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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왜 놀랍게 여기느냐(행3:11-21) 202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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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4-26 17:16 조회 7,971 댓글 0
 

                    왜 놀랍게 여기느냐(행3:11-21)            2021. 4. 18



태어나서 40여년 동안 걸어 본 적이 없는 선천적인 장애인이 걷고 뛰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놀랍지 않겠는가. 초대교회의 성령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날마다 성전에 출입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는 40년 동안 걸어 본 적이 없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나면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이였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그의 나이가 사십여세였다고 했다. 어느 집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이 한해, 두 해가 지나도 걷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자신이 걸을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란 것을 알게 된 이 아기 자신은 자라나면서 얼마나 절망하고 절망했을까.


사람들은 그런 그를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는 미문이란 문 앞에 자리를 깔고 구걸하는 거지로 데려다 놓았다. 사도행전 3장 2절에 보면 사람들이 그를 메고 와서 성전 미문 앞에 날마다 두었다. 성전에 예배드리러 드나드는 이들에게서 몇 푼이라도 도움을 받아서 먹고 살라고 그를 날마다 구걸 현장에 출근시킨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에게 동전을 던져 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그 걸인이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성전을 출입하던 사람들은 그가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인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워하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이름 붙여 부르는 곳에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묵상이 제목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고 정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놀랍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 일도 할 수 있고 저 일도 할 수 있다. 코로나가 자연재해요 전염병이 재앙이지만 연구 개발한 백신 주사 투약으로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마스크를 벗고 활동하는 제 1 국가가 되었다고 하지 않나. 이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그것이 전도서 3장의 교훈이 아닌가.


전도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3:11)을 갖게 하시려고 이러 저러한 일 들 중에 깨달음을 갖게 하신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고”(전3:14) 그렇게 하신다고 하였다. 


자, 그러면 40여년을 걸어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을 걷고 뛰게 하신 하나님은 이 기적 사건으로 모여 드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행하고 계신가.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

베드로는 놀라워하는 무리들 앞에서 차근차근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였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리 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 시간에 베드로를 통해서 그런 말씀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드나드는 이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레위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전 제사와 성전 기도를 위해서 날마다 드나드는 저들 동족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이 이 표현이다. 

요즘 날마다 출애굽기 말씀을 조금씩 묵상해 가고 있다. 출애굽기의 특징이 이것이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보면 호렙산의 떨기나무가 불 붙는 것 같은 환상 앞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놀라워하는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네가 선 곳을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모세에게 설명해 주실 때 쓰신 표현이 이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 있던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나날을 보내며 기도 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이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40여년 못 걷던 걸인을 일으켜 세운 이 기적 사건 앞에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저들에게 “내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하고 외쳤다. 이런 설명을 듣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도행전 3장 11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다.”그렇지 않겠나. 이 정도 기적의 현장이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큰 관심을 갖고 모여들만 하지 않겠나.


그 때에 베드로의 입을 열어서 성령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 중심 세력들은 점점 큰 무리로 번져가는 부활 공동체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사도행전 4장을 잠시 보자. 사도행전 4장 2절에 보면“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라고 하였다. 누가 싫어하였나. 사도행전 4장 1절에 보면 대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들, 사두개인들이었다. 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을 당하도록 여론몰이를 한 주인공들이다. 강도 바라바를 풀어 주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성 지르도록 선동한 중심 세력이 저들이다. 그런 저들 들으라고 하나님은 지금 이 기적 사건에 이어서 베드로 사도의 입을 열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너희가 믿는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도록 넘겨 주었다. 너희가 예수를 거부해서 십자가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 승천하게 하심으로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사두개인’들을 주목해야 한다. 사두개인들도 제사장 가문의 후손들이다. 다윗 때의 ‘사둑’ 제사장 후손들일 것이라고 한다. 저들은 천국, 부활, 영생, 천사 이런 것에 관심이 없던 이들이다. 로마에 빌붙어서 과거 우리나라의 친일파처럼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떤 길을 선택해서라도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지극히 현세 중심의 세속적인 무리들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 저들에게는 “예수가 부활했다. 예수가 승천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런 말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 미문 앞에서 날마다 누군가가 메어다 놓고 구걸하게 하던 40여년을 못 걷던 한 사람을 걷고 뛰게 하심으로 백성들의 관심을 다시 예수 중심으로 이끌어 가고 계신 것이다.


맞다. 역사에 영원히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영원히 영화로우셔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면 왜 베드로 사도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였는가” 하고 질문하여야 한다. 성경학자들은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 52장 13절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 중에서 인용한 표현일 것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는 말씀이다. 맞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종이 당하는 고난과 같이 극심한 십자가 고난 중에 내어 버리시듯 처참한 고난을 겪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종의 죽음과 같은 순종의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셔서 지극히 존귀하게 높이셨다. 이사야 52장 15절에 보면 이는 나라들이 놀라고 왕들이 입을 봉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렇지 않나. 예수의 부활 사건은 후대에 두고두고 나라들이 놀라고 왕들이 입을 봉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실이며 역사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은 지금 성전 미문 앞의 40여년 못 걷던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고 뛰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새벽에 예배당에 모여서 32장 찬송을 부를 때 그런 감격이 있다.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사람이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세상 지도자는 때가 되면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사양길을 걷게 된다. 정상이란 자리, 높은 자리, 꼭대기란 자리가 그런 것이다. 산이라는 것이 정상에 오를 때가 좋지 얼마 후에는 하산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예수도 변화산의 신령한 체험 후에 초막 셋을 지어 모시고 싶어하는 베드로와 세 제자들에게 “산 아래로 내려 가자”고 하셨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는 것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진 몇장 찍은 후에는 곧 하산을 시작하여야 한다. 거기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인생이 그런 것이다. 자랑할 것이 없다. 왕이라도 그 권세가 영원하지 않다. 오직 영원한 것,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분, 영원히 영화롭게 되실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시편 2편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세상의 왕들을 비웃으신다. 우리 주님 예수의 경우는 달랐다. 예수는 날마다 점점 그의 생이 영화로워 가셨다.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의 생애를 점점 영화롭게 인도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는 중에서도 영화로운 그리스도이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의 생이 더욱 영화로워졌다.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영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예수는 영광중에 오시고 영광중에 사시다가 영광중에 죽임을 당하시고 영광중에 부활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주님이시고 영원히 영화로운 주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 부활 승천을 통하여 아들의 삶을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들을 보며 놀랍게 여겨야 마땅한 것이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부활 예수.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하였다. 대제사장도, 성전을 맡아 섬기던 레위인들도, 바래새인, 서기관, 산헤드린 관원, 사두개인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예수를 거부하였다. 사도행전 3장 13, 14절이 그런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저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자인 강도 바라바를 놓아 주기를 구하였다.


그리고 생명의 주를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셨다. 그 예수는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를 부활 승천케 하셨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 주일 전에 부활 주일을 맞았다. 요 계절이 되면 어미 닭이 달걀을 품는다. 삼 주 동안 품으면 그 품 안에서, 달걀 속에서 노랑 병아리가 태어난다. 병아리가 다 자라면 달걀 속에서 제 부리로 껍데기를 깨고 나온다. 신기하지 않나.


예수의 부활을 상징할 때에 알에서 병아리가 탄생하는 일, 나방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일을 상징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그런 정도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한다. 만물이 약동한다. 그 많던 화사한 벚꽃이 다 어디로 갔는가. 꽃은 그런 것이다. 풀과 꽃은 그런 것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만이 영원한 것이다. 


영원하신 말씀, 지난 시간 요한 일서 1장 1절에서 대한대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아들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셨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고 태어나셨다. 마리아의 품에서 젖을 먹고 자라나셨다.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의 무릎에서 자라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 그 자체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셨다. 프레데릭 구달(Frederick Goodall, 1822-1904)의 작품 중에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을 지난주에 우연히 감상하였다. 우리는 그런 그림을 보며 이런 성탄 찬송을 봄에도 부르고, 여름에도, 가을에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  맑고 환한 밤 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이 왕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1849년의 찬송시이다. 1850년부터 이 찬송이 울려 퍼졌다. 170년 동안 성탄절마다 부르고 또 불렀다. 왜일까.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어두운 세상, 이 소란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찬양을 부르자.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 드리세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나의 맘과 뜻 다해 주를 사랑합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내가 약할 때 강함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내가 약할 때 강함 주고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신 나의 주 감사 감사


우리가 이런 찬양을 계속해서 부르고 또 불러야 하는 이유요 대답이신 거룩하신 주님, 의로우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영원한 생명의 주님, 부활 승천하여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신 언약의 주님을 찬양하고 전파하자. 

 

 

증인(證人)들을 통하여 복음(福音)이 전파(傳播)되게 하시는 주님. 

15절 끝에 보면 베드로는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하였다. 놀랍지 않나. 그렇게 비겁하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맹세하며 저주하고 도망가 숨어 지내던 베드로가 아닌가. 그런 저를 부활하신 예수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찾아가서 만나시고 또 만나셨다. 갈릴리 해변에서는 새벽 해변가에 숯불을 지피고 떡과 생선도 구워 먹게 하셨다. 그리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물으셨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셨다. 그리고 드디어 그를 초대교회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성령 충만을 받는 역사적인 복음 전파자로 구별하여 세우셨다. 


베드로는 이제 더이상 비겁하지 않다. 이제 더이상 두렵지 않다. 더이상 도망다니고 숨는 그런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베드로를 쓰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베드로의 입을 열어서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게 하고 계시다. 그 증언의 내용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3장 16절 이하를 보자.

베드로의 증언은 확신에 가득 차 있다.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사람을 일어나 걷고 뛰는 새 사람의 모습으로 완전히 고침받게 하였다. 너희가 죽인 예수, 너희로 인해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미리 알게 하신 메시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이룩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증언한 그 유명한 교훈의 증언이 사도행전 3장 19절에 나온다. 다 같이 읽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悔改)하고 돌이켜 너희 죄(罪)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愉快)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이것이 복음 전파의 핵심이다. 


지난 주중에 우연히 21대 국회의원에 비례 대표로 당선된 탈북자 출신의 지성호(1982- )의원의 간증을 접하였다. 지성호 집사는 1982년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 주변에서 철물을 녹여 철제품과 연장을 만들기 위해 열악한 용광로 작업을 하는 불 길 앞에서 날마다 일했다. 북한 형편이 어려워지자 일만 날마다 하고 배급도 못 받은 채 빈 손으로 집에 돌아 오는 날이 많아졌다. 300여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북한의 김정일 때의 ‘고난의 행군 시대’라고 부르는 1990년대에 소년 지성호는 10대 시절을 평북 회령의 탄광촌에서 보냈다. 지독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화물열차에서 석탄을 훔쳐 파는 꽃제비로 살아가던 중 열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지나가는 기차에 깔려서 열다섯 살 때에 왼쪽 다리와 왼쪽 손을 잃었다. 석탄 훔쳐다고 먹고 살려던 그는 지나가는 60톤의 기차에 왼쪽 다리가 으깨지고 피 범벅이 된 채 응급차에 실려 갔다. 열악한 병원 수술실에서 마취약도 부족하여 자기 귀에 다리를 톱으로 썰고 줄칼로 뼈를 다듬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가운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이기며 살아남았다. 그를 하나님은 요즘 쓰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를 붙들어 일으켜 의족, 의수를 통해 불편한 걸음 불편한 손가락이지만 세계를 품고, 북한을 품고 일하게 하고 계시다.


거대한 감옥과도 같은 북한에서 벗어나고 싶어 2006년, 24살 때에 탈북하여 목발을 집고 중국, 라오스, 미얀마, 태국을 거쳐서 1만여km 이상을 걸어서 그해 7월에 대한민국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3년 후인 2009년 동국대 회계학과에 입학 후 법학과로 전과하여 6년만에 졸업했다. 2010년 4월, 북한의 인권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탈북민을 돕기 위해 “인권 회복을 위하여 지금 행동하고 연합하자”는 뜻을 담은 나우(NAUH, Now Action And Unity For Human Rights)라는 인권 단체를 설립해 지금까지 3만여명의 탈북민 중에서 그의 손길을 통해서 500여 명의 탈북민을 대한민국에 입국시켰다. 


2018년 1월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의 첫 국정연설에서 ‘전 세계인의 희망의 상징’으로 대한민국 청년 지성호를 소개하면서 국제사회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다음 달인 2018년 2월에는 탈북자 일곱 명과 함께 백악관에 초대받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대담을 나누었다. 미상하원 연설의 기회를 가졌고 상하원들은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을 통해 북한의 상황을 알리는 다양한 대외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탈북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 간의 인식 개선프로그램 및 캠페인을 준비하며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사역하던 중에 국민의 힘을 통해서 비례 대표 국회의원에 등용되어 의회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주저앉아 구걸하는 인생으로 끝마치길 원하지 않으신다. 일어나 걷기를 원하신다. 가난을 딛고 일어나고 무지를 딛고 일어나고 탄압과 핍박과 학대와 방치와 따돌림과 소외와 불평등과 차별 대우와 무시 받고 비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고난과 시련과 질병과 우울과 장애와 흑암의 먹구름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인생으로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걷고 뛰기를 원하신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용기를 갖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 승천하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자.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여 죄 사함 받은 새 사람 삼기를 원하신다. 새롭게 되는 날을 보게 하시길 원하신다.


다 같이 일어나서 “나의 등 뒤에서” 찬양을 부르자.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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