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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로마서(롬1:1-7) 202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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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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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9 20:17 조회 8,783 댓글 0
 
                    다시 읽는 로마서(롬1:1-7)              2020. 7. 19


로마서는 제 3차 전도 여행 말미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후 57년 말경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그 당시까지 사도 바울은 로마에 방문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러나 그에게 그럴 기회가 쉽게 주어지질 않았다. 그러한 여건의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써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소의 기도 생활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전하고 싶었다. 

어떻게 로마에 교회가 탄생했을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강림 당시에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주변 국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성령 강림의 현장을 목격한 이들이 있었다. 저들이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서 나름대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 로마 교회의 탄생이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하다 보니 저들은 율법주의에 바탕을 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 하였고 복음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에는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그 어느 사도도 그 곳까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이들은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저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언제나 불붙고 있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행위와 공적으로 구원을 받는가.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택하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성도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거듭남이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무엇인가.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떠한 삶을 말씀하는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이런 다양한 주제의 복음의 말씀을 자세하게 가르쳐 전파하고 싶은 열정이 가득하였다. 로마서 15장 19절 말씀에 근거해 보면 바울이 제 3차 전도 여행(A.D. 53-57)을 마무리 해 가던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3개월 어간에 기록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로마서를 쓴 때는 주후 57년 말 경이다. 
로마서를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이들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신명기와 일부의 시편을 끝으로 오늘부터 로마서를 매일 묵상하게 된다. 그 첫 시작인 로마서 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되는 주일 아침이 되길 바란다.


부르심.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원래부터 복음을 전파하던 자가 아니었다. 얼마나 심하게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그런 그가 변화를 받고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증거하는 이방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자신이 누군지를 편지의 서두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로마교회의 이 편지를 받아 읽을 성도들에게 바울 자신이 자신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우리가 그 단어의 의미 정도로 이해하는 ‘종’의 차원보다 훨씬 심각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로마 시대의 종 즉 ‘둘로스’  (δοῦλος)란 노예를 말한다. 그 당시에는 말할 줄 아는 노예와 말할 줄 모르는 노예가 있었다. 말할 줄 아는 노예가 여기서 말하는 종이고 말할 줄 모르는 노예는 밭을 갈고 짐을 실어 나르며 주인을 위하여 고된 노동을 계속하는 나귀를 일컫는 용어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이시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로마서가 시작되는 이 앞부분의 일곱 절의 말씀 중에 ‘부르심’이란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이 편지를 받아 읽을 로마 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각자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절과 7절이 그런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 당시나 오늘 날이나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요즘과 같은 비대면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극심한 전염병의 위협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부르심이 분명한가”하는 질문과 분명한 대답 말이다. 

부르심이 불분명하면 언제나 하나님과 세상,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중간 지대, 회색지대에서 갈팡질팡하고 말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는 나를 향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요즘 네프릭스에 올라 있는 영화 중에 <두 교황>이란 작품이 있다. 전직 교황과 현직 교황을 주인공으로 한 사실에 근거한 작품이다. 전직 교황인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1927-, 재위 2005-2013)는 265대 교황이었다. 가톨릭 역사상 교황은 승하하여야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를 포함하여 단 두 명의 교황만이 생존시에 물러났다. 지금 교황인 프란치스코( Francis, 1936-)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프란치스코는 화공학도 출신이다. 

저들 두 교황의 대화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프란치스코는 추기경으로 있을 당시에 베르골리오라는 이름이었다. 그가 추기경직을 사직하기 위해서 바티칸을 방문하였다. 그 당시 현직 교화이었던 베네딕토 16세와 정원을 거닐며 이런 저런 대화를 하였다. 그러던 중에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교황님. 과거에 신학교에 입학한 두 신학생이 있었는데 둘 다 담배를 끊지 못하고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상담 지도 교수에게 두 학생이 찾아 가서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한 학생이 먼저 질문하기를“교수님 제가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하였는데 기도 중에 담배를 펴도 괜찮습니까” 그러자 교수가 하는 말이 “절대 그래서는 않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상담을 요청한 다른 신학생은 “교수님 저도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 여쭙겠습니다. 담배를 피우면서 기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그 때 교수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상관 없다”하고 상담해 주었습니다. “교황님. 이 두 학생를 상담한 내용 중에 어느 것이 올바르다고 여기십니까”...........) 뭐 대강 이런 내용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즘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무슨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무슨 내용에 있어서 분명한 대답을 찾기를 원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자세, 어떤 태도를 말씀하는 것일까.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영어 NIV로 보면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라고 하였다. 무슨 말씀인가.  예수의 마음을 배우고 본받아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의 삶의 태도를 본 받는 것이다. 왜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디모데 전서 6장 11절에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것을 교훈하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긴 했지만 요즘 나라가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하다. 분야마다 사건마다 무질서하기 그지없다. 국회, 정부, 사법부 돌아가는 것이 거의 다 상식에서 벗어나고 사실에서 멀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숨기는 것이 많고 쉬쉬하는 것이 많다. 세상이 참으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편 가르기가 심각하다. 내 편에서 일어난 일과 벌어진 일은 다 옳다. 무조건 두둔하고 무조건 덮고 지나가고 무조건 칭찬 일색이다. 그러나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발로 밟으려고 하고 묵살하고 으깨고 역사 속에 진실과 거짓을 숨겨서 덮어 버리려고만 한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어느 교회의 안수집사라고 한다. 안수집사 정도면 하나님의 사람다운 최소한의 신앙관이 일상에 들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나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나 윈스턴 처칠 정도는 아니어도 말이다.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 1837-1920)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생활 속에 실천하고 실현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네덜란드가 배출한 칼빈 신학자요 목사요 교육가요 복지 사업가요 교수요 성경말씀에 기초한 인물을 배출하는 건학 이념을 가지고 1880년에 시작한 뿌라야 대학교의 설립자였다. 그는 감동적인 설교가요 저명한 강연가요 무려 223권의 책을 저술한 저술가였다. 사상가요 철학가요 개혁가요 언론이요 정치가였다. 정당의 총재요 의회의 의원이요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수상이었다. 기독교 국가다운 국가 건설을 꿈꾸고 실현하길 원했던 그에게도 정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정적들 조차도 아브라함 카이퍼를 말할 때에는 “그는 열 개의 머리와 백개의 손을 가진 인물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디스 카이퍼(Dis Kuyper)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5살에 <잔 칼빈과 잔 로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6살에 결혼하고 베이스드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발투스라는 이름의 신실한 여신도가 그에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성경대로 따르는 믿음을 가지라”는 충고를 하였다. 그는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민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생각하는 법, 성경을 대하는 법,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하는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교회를 떠나는 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고 목사가 되고 베으스도교회에서 사역하였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용서를 빈다”는 말을 마지막 말로 남겼다. 그 후로 그의 개혁주의적인 신앙관은 점점 불타 올랐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아니었다. 그 후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신앙은 ‘영역 주권’이란 명제였다. 어떻게 하면 모든 분야의 구석 구석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도록 하느냐는 질문과 그 대답을 찾아 가는 일상의 삶을 구체적으로 추구해 나갔다. 그가 즐겨 쓰는 말은 “왕을 위하여”(Pro Rege)라는 표현이었다. 

다시 생각하여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오늘 날 나는 성도로서의 이 부르심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일이 묵상할 시간이 없다. 생각하여 보라.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브라, 사무엘, 다윗, 이사야, 다니엘, 엘리야와 엘리사, 느헤미야, 에스더 등 모두 다 일일이 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 삶을 살았다. 세례 요한과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의 열두 제자와 로마교회에 편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오늘 날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택하심.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 사도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택정함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되기 전까지는 복음에 대하여 혈기가 등등하게 반대하고 나섰던 교회 핍박자요 성도 박해자였다. 그런 그가 예수의 택하심을 따라 변화받은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정하신’이란 말씀이 ‘택정(擇定)하심’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각 사람은 여자나 남자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누구나 다 각 사람이 하나님이 택정함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택정하여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은총이며 거듭남의 은혜인 것이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주일 날 이렇게 예배당에 와서 매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이 생활이 아무나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예배생활이 우선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날마다 새벽마다 예배 시간마다 예배당에 와서 예배생활을 계속하는 생활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처럼 분주하고 길에서와 자동차 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써야 하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예배당을 찾고 또 찾는 생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 생활 중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가정과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택하심을 받은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미국 백악관이 있는 도시가 워싱턴DC이다. 워싱턴제일교회 담임 목사가 아틀란타 집회 후 돌아 오던 비행기 안에서의 체험이다. 댈러스 국제 공항이 가까워지며 비행기 고도가 점점 낮아졌다. 아무리 자기가 섬기는 워싱턴 제일교회를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작은 예배당이 아닌데도 좀처럼 눈에 띄질 않았다. 저만치 백악관이 보였다. 미 의회건물도 보였다. 미 국방성인 펜타곤 하우스도 보였다. 링컨 박물관도 보였다. 자연사 박물관 건물도 보였다. 죠지 워싱턴 대학교 캠퍼스도 보였다. 죠지 워싱턴 대학교는 학부생이 10,000명이 넘고, 대학원생이 13,700명이 넘는 큰 대학교이다. 교수의 수만도 2000명이 넘는 대학교이다. 1981년에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총격을 당하였을 때에 급하게 후송한 곳이 죠지 워싱턴 대학 병원으로 잘 알려진 대학이기도 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졸업한 조지타운 대학교 캠퍼스도 보였다. 링컨 기념관 가까이에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기념하여 세운 170여m 높이의 기념비(Washington Monument)도 선명하게 보였다. 워싱턴DC를 가로 질러 흐르는 포토맥 강줄기도 선명하게 한 눈에 들어 왔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한 후에 그는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자신이 오래도록 섬기는 교회의 예배당 건물은 하늘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백악관, 의사당, 병원, 대학교, 박물관, 도서관, 기념관, 국방성 등에서 이러 저러한 분야에서 사회생활하는 교인들의 이름과 얼굴이 일일이 떠 올랐다. 정치인, 관료, 연구원, 교수, 학장, 총장, 박사, 의사, 병원의 원장, 대학의 행정 책임자, 박물관의 고고학자 등등 각 분야의 저명한 인물들의 얼굴이 일일이 떠 올랐다.

그제서야 생각하였다. “아. 하나님. 저희 교회의 성도들이 이 거대한 도시의 구석 구석 각 분야에서 이러 저러한 자리에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사회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가정 생활을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날과 같은 비대면의 시대에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우리가 서로의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못 본지가 거의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이와 같은 답답한 때에 우리는 서로가 세상에서 빛의 자녀다운 부르심과 택하심이 분명한 삶을 더욱 더 진지하게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은혜와 지혜와 능력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하나님의 복음.
바울이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이유와 목적은 분명하다. 복음을 위한 것이다. 2-4절은 이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내용이다. 예수는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성결의 영 즉 성령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롬1:4)

바울은 1절에서 “사도로의 부르심”을 말씀하고 5절에서“사도(使徒)의 직분(職分)”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다. 사도 즉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그 앞에 부름 받은이란 뜻의 ‘클레토스’를 형용사로 붙여서 ‘부름 받은 사도’라고 하였다. 그렇다. 바울이 스스로 사도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부르신 것이다. 

이는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부르심과 택하심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살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은 택함 받은 사도인 바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일이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절의 ‘직분’(職分)을 경홀히 여기면 않된다. 우리는 에서와 야곱을 묵상할 때마다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고 동생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마음에 두었음을 주목하고는 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롯 유다는 제자로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경홀하게 여기다가 불행하게 생을 마치고 말았다. 

5절을 다시 보라. 은혜와 순종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성도의 직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사도 직분 즉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가정, 직장, 사업의 터전, 교회, 사회의 구석 구석에서 주어진 직분이 있다. 그 직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베드로 대 성당을 건축하는 현장에 어느 추기경이 나서서 현장을 둘러 보았다. 여러 석공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리석을 다듬고 있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하고 물었다. 석공들의 대답이 제각각이었다. “배운 것이 이것 뿐이라 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니까 날마다 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예 추기경님 저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각 사람의 태도는 각각 달랐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가정에서 가족을 대할 때에, 직장에서 상사를 대할 때에 동료를 대할 때에 혹은 아랫 사람을 대할 때에 어떤 태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는가.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일 중에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며 
사람 중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중에 새벽 기도 시간에 묵상한 내용이다. 영국의 명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긍정적인 사람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본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위기 속에서 어려움만 본다”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나.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 지금의 나의 태도, 지금의 나의 마음 가짐이 나의 미래, 나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한번도 만나 본적이 없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문안하였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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