 전부이다. 예수가 시작이다. 예수 없이 사는 것은 아무리 잘 나가는 인생인 것 같아도 그런 인생은 인생을 헛 사는 것이다. 


예수를 내 포도나무 인생의 줄기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은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생활이다.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이다. 예수께 꼭 붙어 사는 인생이다. 


그러면 우리 각 사람이 어른, 아이,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참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이실까. 



예수 안에 붙어 있는 가지.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 말씀을 믿는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증거가 무엇일까. 포도나무 비유대로 하면 예수께 붙어사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으로 인하여 죄와 악을 해결 받고, 다스리고 주님과 더불어 깨끗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서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실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끊임이 없는 예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한순간도 그 관계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자전거 체인이 한 마디라고 끊기면 그 자전거는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수에게 붙어 있고, 예수 안에 살고, 예수의 말씀 안에 살아가지 아니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잠자는 시간에도 숨을 쉬고, 잠이 든 순간에도 심장이 계속 뛰면서 전신의 모세혈관에까지 혈액 순환을 계속한다. 이처럼 참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께 붙어사는 가지 인생이라면 한순간도 예수와 떨어져서는 안된다. 완전한 합일(合一)이어야 한다. 완전한 하나여야 한다. 나노밀리미터(nm)만큼의 빈틈도 생겨서는 안된다. 요즘 나노(nano)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나노라는 표현은 고대 그리스어의 난쟁이라는 뜻이다. 미세한 물리학적 계량 단위이다. 길이를 말할 때 ‘나노밀리미터’라고 말하면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일 정도의 크기다. 시간을 말할 때 나노 세컨드(ns)라고 말하면 10억분의 1초를 말한다. 20세기가 1/1,000mm를 다루고 연구하는 마이크론(1㎛=0.001㎜) 기술의 시대였다면 21세에는 고밀도 극미세의 세계를 탐구해 가고 있다.  10억분의 1mm의 나노미터(1㎚=0.001㎛)라는 나노테크놀로지가 과학기술을 이끌고 있다. 첨단 의학, 첨단 과학, 섬유 공학 등 각 분야에 놀라운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참포도나무 줄기이신 예수께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신자의 삶이란 나노밀리미터 만큼도 떨어져 있으면 않된다. 시간으로 하면 나노세컨드 만큼도 예수 없이 살아보려 하면 안된다. 완전히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갈라디아 2장 20절 신앙이다. 


<예수 안에 소망있네>(In Christ Alone) 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예수 안에 소망있네 내 빛과 힘 나의 노래

환란 중에 도우시는 주 나의 견고한 반석

크신 사랑 크신 평화 두렴에서 날 건지네

내 위로자 내 모든 것 주 사랑 안에 서리라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네

주 사랑과 그 공의로 세상을 구원하셨네

십자가에 주 달리사 그 진노를 거두셨네

내 모든 죄 담당하신 주 은혜 안에 살리라


죽임당한 세상의 빛 어둠 속에 누위셨네

영광스런 그의 날에 무덤에서 부활했네

승리하신 우리 주님 원수들을 물리쳤네

나 주의 것 주 나의 것 주 보혈 안에 살리라


주 예수의 능력으로 내 속에 두려움 없네

나의 사는 모든 순간 주께서 다스리시네

어느 것도 주 손에서 날 빼앗지 못하리라

주 오실 날 기다리며 주 능력 안에 서리라

주 오실 날 기다리며 주 능력 안에 서리라 


지금은 부활 예수께서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던 기간이다. 올해는 5월 23일 주일이 성령 강림 주일이다. 성령 강림 주일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열흘째 되던 날 있었던 은혜의 날이다.


우리 각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의 아들딸, 손자 손녀들이 농부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포도나무의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동행의 은혜가 가정마다 가족마다, 개인마다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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