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아름다운 것(시133:1-3) 2020. 6. 28
시편 133편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다윗의 고백인 감사 예배시의 한 편이다. 우리는 열 한번 째 헐몬산 새벽 기도회를 맞이한다. 최근 매일 묵상 분량 중에 마침 오늘 분량으로 시편 133편을 묵상할 차례를 맞았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를 되찾아 오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은 뽑은 무리 3만명을 앞장 세웠다. 그 외에도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법궤를 되 찾아 오려는 시도를 하였다.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아비나답의 집과 오벳에돔의 집을 거쳐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 들였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나서서 잣나무로 만든 여러 악기를 연주하였다.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가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며 나팔도 불었다. 다윗은 에봇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이 시편은 20여 년 동안 블레셋에 빼앗긴 채로 기랏여아림에 방치되었던 성막의 법궤를 되찾아 온 후에 예루살렘 성인 다윗성에서 예배의 회복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 감사의 고백이다.
“보라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
이를 새번역 성경은,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공동번역에는,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이라고 번역하였다.
영어 KJV성경에 보니까
“Behold, how good and how pleasant it is for brethren to dwell together in unity.”라고 하였다.
감탄의 뜻으로 ‘how’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라고 하였다.
무엇이 그렇게 선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좋다는 말인가.
형제의 연합(聯合).
형제의 연합이라고 했는데 이는 형제자매 모두의 연합을 말한다. 요즘 우리가 접하는 <생명의 삶> 영어 성경 번역에 보니까 “God’s people”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지금 다윗은 빼앗겼던 법궤를 되찾아 온 감격과 기쁨을 온 백성들과 더불어 다 같이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세상 사람들은 서로 다 끼리 끼리 즐거워하고 끼리 끼리 좋아 하며 살아간다. “고향이 어디냐, 무슨 성, 무슨 파, 누구의 후손이냐, 어느 학교 나왔느냐, 몇 회 졸업생이냐, 학번이 뭐냐, 해병대 같으면 몇 기 생이냐”를 물으며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서로의 연합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연합은 그런 것을 뛰어넘고 초월하여야 한다.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하나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서로 간에 형제 자매의 사랑을 갖고 좋아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다윗이 여기서 고백하는 “형제의 연합”이란 되찾아 온 법궤를 중심으로 온 민족,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감격하며 예배드리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어느날 꿈처럼 찾아온 1945년 8월 15일,‘광복의 날’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런 감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날, 그 순간 만큼은 그랬다. 그러나 8. 15 광복절을 맞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좌우로 나누이고 남북으로 찢겨진 채 사분 오열 되어 왔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처럼 잘살게 된 것이 기적일뿐이다. 내부적으로는 여와 야가 나누이고,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가 나누이고 경상과 호남이 나누이고 남과 북이 나누이고,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누인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성도는 달라야 하고 교회는 달라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간에 거룩한 연합과 동거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형제자매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합하여 살아가기를 원하고 기대하신다. 형제의 연합에는 벽이 없어야 하고 담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해서 멀어진 관계를 하나로 묶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둘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의 연합(聯合)이란 형제의 화목(和睦)을 말씀한다.
요즘 전직 대통령의 두 아들 간에 세상 떠난 아버지의 재산 싸움하는 뉴스가 전해진다. 국가적으로 대표적인 대기업의 두 형제가 서로 아버지의 재산권을 갖고 법정 다툼을 벌인다. 세상 떠난 아버지의 금고에서 나왔다는 살아생전 써 놓은 아버지의 유서가 적법하냐 아니냐를 가지고 법정 공방을 벌인다.
이런 모습은 형제의 연합하는 모습이 아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의 연합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에 대하여 이 아름답고 은혜롭고 오묘한 진리를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현대인의 번역>으로 읽겠다.
“13.그러나 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와졌습니다.
14.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놓은 담을 헐어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15.그들을 원수로 만들었던 계명의 율법을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폐지하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화목하게 하고
16.또 십자가로 그들의 적개심을 죽이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17.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이방인이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18.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9.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성도들과 똑같은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20.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친히 그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21.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점점 거룩한 성전이 되어가고
22.여러분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계실 집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엡2:13-22)
그렇지 않나. 형제의 연합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대로 결혼이란 것이 결혼식이 화려하지 결혼 생활을 선하고 아름답게 하려면 날마다, 순간마다의 결혼 생활의 우여곡절을 조화롭게 잘 소화해 나가야 행복한 것 아닌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다. 세례를 받는다. 직분을 받는다. 교회의 이곳저곳에서 봉사도 하고 사귐도 갖는다. 다 좋지만 그 저변에는 마음으로 연합한 형제 자매의 사랑과 화목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서로 시기한다든지, 서로 경쟁한다든지, 서로 비교한다든지, 서로 잘 난척한다든지, 서로 무시한다든지, 서로 비판하고 판단한다든지, 서로 못마땅해 한다든지, 서로 경쟁하면 그건 형제자매가 연합하는 모습이 아니다.
행복한 가정은 부모자녀 형제자매 간에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화목하고, 무조건 받아 준다. 무조건 격려하고, 무조건 받아주고, 무조건 인정하고, 무조건 하나 되어 살아갈 때에 그 행복과 화목이 유지되고 지속되는 것이다.
사탄 원수 마귀는 자꾸만 기회를 틈타서 서로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잘잘못을 꾸짖어서 서로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소원해지고 나뉘고 금이 가고 깨어지는 관계가 되도록 방해하고 훼방한다. 에덴동산에 뱀이 하와와 아담의 부부의 연합을 그렇게 깨트렸다. 가인의 마음에 들어간 악한 생각은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였다.
이처럼 사탄 마귀는 자꾸만 사람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어서 형제의 연합에 금이 가도록 한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교훈해 주셨다.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생활하는 이와 같은 비대면의 시대에 마음만은 점점 더 가까워져서 형제의 연합,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 성도의 거룩한 연합을 이루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형제의 동거(同居).
형제의 연합이란 것이 어디 하룻 밤 가서 함께 캠핑을 같이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MT 며칠 다녀 온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형제자매의 진정한 연합은 동거에 있다. 연합은 영어로‘unity’라고 했고 동거는 ‘live together’라고 했다. 날마다 매순간마다 서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동거하는 것이다. 결혼 서약대로 하면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이 동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형제자매의 연합과 동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동거라는 것은 공간적이고 육체적인 연합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부르심을 따라서 사명을 가지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거룩한 연합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동거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12:50)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나.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누가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인가.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형제자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교훈이 아닌가.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에 소개된 양과 염소의 비유로 교훈하신 깨달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형제의 동거함이라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뜻이 하나로 연합한 지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몸이란 것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사지백체 오장육부가 하나다. 빼마디로부터 세포와 신경 조직 하나 하나가 건강하게 연합한 상태로서의 하나이다. 그것이 동거의 상태다. 주님 안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형제의 동거함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거룩한 연합과 동거에 대하여 이렇게 교훈하였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3-6)
자주 부르는 찬송은 아니지만 220장 찬송 <사랑하는 주님 앞에>라는 찬송의 가사를 주목해 보라. 이것이야말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그런 가정, 그런 가족으로 살아가자.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하심과 인도하심 안에서 그런 성도의 연합, 그런 성도의 모습으로 서로를 섬기고 돌보며 베풀고 나누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영생(永生)의 복(福).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두 가지 장면으로 묘사하였다. 하나는 제사장인 아론이 거룩한 직임을 구별 받던 장면으로 설명하고 싶어 하였다. 상상하여 보라. 제사장을 구별하기 위한 예식의 현장에서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흐르고 옷깃까지 타고 흘러 내렸다. 왜 제사장 아론을 예로 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의 형 아론을 제사장으로 구별하셨다. 아론의 아들들인 조카들도 아론의 대를 이어서 이 거룩한 직임을 계승하게 하셨다. 그 구별하는 시작이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다.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식이다.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내리듯이 여호와의 복이 임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는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를 말한다. 메시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를 구별할 때에 기름을 붓는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머리에 부은 기름이 수염과 옷깃을 따라서 풍성하게 흘러내리듯이 하나님이 부어 주신 복이 흘러 내려 임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출애굽기 29장 7절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구별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게 하셨다. 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장면인가.
또한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윗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라고 노래하였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북동쪽에 위치한 2814m의 높은 산이다. 2744m인 백두산 보다 조금 더 높다. 산의 길이가 30km에 이른다. 연중 강우량이 1500mm이다.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덮혀 있다. 그 눈이 봄과 여름 내내 서서히 녹아 스며 흘러 내려 엄청난 양의 물줄기를 이룬다. 산 중턱과 산 아래에는 아름다움 꽃이 피고 폭포가 흐르고 계곡 물이 넘쳐 난다. 그 물줄기에서 갈릴리 호수가 형성되고 요단 강을 따라서 사해로 흘러 내린다. 일교차로 인한 이슬의 량은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새벽마다 이슬이 비처럼 맺힌다. 그 이슬의 량으로 시온의 산들에 풀과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양과 염소와 소와 나귀가 그 풀을 뜯고 살아가며 새끼를 낳아 번식한다. 그러한 헐몬 산의 이슬의 힘을 잘 아는 다윗이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아론의 머리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과 같고, 헐몬의 이슬과 같다는 묘사가 무엇인가. ‘같고....같도다’라는 묘사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며 연합하고 동거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연합과 거룩한 동거의 모습을 달리 더 잘 묘사로 설명할 길이 없으니 이렇게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이슬의 힘이다. 다윗이 다른 시편인 110편 3절에 보면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인 형제자매들이 연합하고 동거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도 제사장 아론의 머리에서부터 수염과 옷깃을 타고 내려 흐르는 보배로운 기름과도 같은 것이다.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낮은 산들 위에 골고루 풍성하게 내림과도 같은 것이다. 다윗은 그러한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모습을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는 서로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살아가는 여건이 다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주의 권능의 날에 부르심을 받은 새벽 이슬 같은 영원한 주의 청년들이다.”
우리 서로 곁에 멀리 떨어져 앉은 형제자매들에게 큰 소리로 문안하자.
“우리 모두는 새벽 이슬과 같은 주의 청년들입니다.”
요즘 몇 주 사이에 교회 어른 권사님 세 분이 넘어져서 갈비뼈가 금이 가고 무릎에 깁스를 하였다. 우리는 때로 넘어질지라도 새벽 이슬과 같은 청년들이다. 다칠지라도 새벽 이슬과 같은 주의 청년들이다. 여호수아 14장에 보면 갈렙이 헤브론을 점령하려 할 때의 나이가 85세였다. 갈렙은 여호수와 함께 출애굽 세대 중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여호수아도 위대하지만 갈렙도 대단하다. 우리는 나이로 세상을 사는 것 아니다. 이삼십대 청년이라도 청년의 의지를 잃어 버리고 살아가면 노인보다 약하다. 그러나 연세가 아무리 많더라고 하나님 안에서 헐몬산의 새벽 이슬과 같은 싱싱하고 풋풋한 정열을 갖고 살아가면 그가 청년이다. 청년의 기상과 기백을 갖고 살아가자.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새벽 이슬 같은 청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것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맞다. 호세아 14장 5-7절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가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날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탄생한 교회를 말씀하는 것이다. 코로나 19의 위협 가운데 온 세상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이 거룩한 부르심의 공동체는 복된 것이다. 영원한 것이다.
대전감리교신학교의 교수요 학장을 지낸 감리교 목사 이호운 목사는 그의 436장 찬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4절에 보면,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 따라 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이라고 찬송하였다.
이런 은혜가 강같이 흐르고 헐몬산의 새벽 이슬 같이 임하는 영원한 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