使命者의 가는 길(렘37:11-21) 2020. 9. 27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323장 찬송인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이 찬송을 요즘 신학생들은 잘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큰 교회 도시 교회 강남에 있는 교회 안정된 교회에 가서 사역하려고 한다.
교인들도 그렇다. 천막 교회에 가마니 깔고 철야 기도하던 시절은 옛날 이야기이다. 개척교회, 상가 지하실교회, 허름한 교회에 찾아가는 교인은 99% 없다. 예배당 잘 지어 놓고 빚 없고 내가 사역하지 않아도 일꾼이 넘쳐나는 큰 교회에 다니길 원한다. 50명 오케스트라, 300명 성가대가 매 예배 시간마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예배하는 그런 교회에 가서 끼어 앉아 대교회 교인이란 대리 만족을 누리려고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사명자의 가는 길’이라고 정하였다. 사명자의 가는 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부르심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길이 사명자의 가는 길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유다를 넘보는 주변 국가는 애굽과 바벨론이었다. 서로 밀고 당기는 국제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 한 동안 예루살렘 주변을 위협하던 두 이웃 나라의 군대가 모두 제 나라로 물러가고 잠시 소강상태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밖에 불안하리만큼의 고요가 찾아 왔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11절은 그런 국제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여기, 갈대아인이란 바벨론의 군대를 일컫는 말이다. 바로의 군대란 애굽의 군대를 말한다. 이처럼 두 나라의 군사적 긴장 관계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의 기운이 잠시 멈추고 소강 상태에 있던 때를 틈타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향인 아나돗을 방문하려고 하였다. 아나놋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예레미야 1장의 시작에 보면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파의 땅 아나놋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힐기야는 제사장 가문이었으나 어떤 사연으로 밀려나서 그 곳에서 살아가던 중에 아들 예레미야를 낳았다.
에레미야는 고향 아나돗에 가서 조상때부터 내려 오는 자신의 몫의 유산의 분깃을 받으려 하였다. 13절의 베냐민 문이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위치한 문의 이름이다.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가려면 그 문을 통과하여야 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베냐민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문지기의 두목인 이리야가 그를 바벨론의 첩자라고 혐의를 씌워서 체포하였다. 여기 이리야는 하나냐의 손자라고 했는데 그의 할아버지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저주를 받아 죽임 당한 거짓 선지자 하나냐를 말한다. 예레미야 28장에 나오는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러하다 보니 할아버지 하나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대하여 악한 감정을 갖고 있던 손자가 이리야였다. 이리야가 이때다 하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바벨론의 첩자 운운하며 누명을 씌워서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내용을 더 잘 이해하려면 어제 묵상 분량인 예레미야 37장을 보아야만 한다. 37장 2절은 시드기야 임금의 때의 영적 시대상을 고발한다. 왕과 신하와 유다의 온 백성들이 한결같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다. 심각하지 않나. 그런데도 시드기야 왕은 제사장 스바냐를 비롯한 몇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보내서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능청을 떠는 장면이 나온다. 한심하지 않나. 기도라는 것이 자신이 기도할 때에 주변 사람들의 중보 기도가 유효한 것이지 자신은 하나님을 믿기는 커녕 대적하는 마당에 누구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된 행위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그 당시 남 유다가 멸망 직전에 영적으로 얼마나 혼탁하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던가를 입증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고향 아나돗을 방문하려 하던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 앞에서 문지기 두목에 의해 체포되고 감금되고 말았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사명자의 가는 길’이라고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대 초반 청년의 때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평생을 달려 온 하나님의 사명의 사람 예레미야의 겪는 생의 과정이 그 걸음마다 우리에게 깨달음과 도전과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예레미야는 사명자의 한 사람이었다.
예레미야 1장 5절부터 몇 절 말씀을 성경을 찾아서 보자.
5절, 하나님은 그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아셨다.
하나님은 그가 모태에서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성별하셨다. 거룩한 자로 구별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7절에,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라는 말씀은“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말고 평생토록 내가 너로 하여금 하려는 말을 하며 살아라.”하는 뜻이다.
이것이 선지자로의 부르심이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라는 말씀은 선지자로 부르신 예레미야의 장래의 출입에 대하여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이시다.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라는 말씀은 전하기 어렵고 부담되고 힘든 예언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눈치 보지 말고 가감없이 전하라는 분부요 명령이시다.
8절을 함께 읽자.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사명자로 부르시며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떤 대적자를 만날지라도 상대방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9절 끝에 보시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말씀하셨다.“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이것이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 사명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 그러면 평생 여기까지 쓰임 받으며 달려온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을 방문하려다 겪은 장면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자.
옥에 갇힌 선지자.
모처럼 고향을 방문하려던 예레미야는 붙잡혀 매를 맞고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예레미야가 다시 또 옥에 갇히고 말았다.
평생을 살면서 자신이나 가족들 중에서 그 누군가가 그 어떤 사연으로든지 감옥에 갇힌다고 상상하여 보라. 감옥이란 곳이 오늘 날도 열악한데 2,600년 전의 감옥이란 곳이 오죽하였겠는가. 그 당시 사료에 보면 감옥은 대개 천연 동굴이거나 지하 깊숙하게 파 놓은 흙 구덩이었다. 마치 짐승처럼 취급 받는 곳이 그 당시의 감옥이었다.
갇힌다는 것은 자유를 구속 받는 것이다. 감옥에 갇히고 나면 더 이상 제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붙잡혀 지내야 한다. 창세기의 요셉이 그런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는 열 명의 배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미움을 받고 옷이 벗겨진 채로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에굽에 팔려가서 노예 시장에 넘겨졌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11년을 노예로 갇혀 지냈다. 애굽 땅이 요셉에게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아브라함의 증손자가 11년을 그렇게 지냈다.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지내야 하는 생지옥이었다. 자유가 없는 노예의 몸이었다. 요셉은 성실하게 종살이해서 주인의 인정을 받고 살림살이를 총괄하긴 했지만 종은 종이고 노예는 노예 아닌가. 그런 그의 삶을 버리지 않는 분이 계셨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 것이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표현이 몇차례 반복해서 나온다. 요셉이 종인데, 남의 나라 애굽에 팔려간 노예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늘 함께 하셨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의 별 일들을 다 겪게 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고백은 분명하여야 한다. “과거에 요셉과 동행하시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리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그렇게 성실하게 종노릇하던 요셉이 여주인의 성적 유혹을 받았다. 그 현장에서 뿌리치고 도망 나갔을 때에 보디발의 아내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데 창세기 39장에 보면 계속되는 위기와 어려움과 억울함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요셉과 함께 하셨다. 성경을 함께 찾아 보자.
2-3절, 21절, 23절을 보자.
그렇지 않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이다. 맞다. 하나님은 악인을 대적하시고 선인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면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가. 하나님의 현존을 인정하며 살아가려 하는 자가 선인이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자가 악인이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시대의 시대상이 그렇지 않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영이 떠났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번성하였다.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갔다. 외모에 끌려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고 근심하셨다.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다. 그들의 마음에 계획하는 모든 생각이 항상 악했다.
이런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마치도 지금 예레미야를 억울하게 누명 씌워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가두던 시대 장면과 무엇이 다른가.
14-15절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끌어다가 때린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께서 겪으신 고난이 생각난다. 예수께서도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 당하시던 그 날 새벽에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과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을 거쳐서 골고다에 이르시기까지 수 없이 채찍에 맞으셨다. 거반 죽은 자처럼 되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스스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실 수 있는 기운조차 없으셨다.
사명의 자의 가는 길이란 그런 것이다.
세례 요한도 옥에 갇혔었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풀려 나지 못하고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 사도도 옥에 갇히고 또 갇혔다. 사도 바울도 옥에 갇히고 또 갇혔다. 복음 전파의 이유 때문에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귀신 들려 점치고 있는 길거리의 여자 아이를 고쳐 주었다. 그 여종의 주인은 돈벌이를 잃게 되었다고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다. 바울과 실라는 몹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매를 맞아 몸이 아픈데도 감옥 안에서 밤새 찬송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차꼬가 풀리고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활짝 열렸다. 죄수들이 도망 간줄 알고 어둠 속에서 간수장이 자결하려했다. 그 때 바울과 실라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 도망 가지 않고 여기 있으니 자결하지 마시오.” 그들 앞에 엎드린 간수장에게 바울이 말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사명자의 가는 길은 이래야 한다. 교회 목회하다 보면 상식적이지 않은 일로 속이 상할 때가 있다. 억울할 때도 있고 답답하기 그지없을 때도 있다. 오해를 받을 때도 있고 누명을 쓸 때도 있다. 그러나 일일이 말대답을 다 해서 속 시원하게 변명할 수도 없을 때가 많다. 속으로 끙끙거리며 삭히며 기도만 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잘 참고 견디고 이기고 소화하며 기도하며 지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도 하고 지혜도 주신다. 내가 나서서 해명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봄 눈 녹이듯이 해결해 주시는 경우를 체험하게 된다.
지금 예레미야의 모처럼의 고향 방문 길이 막히고 말았다. 고향에 가서 자기 분깃의 유산을 받기는커녕 억울하게 바벨론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우리는 어떤가. 살아가며 겪는 별의 별 사고와 사건들 가운데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겸허하게 묻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범사가 되기를 축원한다.
왕의 질문.
예레미야가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뚜껑 덮힌 감옥에 갇혀 지내는 소문이 왕 시드기야에게까지 전해졌다. 옥에 갇힌 지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런데 왕이 사람을 보내서 예레미야를 감옥에서 이끌어 냈다. 그리고 왕궁으로 불러들여서 왕이 직접 예레미야에게 비밀스럽게 질문하는 일이 생겼다. 이 장면은 왕 시드기야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직접 처음으로 대하는 장면이다. 왕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물었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왕 시드기야도 알긴 알았다. 예레미야 선지자야 말로 그 당대에 유일한 하나님의 참 선지자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왕 시드기야 곁에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왕에게 제대로 국사를 보고하는 신하들이 없었다. 왕 시드기야에게 어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유다와 예루살렘 멸명에 대한 예언이 진실일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말이다.
왕 시드기야가 왕궁으로 예레미야를 불러 들여서 둘이 비밀스럽게 만난 그 때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바벨론의 군대가 뒤로 물러 난 때였다. 애굽 군대와 바벨론의 군대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예루살렘 함락을 위해서 으르렁 대던 때였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양쪽 군대가 서로 다 철수하고 예루살렘 성 밖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고요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숨이 막히는 긴장의 순간이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묘한 불안이 왕의 심장을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을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하던 때를 빌려 잠시 고향 아나돗을 방문하려던 예레미야가 서기관 요나단의 집 감옥에 갇혀 지내고 있던 때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다가 왕궁에서 비밀스럽게 만난 왕 시드기야가 질문한 질문이 이것이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이 질문은 최근에 여호와께서 너에게 하신 새로운 말씀들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예레미야가 왕 시드기야에 대답했다. “있습니다.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마치도 예수를 심문하던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향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하고 묻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날 새벽에 대제사장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뜰로 끌고 간 예수를 앞에 두고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온 공회원들과 더불어 의논하였다. 그 후에 예수를 결박해서 끌고 가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 그 때 빌리도가 예수께 한 첫 질문이 이것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맞다. 예수는 그 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서의 생을 살아 오신 것이다. 예수는 왕중 왕으로, 제사장 중 지극히 높은 대제사장으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여기까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달려 오셨다. 그리고 지금 그를 심문하고 사형 언도 내리려는 본디오 빌라도의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그 때 예수께서 짧게 대답하셨다. “네 말이 옳도다.”
그렇지 않나. 예레미야의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매 순간을 묵상하다 보면 마치도 그의 모습 속에서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사명자란 그를 보내신 분이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여야 한다. 제 멋대로 생각하고 제 멋대로 판단하고 제 멋대로 결정하고 제 멋대로 출입하고 제 멋대로 제 인생을 사는 자를 사명자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가. 우리는 각자 직업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살아온 이력도 다르고 역량도 다르고 사회적 지위나 역할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보라.
“나는 하나님 안에서 사명자의 삶을 살아 가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그런 것 같다.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잘 모르겠다.그런 거 관심 없다” 이렇게 불분명한 대답을 얼버무리고 지나가면 안된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른 아이 젊은이 노인 남자 여자 그 어떤 누구이든 상관 없이 마찬가지이다.
사명자 그러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가정 주부라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자신을 향하신 사명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해 보면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는 것 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야말로 아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증거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부, 직장, 사업, 가정, 결혼, 자녀 출산, 자녀 양육, 교회 생활, 교회 직분 등등 앞에 대답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냥 주일이니까 교회 오고 안 다녀가면 찜찜하니까 다녀가긴 다녀가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내가 알아서 세상 살아가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사명자라고 할 수는 절대 없다.
밤과 낮, 새벽과 저녁, 가정과 세상, 집과 직장, 가족과 세상에서 만나는 그많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과연 사명의 사람인가”라고 스스로 자문하는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한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등등의 12제자들이 어쩌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부르심이 있음으로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고 사명자가 된 것이다. 가롯 유다는 그 사명자로서의 부르심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스승을 팔아 버리고 배반하고 불행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서를 차근 차근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 본문이 오늘 나에게 무슨 말씀을 말씀하시는 지를 듣고 깨달아 알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 시드기야는 그렇지 못했다. 예레미야의 대답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앞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아드리고 회개할 기회를 갖질 못했다. 이것이 시드기야의 한계였다. 역대하는 36장이 끝이고 그 끝 내용의 주인공이 남 유다 마지막 20대 왕인 시드기야 이야기다.
역대하 36장 12절을 화면에서 읽자.
“그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역대하 36장 13절 끝에 보면 “그가.....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여기 시드기야 왕 대신에 나의 이름을 여기에 대입하였을 때 나의 이야기라고 상상하여 보라. 끔찍하지 않나.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 왜 겸손하게 살아야 하나. 시드기야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남 유다의 왕이었다. 다윗의 직계 후손이었다. 선한 왕 요시야의 막내 왕자였다.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환경, 그 좋은 신분을 타고 태어난 시드기야이지만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우상만 숭배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혔다.
역대하 36장 16절에 보니까 그는 회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불행과 화와 저주를 자초하였다.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욕하였다. 그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미치게 하였다. 예레미야는 52장이 끝이다. 그 52장에는 시드기야 왕의 참담한 마지막을 기록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람은 시작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이 중요하다. 마지막은 시작과 과정을 말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드기야는 21살에 왕이 되었다. 11년 되던 해에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하였다. 며칠 후면 한가위 명절인데 시드기야의 마지막 비참한 최후를 말로 옮기기에도 가슴이 먹먹해 진다. 개인적으로 예레미야 52장을 따로 펼쳐서 읽어 보라. 우리가 믿음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구절마다 교훈하는 말씀들로 가득차 있다.
가을이다. 가을은 봄과 여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하는 때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김현승(1913-1975) 시인의 시가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김현승 시인은 평양에서 1913년에 김창국 목사의 4남 2녀 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두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하고 후에 전남 광주 양림 교회에 부임해서 25년간 담임목사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 김창국 목사는 선교사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전주의 최초 5명의 세례교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현승은 1937년 24살 때에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숭실 중학교와 숭실 전문학교를 다닌 그는 양주동 박사에게 인정 받아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다. 나중에는 모교인 숭실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다. 그의 형 김현정은 평양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다. 동생 김현택은 전북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막내 동생 김현구는 전남여고 교장을 지냈다. 그는 광주 중앙교회의 원로 장로이다. 시인 김현승 교수는 1975년 62살에 서대문에서 주님께로 돌아갔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날도 여호와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명의 사람을 찾으신다. 김현승 님의 시 중에 <새벽>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나는 너를 보고 내일을 믿는다
더 힘있게 내일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힘있게 오늘과 싸운다
참된 선지자의 변증.
예레미야는 담대하고 침착하게 왕 시드기야 앞에서 할 말을 이어갔다. 그 동안 왕이 듣기 좋으라고 거짓 예언하던 거짓 선지자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 줄 것을 탄원한다. 20절에 보니까 ‘탄원’이라고 했다. 우리가 ‘탄원서’라는 것을 작성할 때가 있다. 지금 얼마나 착잡했으면 예레미야가 왕 시드기야에게 이런 탄원을 다 했을까.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라는 20절 끝의 표현을 보면 그 동안 며칠인지 모르나 서기관 요나단의 사설 감옥에 갇혀 지내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운 날들을 지냈기에 이렇게 탄원하고 있을까 짐작하게 된다. 요즘도 그러한데 그 당시의 사설 감옥이란 곳이 인권 사각 지대가 아니었겠나. 더군다나 베냐민 문의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할아버지에 대한 앙심을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예레미야를 함부로 대하였겠나를 상상하게 된다.
20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왕에게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다.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 보내지 마옵소서” 이는 마치도 “아버지여 이 쓴 잔을 내게서 옮져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던 예수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1년 반 동안 예루살렘 성은 외곽에 쌓은 바벨론 군대의 토성으로 인해서 보급로가 막혀 있었다. 성 안에는 극심한 기근이 계속되었다. 그런 당시에 잠시 소강 상태가 왔고 극심한 고통을 겪던 예레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왕궁 감옥에 머물게 되었다. 21절에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만든 떡이란 주먹 밥과 같은 서민들의 소박한 한끼 먹을 거리였다. 그런 먹을 양식에 매끼니마다 감옥 안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전해졌다. 비록 고난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왕의 손길에 의해서 예레미야의 목숨을 보존해 가고 계신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거기 21절에‘성중에 떡이 떨어질때까지’라는 표현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것은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어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게 된 예루살렘 성의 멸망 직전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요시야 왕 제 13년 즉 주전 627년에 하나님은 청년 예레미야를 사명의 사람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긴긴 세월이 지나 지금 늙고 허약해진 노 선지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궁의 감옥에 갇혀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끝까지 붙들고 계셨다. 그리고 늘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사명자의 사명이 다하기 까지 사명자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시려는 일을 부르신 사명자를 통해서 이루어 가신다. 사명자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