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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말씀의 동행(눅24:17-27, 32) 20210110 청지기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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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1-10 23:03 조회 7,966 댓글 0
 
                    말씀의 동행(눅24:17-27, 32)            2021. 1. 10 청지기 주일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에녹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의 사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였다. 창세기 6장 22절에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이다. 

맞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생활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창12:4) 그래서 우여곡절을 뒤로 하고 믿음의 조상, 언약 신앙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저들 대대로 한결 같은 언약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저들이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 오늘 날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 공동체의 조상이 되었다. 

올 한해, 그리고 평생토록 말씀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말씀하시고 그가 이룩하신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 복음의 신비가 이것이다. 예수는 이천년 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밖의 산 언덕인 골고다 언덕에 끌려 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나의 죄를 사하는 죽음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 대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려면 이 질문과 궁금증 앞에 분명한 대답 즉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직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지난 주에 이어서 같은 본문의 일부를 묵상할 것이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거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거하실 그 당시의 기사와 이적과 각종 표적와 천국 비유의 말씀을 담고 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서 남겨 주신 얼마나 많은 다양한 내용을 천국 비유를 아는가.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그런 다양한 비유의 말씀으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을까. 예수의 모든 비유의 주제는 단 한 가지였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씨 뿌리는 비유, 물고기를 잡는 비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집 안에서 잃어 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비유 등등의 별의 별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교훈해 주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오후에 다른 사람이 아닌 글로바라는 이름의 제자와 또 다른 한 제자의 곁에서 함께 걸으셨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향하는 이십오리 길을 가고 있던 저들 두 사람 곁에 다가 가셔서 저들과 세시간 정도를 함께 걸어가시면서 말씀하셨다. 

생각하여 보라.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늘 누군가에게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고 세 시간 정도 분명한 천국 교훈을 주제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신다면 그 누구라도 분명한 깨달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곁에 함께 걷고 계신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오히려 예수께 이런 저런 최근의 일들을 설명해 주려 하였다. 예수께서 저들에게“너희가 길을 가면서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저들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모르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시치미를 떼신 예수께서는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셨다. 그 때 저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다.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그를 사형 판결에 넘겨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게 하였다.
우리는 그 동안 예수가 이스라엘을 속량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예수가 죽임 당한지가 사흘째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어떤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찾아 갔었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이 하는 말만 듣고 왔다고 한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우리와 함께 활동하던 두어명의 다른 제자도 예수의 무덤을 찾아 갔다.
그러나 예수의 빈 무덤만 보고 예수는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런 긴 설명을 들으며 함께 걷던 예수께서 하신 대답 속에 말씀의 교훈이 담겨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예언을 따라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칠팔백년 전에 미가 선지자나 이사야 선지자등을 통해서 메시야를 보내 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어 베들레헴에 오신 것이다. 예수가 어디서 태어날지, 누구를 통해서 태어날지, 어떤 모습으로 태어 날지, 어떤 모습으로 성장기를 보낼지, 그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후에 어떤 삶을 살지, 어떤 죽음을 죽을지, 어떤 부활을 이룰지를 미리 예언하셨다. 그리고 그 예언을 따라 보냄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글로바와 또 한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25)라고 비탄이 섞인 책망조로 말씀하셨다. 헬라어 원문에는 ‘오’(Ω)라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깊게 생각하지 못하여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예언들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는 책망조의 말씀이시다. 맞다. 예수는 예언을 따라 오셔서 예언을 예언대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자이시다.

음악,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과 관련된 전공자들은 분명하게 안다. 연출자의 계획된 시나리오나 대본이 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이나 뮤지컬이나 오페라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한 작품은 무대 전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에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고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다. 이 세상에 우연한 일이란 절대로 없다. 모든 일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있다. 정반합(正反合)의 원리가 있다. 심지 않고 거두는 법은 없다. 악을 심고 선을 거두는 경우란 없다. 적게 심고 많이 거두는 법도 없다.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나사렛, 갈릴리 주변 마을들, 가나, 베다니, 감람산,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등에 가보면 그 당시의 예수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듯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은 내가 살아 온 어제와 연결되어 있다. 성경책을 접하다 보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로부터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창세기의 요셉과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와 가나안 시대의 여호수아, 갈렙 등의 생생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우리나라로 하면 조선실록이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정기의 세세한 기록들이 오늘 날까지 보존되어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는 역사 속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다녀 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예수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며 살아간다. 
그러면 질문해 보자.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신가”
마태복음 3장에 보면 광야에서 복음은 전파하던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선포한 말씀의 내용이 실려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1-12)

그렇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예언처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물 세례는 세례 요한에게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땅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24장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는 고백처럼 예수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130년 전에 우리나라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와서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을 보라. 감리교의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장로교의 호레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유능하고 헌신적인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교육의 헌신자들이 복음의 힘을 입고 와서 생명을 바쳐서 희생적은 삶을 살았는가. 성령과 불로 세례 받은 저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낯설은 가난한 나라에 와서 그렇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생명을 다 바쳐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었겠는가. 

늘 말하고는 하지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한 가정 이렇게 공동체를 이루고 여기 까지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도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우리 각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와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 비대면의 시대를 잘 극복해 가는 거룩한 연합이 지속되기를 축원한다.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심지어 그가 자라난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에게조차 배척을 당하셨다. 공생애를 시작한 후에 나사렛의 회당을 방문하였던 예수는 그를 죽으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렛 마을의 낭떨어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트려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는 용케 그 현장을 벗어나서 피신 할 수 있었다. 예수는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 대제사장들에게 늘 시기와 배척과 반복의 대상이었다. 결국은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예수를 죽이려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와 역대 대제사장 문중과 바래새인, 서기관들이 작당을 해서 예수를 본디오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장으로 몰고 갔다. 

이사야 53장의 예언에 보면 그 예언이 너무나도 자세하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3-5)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은혜, 평화, 안식, 축복을 바라고 소망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말씀부흥 성회 첫 날, 이덕호 목사의 설교 제목처럼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이 세상 어느 시대 그 어디에도 예수 믿어 평생 꽃길만 걷다가 주님 앞으로 간 신앙인은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시밭 길을 가면서 간혹 들장미 향기와 들국화 향기를 맡고 감사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 인생은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시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내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하시는 주님이시다.(사43:20)

한숨과 눈물과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올 한해,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답게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눈물과 애통과 아픔을 뒤로하고 동행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벅찬 감격으로 주를 찬송하며 살아가는 말씀 동행의 은총이 임하기를 축원한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다. 부활 신앙이 불명확하거나 불분명한 상태에서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고 직분 받고 신자인양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사울이 그런 주인공이었다. 부활 신앙을 몰라서 모세의 율법에 갇혀 지내던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당시 대 석학인 가말리엘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 문하생이었다. 그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가장 주목 받던 젊은 최고의 율법학자였다. 그에게는 부활 복음을 대적하는 혈기 또한 대단하였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어도 싸다고 여기던 자였다.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 그런 그가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그를 부르시는 예수 앞에서 땅에 엎드러졌다. 강한 빛이 그의 두 눈을 멀게 하였다. 땅에 엎드러진 그에게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하고 물었다. “나는 네게 박해하는 예수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기 있느니라.”

앞을 못 보게 된 사울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메섹의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사흘을 금식하며 지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 그 때 하나님은 다메섹에 사는 선지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안수해서 보이지 않는 눈이 보이게 하라고 하였다. 아나니아는 소문에 듣던 그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울이 맞다면 감히 두려워서 어떻게 그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였다. 
주께서는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고 아나니아에게 장차 사울을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하여 언급해 주셨다. 주님의 분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아나니아는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을 찾아 갔다. 거기서 사흘 째 앞을 못 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있던 사울을 만났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면서“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하였다.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 음식을 먹었다. 강건해 졌다. 사울은 다메섹에 살면서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만났다. 며칠을 저들과 함께 묵었다. 날마다 다메섹에 있는 각 회당을 찾아 다니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전파하였다. 교회 핍박자, 예수 박해자 사울이 그 사람인 것을 알아 본 주변 사람들마다 다 크게 놀라워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며 다녔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모두가 변화받은 사울의 모습을 보고 당혹스러워했다. 그 날 이후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 탄생한 것이다. 예수 부활 복음에 붙잡히고 나니 그는 오직 예수 한분 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배설물같이 여기며 겸손한 열정의 부활 복음 전파자로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갔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예정과 섭리가 분명히 있으시다. 

구약 시대의 다윗이 그 길고 길 고난의 광야와 동굴 생활을 끝으로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후에 다윗은 휘하의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간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백성들에게 큰 과오를 드러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은 다윗을 정금처럼 다듬어 가셨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시편 150편 분량 중에 73편 분량을 기록하는 영광스러운 말씀의 사람, 은혜의 사람, 찬송의 사람, 기도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셨다. 다윗은 실로 말씀 안에서 주님과 평생을 동행한 말씀의 사람이었다.

올 한해, 하루 하루 날마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토록 말씀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은혜와 성령 충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새해를 맞아 남주희, 여윤재, 고하연 이 세 청년들이 새로운 속회로 모인 것이 너무 기쁘다. 네 다섯 살 적부터 무릎 앞에 가까이 세우고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던 유치부 어린이들이었는데 이젠 대학생들이 되었다.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오고 있다. 화살 같이 빠른 세월, 시간과 세월을 아껴서 부활 복음이 처처에 번져 나가도록 말씀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사람들, 말씀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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