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 땅에 머물러 산다면(렘42:1-12) 2020. 10. 4. 세계성찬주일
나라가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어떤 판단이나 무슨 결정을 위해서 그리 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난세를 만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남 유다는 예루살렘이 일년 반 동안 토성을 쌓고 덤벼드는 바벨론의 군대 앞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망했다. 남 유다의 마지막 왕인 제 20대 왕 시드기야는 야반도주했다. 한 밤중에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 여리고 평지까지 도망하다가 그를 추격하는 갈대아 군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예레미야 52장 7절에 보면 ‘도망’가는 왕 시드기야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왕이란 신분이 빵빠레가 울리는 가운데 백성들의 주목을 받고 환영을 받고 박수를 받고 허리 굽힌 인사를 받으며 출입해야 폼이 날텐데 그렇지 못했다. 왕이 밤중에 왕의 동산 곁문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있던 신흥 국가이다. 주전 625-539년까지 86년을 이어가다 바사 즉 페르시아에 점령당했다.
남 유다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다. 남 유다가 망한 것은 성전이 없고, 제사장이 없고, 제사가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다. 왕과 방백과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성전 안에서 우상을 섬겼다. 이름은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세상 권력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발람과 같은 타락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거짓 선지자들이 판치고 있었다.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며 예레미야를 통해서 줄곧 말씀하시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이 호수에서 물을 마시다가 자기의 크고 멋진 뿔에 도취했다. 그런데 물에 비친 네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못마땅해 보였다. “이왕 만들어 주시려면 내 이 네 다리도 사자 다리처럼 굵고 튼튼하게 좀 만들지 이게 뭐람”하고 조물주를 탓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만치에서 사자가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혼비 백산해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망치면서“야 이 가는 다리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사자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히 도망치며 숲을 지나다가 그 커다랗고 멋진 두 뿔이 그만 숲의 넝쿨에 뒤 엉키고 말았다. 넝쿨에 걸린 뿔을 뽑기 위해서 그 큰 뿔을 휘 젓다 보니 순식간에 사자가 달려 들어서 자기 목덜미를 물어 버렸다. 순간 피를 흘리고 죽어 가면서 사슴이 생각했다. “이 뿔이 나로 하여금 죽게 하는구나”
이것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얘기다. 사슴이 별것 아닌 것으로 못 마땅하게 여기던 가는 네 다리는 사슴으로 하여금 사자보다 더 빨리 도망치게 하였다. 그러나 사슴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가는 네 다리 때문이 아니라 뽐내고 자랑하던 그 크고 무거운 뿔 때문이었다.
세상이 태평하고 마음이 평안하면 그 누구이든 불안에 쫓길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세상이 뒤숭숭하고 내 마음에 불안이 엄습하면 교만하게 권세를 자랑하던 왕이라도 별수가 없다. 밤중에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 여리고 평지로 도망하던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군대에 붙잡히고 큰 불행을 겪으며 끌려 갈 때의 나이가 32살이었다. 시드기야 왕은 앞을 못보게 된 상태로 바벨론의 감옥에 지내다가 죽고 말았다. 참담한 비운의 역사를 말하는 장면이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41장의 내용을 이해해야만 상황 전개를 파악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왕과 방백과 유능한 젊은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몇 달이 지났다. 바베론은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워서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 당시에 바벨론의 침략을 두려워 하여 이미 애굽, 모압, 암몬 등지로 도피하거나 피신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들 중에 유다의 왕족 중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이란 자가 암몬 왕의 충동질을 받으며 등장하였다. 곁에 따르는 자 10명을 대동한 이스마엘은 총독 그다랴를 방문하여 함께 음식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이스마엘은 곁에 함께 했던 10명과 짜고 그 현장에서 그다랴를 칼로 쳐 죽였다. 순식간에 바벨론의 세웠던 유다 총독 그다랴가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스마엘은 총독 그다랴가 거주하던 미스바에서 그와 함께 하던 유다 사람들과 그 곳에 주둔하던 갈대아 군대를 만나는 대로 해치웠다. 이틀이 지나도록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진 사실조차 소문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때에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던 80명의 순례자들이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 등지에서 모여 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터에 가서 소제물과 유향을 드려 제사하려고 모여 들었다. 이스마엘은 울면서 그들 곁에 다가가서 “총독 그디랴에게로 가자”고 말하며 그들에게 문안하였다. 이미 총독 그다랴를 죽인 이후인데도 말이다. 그들 80명이 예루살렘 성의 중앙 쯤 이르자 이스마엘은 자기 곁의 따라는 자들을 동원해서 그 중의 70명을 죽여서 가까운 구덩이에 암매장하였다. 그 구덩이는 남 유다의 제 3대 아사 왕이 과거에 북 이스라엘의 제 3대 바아사 왕을 두려워하며 피신처로 파 두었던 구덩이였다. 그 중의 10명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어 두었으니 제발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스마엘은 그들의 간청하는 말을 듣고 그 뇌물을 챙기는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 주었다. 이스마엘은 미스바를 중심으로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왕의 딸들인 공주들과 남아 있던 백성들을 이끌고 암몬 자손의 땅으로 가서 친 암몬 정책을 펼치며 지내려 하던 자였다.
그 즈음에 등장한 또 한 사람의 새 인물이 요하난이다. 요하난의 이스마엘에 의해 죽임 동한 총독 그다랴의 곁에서 활동하던 실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요하난은 주변에 남아 있던 군 지휘관들을 총동원하였다. 그리고 기브온의 큰 우물 가에서 이스마엘의 추종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요하난의 등장은 이스마엘에 의해서 불안하고 초조하게 사로잡혀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요하난에게로 몰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사태가 쉽지 않게 되자 이스마엘은 자기 곁의 추종자 8명만 데리고 급하게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의 땅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42장 1절에 등장하는 인물 ‘요하난’이 누군지를 알아야 말씀이 깨달아지겠기에 이렇게 긴 설명을 한 것이다. 요하난은 죽임당한 총독 그다랴의 곁에 있던 모든 군대의 지휘관들을 총집결시켰다. 남은 백성들의 크고 작은 자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아왔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탄원하며 중보 기도를 요청하였다. 그 기도 요청의 내용은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의 갈 길과 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요하난의 기도 요청을 수락하고 기도하리라고 약속하였다. 5-6절에 보면 예레미야를 통해 주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열흘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 10절부터 마지막 절인 22절까지의 내용은 열흘 간 기도하던 예레미야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다. 그 때는 이미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 중의 적지 않은 무리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이다.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 중에는 바벨론의 침략과 지배 정책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이 1절에 등장하는 ‘요하난’이란 인물이다.
사실 저들은 예레미야에게 기도 요청을 하긴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미 애굽행을 결심한 후였다. 그런 내용을 모르는 바 아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한 후에 자신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에게 전달하였다. 그 중에 10-12절까지의 내용은 앞으로 유다 땅에 머물러서 살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시다. 반면에 13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만약에 이 땅에 머물러 살지 않고 애굽으로 피신해서 살 궁리를 하게 된다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만일 이 땅에 머물러 산다면’이라고 정한 것이다. 바벨론이 쳐들어 와서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망했다.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과 그냥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도 다시 또 두 부류로 나누어 진다. 그냥 유다 땅에 남아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애굽이나 암몬 사람의 땅으로 피신해서 살아갈 것이냐를 고민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갈등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세우고 헐지 아니하리라.
우리말 성경이 원어 이상으로 실감나게 번역되어 있다. 이것이 한글의 맛이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앉아 산다면”(렘42:10)이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바벨론 점령 이후에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더 이상 어디 주변 나라로 피신하거나 도망가서 살 생각을 하지 말고 유다 땅에 눌러 앉아 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어떤 복을 주신다고 하셨나. 그 첫째가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라는 약속의 말씀이시다. 그렇지 않나. 인생이란 것이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잘 되보려고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되게 해 주시지 않으시면 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지금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다의 방백과 모든 백성들과 다윗 왕의 후손인 역대 왕들이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면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받으며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 왕의 직계손인 남 유다의 왕들이 앞장서서 우상을 숭배하였다. 저들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바벨론 침략을 받고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신다. 끌려간 바벨론 땅이냐 아니면 남아 있는 유다 땅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의 회복인 것이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바벨론이냐 애굽이냐를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유다 땅에 죽치고 눌러 앉아서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을 회복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고 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내 신앙의 태도이다. 한국에 사느냐 다른 나라에 이민 가서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자 하는 나의 믿음의 태도이다.
지금 하나님은 그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원래 저들이 남아 있는 이 유다 땅이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해서 주신 땅이 아닌가. 그러므로 어디에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믿음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나 자신, 내 가족, 우리 교회, 나라, 민족 그 무엇이든 복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른 믿음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면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자녀들을 든든하게 세우시려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일부러 헐어 버리시려는 이상한 아버지가 아니시다. 세상에는 그런 이상하고 패역한 아버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아들딸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지난 주 중에 탈북민 제 1호 감리교 목사인 새터교회 강철호 목사가 보내온 영상 설교를 들었다. 최근에 남북 통일을 위한 금식 성회에서 그가 전한 말씀이었다. 그는 간증하였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북한에서 살 때에 이웃 집에 불이 났다. 집 밖에 있던 아버지는 집 안에 아들이 잠 자고 있는 것을 알고 불길을 헤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품에 안고 나온 것은 잠든 아들이 아니라 벽에 걸려 있던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였다. 이 사실이 당에 보고되면서 그 이상한 아버지는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불길 속에 아들 구하러 들어간 아버지가 아들 대신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안고 집 밖으로 나온 것이 충성되고 영웅 칭호 받을 일이라고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고 기렸다고 한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나는 요즘 무슨 생각에 매여 사는가.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흉년을 피하여 아내 사라와 함께 애굽에 내려 갔다가 큰 낭패를 겪었다. 아내를 애굽 왕에게 빼앗길 뻔하였다. 사사 시대 말기에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다. 그 마을의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에 가서 살려다가 거기서 자신도 죽고 두 아들 다 죽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요나서의 주인공 선지자 요나는“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다. 요나는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죽어 마땅한 그를 살린 것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신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땅 끝에도 계시고 바다 속 깊은 곳에도 계신다.
혹시 바벨론에 끌려간 왕족이나 이웃이 여기 페허가 된 유다 땅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가. 여기서 이러고 사느니 기회를 봐서 애굽으로 도망가서 살아야겠다고 궁리하지는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이 땅에 눌러 앉아 살아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할 것이다.”
2,600년 전 유다 땅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 하신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날 나에게 적용되고 깨달아지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심고 뽑지 아니하리라.
사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별의 별 고민과 갈등과 번민 가운데 살아간다. 이러 저러한 판단과 결정에 대하여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한다. 어떤 경우에는 지난 날의 결정에 대하여 과연 그 때의 그 판단과 결정이 옳았던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며 괴로워한다. 지금 일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에는 지난 날의 판단과 결정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가에 대하여 점점 더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 결정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혹은 환경적으로 떠밀린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심지어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옳은 판단인가”하고 회의에 빠지기조차 한다.
산다는 것이 걱정, 근심, 염려, 불안, 두려움, 초조, 고민, 고통, 고난이 없이 늘 천국 생활만 하는 이가 과연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지금 바벨론에 멸망 당한 땅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희망과 격려와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세우고 헐지 않겠다. 심고 뽑지 않겠다”는 말씀은 사실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이시다. “지금 불안하고, 지금 불확실하고, 지금 염려로 가득하고, 지금 뭐 신통하게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지금 답답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절대 자신이나 환경을 절망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면 그 어느 누구도 헐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심으시면 그 어느 누구도 뽑아 낼자기 없기 때문이다. 맞다. 하나님이 보우하셔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사48:17-19)
이 말씀 앞 뒤 부분에 나온 내용이 바벨론에 관한 내용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로 지내야 했는가. 이 말씀 끝에 보면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48:22)고 하셨다. 그런데 이사야 48장 18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주의하면 평강이 강과 같게 하시고 공의가 바다 물결 같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약속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평강과 공의가 메말라 버렸노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내게 강같은 평화, 내게 바다 같은 사랑, 내게 샘 솟는 기쁨이 넘치네”라고 찬송하기 위해서는 세우고 헐지 않으시며 심고 뽑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재난 대신에 함께 있어 구원하리라.
11-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얼마나 섬세하게 돌보시는가를 알 수 있다.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내가 너희를 바베론 왕의 손에서 건지겠다.
그러하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겠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도 너희를 불쌍히 여기게 해 주겠다.
예레미야 41장 17절에 보면 이미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애굽으로 피신하려고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게롯김함’이란 곳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냥 이 땅에 눌러 앉아 살아라.
내가 너희를 세우고 심고 함께 하여 반드시 구원해 주겠다.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불안해 하고 불확실해 하고 답답해 하며 힘든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 42장의 이 말씀이 격려와 소망과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 안에 승리하는 10월과 앞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