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에 부르는 찬송(신16:9-12, 시145:8-13) 2020. 7. 5 맥추감사주일
하나님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 세 절기를 반드시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절기를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바탕이다.오늘은 맥추절이다. 맥추절을 칠칠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첫 이삭을 베기 시작한 후에 칠주가 지난 날을 정하여 맥추절을 지키도록 이름 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 읽은 신명기 16장 9절부터 12절까지에서 맥추절 즉 칠칠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이 내용을 정리하면 무슨 교훈을 명령하고 계신가.
첫째, 정해진 날에 칠칠절 즉 맥추절을 지키라
둘째,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지키라
셋째,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지키라
넷째,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려라.
다섯째, 누구도 예외 없이 다 같이 지켜라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여섯째,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지켜라
일곱째,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겁게 지켜라
여덟 번째,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하라.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뭘까.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든 첫 소산을 감사하는 맥추절이든 아니면 초막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모든 절기를 지킬 수 있는 공급의 바탕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2019년 맥추 감사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올 2020년 칠월 첫 주일인 오늘은 내가 예배당에 찾아 나와 택한 곳에서 예배드릴 형편이 못 된다면 지난해의 맥추절이 얼마나 그립겠나. 지난해 맥추절에는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던 가족이 지금 내 곁에 없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하겠나.
절기에 대하여 교훈하는 신명기 16장 16-17절에는,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고 하였다.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셨다.
모든 남자가 지켜라
일 년에 세 번 정해진 절기를 반드시 지켜라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지켜라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말고 준비된 절기 예물을 드려라
각 사람이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려라”
오늘 신명기의 말씀과 함께 읽은 본문은 다윗의 시편 145편이다. 8-13절을 읽었다. 이 분량은 금번 헐몬산 새벽 기도회 마지막 날인 11일 토요일 새벽 본문 분량 중의 일부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감사의 사람이다.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살았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시편으로 기록하였다. 어려서부터 베들레헴 들판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면서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경배하는 생활을 하였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세 형들을 면회가야 할 날이 다가왔다. 그 출발하던 날 아침에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종들에게 아버지의 양 떼를 잘 돌볼 것을 부탁하고 전쟁의 일선인 엘라 골짜기까지 찾아갔다. 그 날이 다윗의 생애에 운명의 날이 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도 전쟁에 능한 장수였다. 이스라엘 나라에 전쟁 잘하는 용맹한 군사들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는 없었다.
하나님은 아주 어려서부터 믿음으로 성장해 가던 베들레헴 출신의 어린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해결하게 하셨다. 평소에 아버지 이새의 양과 염소를 지키기 위해서 실력을 키워 왔던 물맷돌 던지는 실력을 십분 발휘한 것이다. 어쩌면 물맷돌을 잘 던지는 실력보다는 “너는 칼과 창으로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다윗의 신앙 고백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 것이 분명하다.
150편의 시편 중에서 다윗이 쓴 시편이 73편 분량이다. 그 중에 맨 마지막 감사 예배시가 145편이다. 다윗은 무엇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나.
하나님의 성품을 찬송하라.
감사 예배시의 특징 중의 하나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윗은 시편 145편에서 하나님의 보편적인 성품에 대하여 찬송하고 감사하며 예배하고 있다.
8절에 보면,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여호와는 인자하심이 크시다
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며 예배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다윗의 고백이 이의를 제기할 자가 있는가. 우리가 알고 믿는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얼마나 긍휼이 많으신가. 얼마나 오래도록 길이 길이 참아 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나. 우리가 범죄할 때 그 때 그 때마다 우리를 심판하셨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여호와는 인자하심이 크시도다”라는 말은 “사랑이 풍성하시다”는 뜻이다. 맞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 가운데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나고, 아시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내 선택이 아니다. 우리 중에는 북한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가 피난 한 분들도 있다. 대개의 많은 이들은 남한에서 태어났다. 어떤 이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살기도 한다.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나고 누구는 부잣집에 외아들 혹은 외동딸로 태어나기도 한다. 누구는 건강하고 총명하게 태어나고 누구는 병약하고 부족한 상태로 태어나기도 한다. 누구는 화목한 가정에 태어나기도 하고 누구는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누구는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누구는 신앙 생활한다고 핍박하는 핍박을 견뎌 내야만 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나서 자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이 나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므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겨 주심이요 풍성하신 사랑의 공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쌍둥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일곱 쌍둥이를 낳을 확률이란 매우 희박하다. 그런데 1997년 11월 19일에 미국에서 일곱쌍둥이가 태어났다. 남자아이 네 명과 여자아이 세 명이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9주나 앞서서 제왕절개로 낳았다. 올해 저들 일곱 명의 쌍둥이는 모두 건강하게 장성해서 23살이 되었다. 엄마 아빠는 미국 아이오와주에 사는 케니와 바비였다. 첫째 딸의 출산에 이미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그들 부부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선택적 유산을 권유했으나 저들 부부는 유산을 하지 않고 아기를 모두 낳았다. 이들의 사연이 알려지며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직접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미 전국의 뉴스를 접한 시민들이 일곱 쌍둥이를 양육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저들 부부가 아기를 키우는데 어마 어마한 양육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엄청난 액수의 자발적인 후원 활동이 이어졌다. 부부는 154평에 달하는 집과 대형 트럭도 선물 받았다. 1년 동안 열 식구가 먹을 수 있는 양의 치즈와 일곱 명의 아기들이 2년간 쓸 수 있는 기저귀를 선물 받았다. 그 외에 먹고 먹이고 마시고 입고 쓸 수 있는 식료품과 생필품이 쏟아져 들어 왔다. 저들 일곱 쌍둥이가 태어난 아이오와 주립 대학은 저들 일곱 남매가 입학 조건만 충족되면 사년 간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일이 지난해 영국에서 또 있었다. 2019년 2월 15일 영국에서는 이라크 국적의 25살인 산모가 일곱 쌍둥이를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다. 산모와 여섯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인 저들 일곱 쌍둥이 아기들 모두 건강한 상태로 일 년을 지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각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십자가 은총을 입는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하심이요 풍성한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증거다.
코로나19의 위협 속에서도 올 2020년 맥추절을 맞아 맥추 감사 예배를 드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기심이요 풍성하신 사랑임을 깨달아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물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찬양하라.
하나님은 인간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손수 친히 창조하신 천하 만물을 모두 다 골고루 사랑하신다. 9절에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라고 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면 “The LORD is good to all”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땅에서 기어 다니는 미물이나 뛰어 다니는 동물들이나 강과 바다 속의 각종 물고기들도 사랑하신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는 정상이 아닐 뿐이지 모든 사람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선대하신다. 좋게 대하신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의 밭에 햇빛과 비를 골고루 내리신다. 이걸 어려운 말 로 ‘일반 은총’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맥추절을 지키든지 못지키든지 이 땅에 천하 만민에게 골고루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대하시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김씨네 보리 밭에만 풍년을 주시고 우상에서 절하고 돼지 머리 앞에 절하고 부적 붙이고 살고 고사 지내고 무당 찾아 다니는 집의 보리 밭이라고 해서 깡그리 메뚜기 떼가 달려 들어 쑥대밭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김씨네 보리 밭이나 이씨네 밀밭이나 골고루 해와 비를 주셔서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특별히 인생들을 선대하시고 좋게 대하신다. 모든 인생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은 우상을 숭배하거나 자기 탐심과 탐욕에 빠져 살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10절 말씀처럼 ‘주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할 줄 알아야 한다.”
깨닫고 보면 내 지혜, 내 경험, 내 노력보다 천배 만배 하나님이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가족과 나의 범사에 내려 주시는 은혜와 복이 큰데 우상에게 절하면 되겠나. 모든 것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신데 물질 앞에 절하면 되겠나.
시편 145편은 21절 분량이다. 그 중에서 앞에 읽지 못한 1-7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내려 주신 은혜에 대한 다윗의 감사 예배의 고백이 담겨 있다. 맞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시다.
예레미야가 예레미야 33장 2절에서 고백한 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시다. 그 하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나에게 보이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렘33:3)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다. 왜 이 우기철에 우리가 헐몬산 새벽 기도회로 모이나. 왜 기도하나. 왜 새벽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고 밤중에도 기도하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조선 시대에는 신문고(申聞鼓)라는 제도가 있었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 때의 일이다. 1401년 7월에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등문고’라고 시작해서 나중에는 ‘신문고’라고 이름 붙인 제도이다. 왕이 사는 궁궐 앞에 매달아 둔 큰 북을 치면 그 하소연을 들어 주던 제도이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접 알려서 해결 받게 한 제도이다. 물론 운영이 엄격해서 소수 피 지배 계층의 서민들이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적지 않았다. 이 제도는 세종 때를 거쳐서 이름이 ‘승문고’라고 바뀌었을 뿐 조선 말까지 우여 곡절을 거치면서 제도는 계속 이어졌다.
요즘은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국민 청원 게시판’이란 것이 있다. 30일 이내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하고 추천하면 정부가 나서서 대답하겠다는 제도이다.
예수께서도 그런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무리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억울한 일을 가지고 날마다 그 가까이에 찾아가서 하소연하는 불쌍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간청하는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고 교훈해 주셨다.
벤살렘 교회 때의 일이다. 토요일마다 한글학교 운영을 했다. 주일 아침인데 담임 목사실에 초등학교 2-3학년 한대연이란 이름의 남자애가 노크하고 찾아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어제 한글학교 후에 가방을 잃어 버렸는데 담임 목사님이 찾아 주셔야 겠습니다.”하고 맞은편 소파에 등을 푹신하게 기대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요구하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말이 짧으니까 한글과 영어를 절반씩 섞어 가면서 담임 목사에게 자기가 방문한 목적을 차근 차근 설명하였다. 20년도 훨씬 더 된 오래 전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새롭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 이 일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서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수 소문 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광고를 해서라도 해결되도록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9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대하시고 모든 지으신 것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으니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체험하여 깨닫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나날이 되길 바란다. 10절에 보니까 그래서 ‘주께 감사’하고 그래서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주의 업적을 알리라.
하나님을 높이고 주의 이름을 송축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계속하여 할 일이 무엇일까. 11절의 ‘그들’이란 주를 믿는 성도들을 말한다. 12절의 ‘인생들’은 주를 모르는 세상 백성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를 먼저 믿게 된 택함 받은 성도들은 계속하여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여야 한다. 주의 업적을 계속하여 누군가에게 알려야 한다.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여야만 한다. 10-12절까지의 이러한 다윗의 강조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은 성도들이 천한 만국의 땅 끝까지 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한다고 분부하셨다. 그것이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아닌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그것이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선교명령이 아닌가.“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코로나 19의 바이러스 위협 앞에서도 새벽마다 기도하고, 예배의 열심을 갖고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계속 다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의 성도들은 주의 하신 업적을 계속하여 주변에 말하고 또 말해야 한다. 11-12절에 ‘주의 업적’(業績)이란 표현이 두 번 반복해서 나온다. 또 ‘주의 나라’라는 표현이 11-13절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온다. 무슨 말인가. 주의 성도들의 사명은 영원하고 위엄이 있는 주의 나라의 영광을 주의 업적으로 전파하고 또 전파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말하고 또 말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이다. 11-12절에 “말하고, 이르고, 알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누가 그렇게 해야 하나. 전도는 그들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이르고, 알게 하여서” 계속 복음이 전파되게 해야하는 것이다.
다윗에게는 그런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13절에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이 믿고 섬기던 그 같은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절기마다 감사하고 찬송하며 예배하되 자자손손 그런 간증과 증거가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