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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8) 202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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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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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4-26 17:17 조회 8,900 댓글 0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8)           2021. 4. 25



요즘 무슨 기도를 드리며 사나. 지난 한 주간 동안에는 날마다 무슨 기도를 드려 왔는가. 기도를 주제로 말하면 어떤 이들은 “목사님 저는 하루 세끼 식사 기도 15초만 하며 살아도 다 잘 먹고 잘사는데요.”하고 반응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아침에도 기도하고 밤중에도 기도하였다. 다윗은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였다. 시편 1, 2편은 누가 썼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150편의 시편 중에 73편이 다윗의 기록이다. 놀랍지 않나. 가령 시편 3편으로부터 71편까지 살펴보면 서너 편에만 누구의 기록이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시편들이 모두 다윗의 시편이다. 72편에 가서야 솔로몬의 시 한 편이 실려 있을 정도이다. 사실 시편의 그 많은 시편 들 중에서 다윗의 시편 기록은 그 형식이 대개가 기도와 찬양 혹은 탄식과 간구의 형식을 담고 있다. 


시편 4편 1절의 시작을 보라.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라는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 1절 끝에 보면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시편 4편 3절 끝에도 보면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라고 하였다. 즉 다윗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이신다는 응답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6절 후반부에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마치 민수기 6장 24-26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의 형 아론과 조카들이 대를 이어 기도할 축복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신 그 기도의 내용을 인용해 가면서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나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여덟 번째인 막내아들 다윗을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존귀하게 쓰실지 몰랐을 것이다. 성경은 다윗의 어머니 이름을 전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베들레헴 시골에 살던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그의 아내를 통해서 이루신 가정에서 하나님은 시대적인 큰 인물이 태어나고 자라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 중에 다윗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다윗을 묵상할 때마다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은 그를 어려서부터 붙들어 쓰셨다는 점이다. 베들레험의 산허리에서 양떼를 치며 찬양하던 목동, 피리를 불던 목동, 커가면서 비파와 수금을 타고,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사울 왕과 온 나라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십 대 시절을 보내도록 하나님이 그를 다듬어 가셨다. 


다윗은 날마다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다녔다. 산과 들로 아버지의 양 떼를 이끌고 다녔다. 그의 허리에는 항상 물매가 있었다. 여차하면 돌멩이를 주워서 물매 돌을 날렸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곰과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로 컸다. 곰이나 사자가 아버지의 양 떼에 달려들려고 하면 물매 돌을 사용해서 곰과 사자의 접근을 제어하는 법을 익숙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런 평소의 일과와 물매 다루는 솜씨가 형들을 면회갔던 엘라 골짜기의 불레셋과의 전쟁터에서 빛을 발했다. 저편 언덕에서 고함치던 골리앗 장군을 물매 돌 한 개로 죽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다윗이 한 일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대단한 다윗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항상 대적자들로 우글거렸다. 임금 사울이 다윗을 사위 삼은 것까지는 좋지만 얼마 못 가서 사울 왕은 사위 다윗을 엄청나게 시기하였다. 급기야는 죽여 없애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였다. 다윗은 그런 우여곡절 가운데서 십 년이 훨씬 넘도록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들짐승처럼 이리 숨고 저리 피하며 동굴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그의 나이 삼십 세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다윗은 그냥 그 많은 이스라엘 왕들 중의 한 왕이 아니다. 그는 존경받는 왕이요 후손들이 흠모하는 왕이요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시편이 성경에 삽입될 정도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 기도의 사람, 눈물의 사람, 회개의 사람이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던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은 그런 다윗에 대하여“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천년 후손인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다시 천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게 하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일인가. 


오늘 읽은 시편 4편의 1절에 보면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

부를 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곤란 중에 너그럽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다윗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경건한 자를 택하시는 하나님.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당시의 배경은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을 배반해서 큰 어려움을 겪던 때이다. 시편 3-5편이 다 그런 배경 가운데 탄생한 비탄시이다. 


다윗은 그런 불안정하고 두려운 여건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자신을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다는 분명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택하심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담고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나 택하여 쓰시는 분이 아니시다. 경건한 자를 택하여 쓰신다. 여기서 사용하는 ‘경건(敬虔)한 자’라는 뜻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귀하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천배 만배의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향하여 아침 햇빛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은혜로 임하는 것이다. 그걸 깨달아 아는 것이 택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지 않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택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인가. 요즘 출애굽기를 묵상해 가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택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모세를 택하신 것인가. 이처럼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갈렙을 택하시고, 기드온을 택하시고, 드보라를 택하셔서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셨다. 사무엘을 택하시고, 다윗을 택하시고, 솔로몬을 택하시고, 히스기야를 택하시고, 다니엘을 택하시고, 에스더를 택하시고, 에스겔을 택하시고, 엘리야와 엘리사를 택하여서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셨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를 택하셨다. 물론 그중에 가롯 유다처럼 예수를 배반하고 주를 팔아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불행하고 어리석은 제자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예수는 택하신 12명의 제자의 수에 맛디아라는 세 제자를 채워 그 12명의 제자로 하여금 성령 받은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시작으로 지난 2,000년 동안의 세계 선교의 불씨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경건한 자로 인정받던 다윗이 지금 아들 압살롬과 압살롬을 추종하는 반역 세력들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런 중에 고백한 비탄한 심정의 기도가 시편 4편이다. 3편과 5편도 마찬가지이다. 시편 3편이 아침에 드린 기도라면 시편 4편은 밤 중에 드린 기도이다.


시편 3편 5절에 보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편 4편 8절에 보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라는 시간대를 구별하게 하는 기도의 상황을 알게 하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다윗은 자신이 별의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살아왔다. 다윗은 지금 아들 압살롬과 그와 함께하는 반역 세력에 의해서 왕궁을 벗어나 피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윗의 고백의 중심에는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렇게 착각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그러나 다윗은 지난날 광야와 동굴 속에 피신하던 때에도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사울 왕의 미움을 받고 시기를 받던 때에도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건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여 그 시대에 준비하고 계시고 쓰고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생을 택하여 쓰시나. 그 분명한 대답이 시편 4편 3절에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 사업장에 직원 한 사람을 뽑아도 그를 내 사업에 현장에 택하여 직원 삼는 것으로 주인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고,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주인이 기대하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직원이 원하는 월급만 해결해 주기 위해서 고용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 시대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충성되게 일할만한 일꾼을 택하셔서 그 시대에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시대에는 느헤미야, 세례 요한의 시대에는 세례 요한을 통하여 그렇게 하셨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중에 분명하게 교훈해 주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택하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던 다윗은 3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갖고 주를 따르고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의(義)의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라는 말은 하나님은 “의의 제사를 받으신다”는 믿음이다. 그렇지 않나. 제사란 예배이다. 우리는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제사여야 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담아 드리는 제사여야 한다. 오늘날 예배가 그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어려운 말로 하면 “통전적으로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 “통섭(通涉)의 예배”여야 한다. ‘통섭’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막힘이 없이 여러 사물에 두루 통함”이란 뜻이다. 


다윗은 예배의 사람이었다. 다윗의 하나님 사랑은 남달랐다. 우리는 임금 다윗과 그 시대에 임금 곁에서 지내던 나단 선지자와의 대화를 잘 안다.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윗 때는 성전이 없었다. 모세 때 광야에서 건설한 성막이 사사 시대를 거쳐서 다윗 왕 때까지 이어져 왔다. 성막에 드나들며 하나님께 제사하고 예배하던 다윗은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화려한 궁에 거하면서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잘 지어 봉헌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런 다윗의 마음 중심을 귀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그 밤에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의 후손을 존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사무엘하7장 9절에 보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이 말씀보다 분명한 응답, 더 분명한 축복의 말씀이 뭐가 더 필요하겠나. 다음날 선지자 나단은 다시 다윗 왕을 만나 어제 일을 소상하게 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다윗은 다시 성막에 나아가 기도하였다. 


사무엘하 7장  18절에 보면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기도하였다. 그 기도의 끝에 보면 다윗은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삼하7:29)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 있는 내용 중에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라는 이 기도가 얼마나 귀한 기도인가. 다시 오늘 본문 5절을 보자.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누가 믿음의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시시때때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닌가. ‘의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냥 주일이 되었으니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주일을 맞이하는 이 예배를 기다리고 준비하고 기대와 설레는 마음을 갖고 예배하는 예배자의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예배합니다>라는 찬양이 있다. 




하나님은 그 어느 시대에나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의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들을 통해서 주의 일을 이루어 오셨다. 다윗은 예배자이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반역한 시대적인 패륜아였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은 경건한 예배자, 의로운 예배자, 여호와만을 절대 의지하는 겸손한 예배자의 감격과 응답이 계속되는 예배자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마음에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자녀의 모습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기쁨이다. 그렇지 않나. 정상적인 가정, 정상적인 가족들이 살아가는 가정과 가족의 모습은 그 가정, 그 가족 간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하지 않나. 가정이 화목하고 가족 간에 화목하면 그 가정 안에, 그 가족들 간에 기쁨이 있다. 엄마 아빠 아들딸 간에 기쁨이 있다. 다윗은 그 기쁨을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찌 다윗의 마음이 기쁘기만 하였겠나. 못된 자식도 자식인데... 그렇지 않나. 압살롬은 외모가 잘 생긴 아들이다. 머리가 명석한 아들이다. 그런 그에게는 왕궁의 문 앞에서 백성들이 마음을 아버지 다윗에게서 자신에게로 돌이킬 정도의 간교함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다윗은 지금 “주께서 그의 마음에 주신 기쁨”을 기도하고 있지만 다윗의 마음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모반해서 예루살렘 왕궁에서 벗어나서 피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다윗의 마음에 무슨 데단한 기쁨이 있었겠나. 


주변을 보라. 인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라. 2절에 보면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포함해서 인생들로 하여금 받은 마음의 상처와 회한을 하나님께 호소하듯 기도하고 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겠는가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4절에 보니까,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이것은 어리석은 아들 압살롬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왕 다윗을 왕궁 밖으로 몰아낸 세력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떨다’라는 말은 ‘분노하다, 분개하다’라는 뜻이다. 즉 너희들은 너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깨닫고 스스로 분한 마음을 갖고 철저히 회개하고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라는 말은 압살롬 중심의 반역 세력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치며 그들의 악행이 얼마나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도전 행위인가를 깨닫고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6절의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며”라는 탄신은 피신 중인 다윗의 곁에서 밤낮 웅성거리는 말로 들려 오는 다윗의 추종자들의 탄식을 다윗이 대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제 곁에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주의 백성들이 불안에 떨며 주의 선하신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탄식하며 절규하듯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를 계속하던 다윗은 왕궁을 벗어난 피신처에서 마음의 평정을 구하며 하루해가 기울고 어둠이 찾아온 밤중에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왕궁이 아닌 피신처의 어느 산자락, 어느 계곡에서 은신처를 삼고 불편한 잠자리에 누우면서 캄캄한 밤중에 이런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8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주었다.


“내가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맞이한 다윗의 피신처의 아침 기도를 시편 3편 5절에서 대하게 된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다윗은 불안한 중에도 평안을 누리고, 충격과 분노와 억울함과 답답함 중에서도 순간마다 찾아오는 기쁨을 누릴 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를 풍성하게 거두는 날의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기쁨을 시편 5편 11절에서는 “ 주께 피하는 자의 기쁨,  주의 보호로 말미암는 영원한 기쁨,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의 즐거움”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불안정한 난세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매순간마다 채워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과 은혜와 위로가 늘 함께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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