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5-14) 2021. 2. 7
31년 전인 1990년 1월, 낙동강변에서 데이트 하던 여성을 납치하고 살인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 받아 21년간 옥살이를 한 두 사람인 최인철, 장동익 씨가 31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며칠 전 뉴스다. 21년간 옥살이를 어떻게 하였을까. 31년간 그 억울함을 어떻게 극복하며 지냈을까. 법원은 경찰의 불법 체포와 구금,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인정 했다. 그러나 해당 경찰은 가혹 행위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당사자들만 억울한 세월 손에 가슴을 치며 버티며 살아 온 것이다. 국가가 경찰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손해 배상금으로 어찌 해결될 수 있을까.
사람은 외로운 존재다.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다.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장 선후배가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혼자다. 병원에 누워 있어 보면 그렇다. 요즘과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물론 곁에 의사, 간호사, 도우미가 들고 나는 출입이 있어도 그렇다. 업무적으로 내 곁에 다가오는 것과 그 누군가가 마음을 쏟고 관심과 애정이 담긴 마음과 손길로 다가오는 것과는 다르다.
서양 이야기이다. 깊은 산길을 걷던 나그네가 길을 잃었다. 밤이 깊어 오는데 불빛이 보였다. 찾아 가 보니 산속 외딴 오두막 집에 연세 많은 할머니가 혼자 사신다. “아니 이 깊은 외딴 산속의 오두막 집에서 혼자 사세요.”, “네, 혼자 삽니다”, “그러면 외로워서 어떻게 사세요.”, “아뇨, 외롭지 않습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전혀 외롭지 않습니다.”
왜 그런걸까. 누구는 많은 가족과 친척 속에 휩싸여 살아도 외롭고 누구는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은 이유가 뭘까. 요즘 우리나라는 혼자 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완룸 아파트, 혼밥집, 혼술집 등 혼자 뭔가를 해결하는 생활 문화가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결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젊은 남녀들도 혼자 벌어가며 사는 게 익숙하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 째로 제자들을 만나신 장면이 오늘 본문이다. 부활 예수를 만난 후에도 제자들 중에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이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그런데 새벽녘에 찾아 가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렸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았다. 예수께서 차려 주신 숯불을 지핀 해변에 둘러 앉아 예수께서 구워 주시는 생선과 떡을 먹었다. 그림과 같은 장면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랑의 질문을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는 멋쩍게 대답하였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그 동안 서먹하던 관계가 회복되는 날 새벽 장면이다. “그러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르라”고 사명을 새롭게 해 주셨다.
예수는 생명의 떡이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고 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더불어 먹는데 관심을 두셨다. 벳세다 광야에서 저녁나절에 배 고파 하는 무리들을 보셨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앞에 두고 감사 기도하신 후에 그 많은 무리들이 배 불리 먹게 하셨다. 오히려 부스러기 만도 12광주리가 남게 하셨다. 예수는 육신의 떡을 해결 하실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51)고 하셨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 가운데 둘러앉아 잡수셨다. 제자 마태를 부르셨을 때에도 그의 주변의 수 많은 세리들이 찾아 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같이 음식을 잡수셨다. 바리새인들은 못마땅해 하며 시비를 걸어 왔지만 예수는 언제나 누구하고나 스스럼 없이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고 울기를 같이하셨다.
사람은 서로 함께 만나서 먹고 마심으로 정이 든다. 예수께서는 30세까지 고향 나사렛에서 살았다.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일찍 돌아가셨다. 예수는 여러 동생들을 돌보며 남편 잃고 홀로 되신 어머니 마리아의 곁에서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목수 일로 집안을 꾸려 나갔다. 그 당시에는 목수라기보다는 석공에 가까웠다. 그 당시의 집들은 대개가 돌을 쌓아 지은 집이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가 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컸다. 커가면서는 일찍 돌아가신 마리아의 남편인 아버지 요셉의 빈 자리를 대신하며 어머니와 여러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우리가 아는 야고보서를 쓴 동생 야고보, 유다서를 쓴 동생 유다 말고도 여러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저들은 늘 좁은 집에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뒹굴며 같이 사는 한 가족이었다.
12제자들을 부르신 후에도 예수는 늘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24시간을 늘 동행하셨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시리즈 설교의 주제인“식탁의 동행”이라고 정하려다가 그냥 성경 본문에 있는 예수의 말씀대로 정하였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제자들 뿐만 아니라 주변 무리들의 먹는 문제와 영의 양식을 항상 풍성하게 해결해 주시고는 하셨다. 맞다. 예수 자신이 그를 믿는 성도들의 영과 육의 양식이시다. 주님과 동행하면 영의 양식도 풍성하고 육의 양식도 새롭게 공급받게 된다.
과거에나 오늘날이나 지구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배고픈 이웃들이 많다. 굶주리는 난민들도 많다. 맑은 물조차 마시지 못하며 굶주리는 이들이 많다. 엄마 젖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도 많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생계의 문제로 허덕이는 이웃들이 의외로 많다. 잘 사는 나라, 잘 사는 가정,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풍요를 누리며 권력의 중심에서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 안팎에는 대 물림의 가난과 기근과 질병과 억압과 학대와 방치와 폭력 속에서 소외되어 연명하듯 살아가는 이웃들이 의외로 많다.
예수의 제자 12명 중에 7명이 갈릴리의 어부 출신들이었다. 그 중에 우리가 아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비롯한 어부출신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후에 고향의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 한 적이 있었다. 요한복음 21장은 그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하였다. 갈릴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2절에는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 중에서 일부의 이름이 거론된다. 물고기 잡으로 가겠다고 분위기를 띄운 것은 베드로였다. 그 곁의 다른 제자 여섯 명이 같이 따라나섰다. 결국은 일곱명이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다. 그런데 날이 새어 오도록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였다. 밤새 고생만 하고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 새벽녘에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찾아 가셨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인데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말을 거셨다. 제자들은 그 때까지 그들에게 말을 거시는 분이 부활 예수신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제자들은 짧게 대답하였다. “없나이다.”그 때에 예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예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다. 그 순간 너무나도 많은 물고기가 잡혀서 그물을 들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힘겹게 그물을 끌어 올려 보니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다.
우리는 이 익숙한 장면에서 무슨 은혜를 깨닫게 되나.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
이 때의 제자들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 동안 누가복음 24장에서 대한 대로 근심, 두려움, 슬픔, 놀라움, 무서움, 의심, 믿어지지 않는 불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또 만났음에도 그랬다.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내용인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밤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만나셨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의심이 가득하였다. 방 안에서 바로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가셔서 말씀하시고 못 자국난 손과 발을 보여 주시는데도 그랬다. 심지어는 그들 보는 앞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셔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시기까지 했는데도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은 며칠 후에 베드로가 앞장서고 다른 제자들이 합세해서 일곱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한 것이다. 그 밤에도 저들이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밤을 새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여전한 불안, 근심, 두려움, 무서움, 의심, 불신 이런 것들이 안개처럼 꽉 짓누르고 있었다. 예수의 부활이 받아들여지질 않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음에도 여전히 꿈인가 현실인가 하고 생각이 정리되질 않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오늘 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그러할지도 모른다. 뭐 굉장히 예수 믿는 것처럼 부산스러워하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여전히 불신의 강이 흐르고 있다. 의심의 안개에 가리어져 있다. 마치도 다메섹도성 입구에서 눈이 가리어졌던 사울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는 사울을 삼일 동안 앞을 못 보게 하셨다. 삼일 동안 사울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착잡한 날들을 보낸 저에게 선지자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안수하게 하셨다. 그 순간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하셨다. 사울의 마음에 부활 예수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게 하셨다. 그 날 사울은 눈을 떠 다시 보게 된 것 뿐만 아니라 부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잘 관찰해 보라. 짐승을 타고 살기 등등하게 다메섹 성을 향해 가던 사울의 마음을 누가 바꾸었나. 누가 사울이 마음을 돌이켜 주었나. 사울 자신인가. 아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내서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찾아가신 것이다. 홀연히 하늘에서 강한 빛을 그에게 비추셔서 변화를 시작하신 것이다. 사울은 짐승에서 떨어지듯 내려서 땅에 엎드렸다. 그때에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나. 사울이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울에게 찾아가 만나주신 것이다. 이것이 핍박자 사울이 이방의 부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는 시작이다.
밤새 갈릴리의 기온이 떨어지고 쌀쌀한 새벽을 맞기까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헛 그물질을 하던 베드로와 저들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찾아가신 분은 예수셨다. 여전히 저들은 예수를 피하고 숨고 멀리하고 떠나 보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밝아 오지 않은 어두운 새벽 시간에 갈릴리의 해변으로 저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그게 시작이고 그것이 출발이다. 그렇지 않나. 당신은 언제 예수를 만났나. 안 믿어 보려 하고, 예수쟁이들 멀리하려 하고, 교회에 제발 다니지 않고, 기독교와 상관 없이 살아 보려 했는데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된 것이 아닌가.
우리 은평 지방의 전도사 한 분이 어제 교회에 다녀갔다. 연회에서 전달하는 배너 전달을 위해서 다녀 갔다.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두 어달 후면 목사 안수를 받는다. 상가 개척교회의 담임 전도사이다. 교인이 몇 가정이 되나 물었다. 장인 장모가 멀리서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함께 예배드린다고 했다. 그 외에 몇 명이 더 모인다고 했다. 아마 십여명 미만의 몇몇이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다. 장인 장모께서 신앙 생활을 언제부터 하셨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아내가 먼저 믿었고 결혼 승낙을 받기까지 반대가 심했다고 했다. 예수 안 믿는 가정이 전도사 사위를 맞으면서 예수 믿게 되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다. 4월에 목사 안수 받고나면 자신이 목사 된 기념으로 장인, 장모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세례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세상적으로 하면 어떻게 사위가 장인 장모의 머리 위에 손을 얹겠나. 어떻게 장인 장모가 사위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받기를 원하겠나. 그러나 주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가 없는 법이다.
오늘 날도 예수께서 찾아 오신다. 정확한 통계가 아닐 수도 있지만 북한에 지하 교회 성도들이 30만명 정도라고 한다. 그 중에 6만 여명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서 지낸다고 한다.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연명하며 인권이 짓밟혀지는 상태에서 신앙을 지켜 가고 있다.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왜 예수를 믿나. 왜 예배를 드리나. 왜 교회에 찾아 나서나.
예수께서는 이 땅의 천하 만민에게 일일이 다가가셔서 예수가 누구신지 깨달아 알고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주님 찾아 오셨네”라는 534장 찬송의 가사는 이렇다.
“1.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4.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하오니 오소서 오소서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각 사람에게, 각 마을에, 각 회당에, 각 도성에 찾아 다니셨다. 수가성 여인도 만나시고 뽕나무 위에 숨어 있던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도 만나셨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 곁에도 찾아가셨다. 열병으로 고생하는 베드로의 장모에게도 찾아 가셨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도 찾아 가셨다. 12살 된 딸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도 찾아 가셨다.
예수는 이 땅에서 늘 누군가를 찾아 가고 또 찾아 가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숨고 피하고 멀리 떠나려 하는 제자들 곁으로 찾아 가고 또 찾아 가셨다. 예수는 바다 속에도 찾아 가시고 땅 끝에도 찾아 가시는 주님이시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 가시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다시스로 향하는 배 밑 가장 아래층에도 찾아가신다. 물고기 배속에도 찾아 가신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임금과 백성들에게도 찾아 가신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지 않으시고 찾아 가시고 또 찾아 가신다. 주님이 내게 찾아 오셔서 내가 예수의 사람 되게 하신 것이다. 이런 은혜가 내 주변에 계속 임하기를 기도하자.
물고기를 풍성하게 잡아 올리게 해 주신 예수.
예수가 갈릴리 호수가를 찾으신 그 시간은 새벽이었다. 날이 조금씩 밝아 오고 있는 새벽 시간이었다. 베드로와 일곱명의 어부 출신 제자들이 얼마나 피곤하고 지치고 배도 고프고 졸렸을까. 더군다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 그물질만 밤새도록 계속했으니 얼마나 실망스럽고 허탈했겠나.
군대 생활할 때에 9개월간 GOP 철책선 담당 부대에서 근무하고 철수해서 임진강 민통선 해안 경비 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깊은 밤중에 어부들이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군부대의 부대장이 발행하는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임진강에 물고기를 잡으러 들어갔다. 밤중에 물고기를 잡는다. 밤새 물고기를 잡고 새벽에 철수한다. 배 가득히 넘쳐 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기를 잡는 날도 있다. 그런 때에는 해안 초소 30여명의 소대원들 회식용으로 여러 마리의 물고기를 건네주고 간다. 초어 라는 물고기는 길이가 1미터쯤 된다. 맛을 별로지만 참 크다. 매운탕을 끓이면 30명이 충분히 먹을 분량이 된다. 그러나 어떤 때는 밤새 수고했으나 피라미 몇 마리만 배 밑 바닥에 뒹굴고 충혈되고 피곤에 지친 눈으로 철수하는 새벽녘의 어부들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런 저들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힘이 빠지고 만다.
그날 베드로와 일곱 명의 제자들이 그랬다. 밤새 물고기를 잡아 보려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물음에 “없나이다”하고 대답했다. “없나이다.”가 무엇인가.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하는 대답이다. 헛 그물질을 한 것이다. 헛탕친 것이다. 얼마나 지치고 힘들고 맥이 빠지는 새벽이었겠나. 그런 저들 곁에 찾아가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요21: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예수의 관심은 열매 없는 나무 인생이 아니다. 빈 그물, 빈 배로 돌아 오는 것을 주님은 원하지 않으신다. 비록 예수를 멀리하려 하고 도망가려 하고 피하려 하고 숨으려 하고 떠나 보려 하는 제자들이지만 주님의 관심은 저들이 새로운 은혜, 새로운 기적, 새로운 풍성함을 체험하길 원하신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진심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길 원하신다. 더군다나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주님의 마음을 제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풍성한 삶의 수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가난, 실패, 질병, 사고는 주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아니다.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그렇지 않다. 사탄 마귀는 도둑과 같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다.”(요10:10)
예수 믿으면 꼭 잘되고, 꼭 순조롭고, 꼭 앞서가고, 꼭 부자가 되고, 꼭 성공하고, 꼭 번영하고, 꼭 건강하고, 꼭 만사형통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딸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길 원하신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기대이며 마음이시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시련 중에도 믿음이 견고해지고, 슬픔 중에서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길 원하신다. 실패와 절망과 낙담 중에서도 다시 회복하게 하실 주님의 섭리와 위로의 품 안에 안기길 원하신다.
그렇지 않나. 열 명의 배 다른 형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해서 옷을 벗겨서 나체로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총애하던 아들이다. 다른 아들들과 비교될 정도로 채색옷을 입히던 아들이다. 그 아들이 도단 성 곁 양털 깎던 현장에서 형들의 음모에 의해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다. 남들이 그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 집에서 한 솥 밥을 먹던 형제들에 의해서 그런 충격적인 사건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 여주인의 성적 유혹을 피하여 도망친 요셉을 주목하셨다. 그리고 요셉과 순간 순간마다 함께 하셨다. 나중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하나님은 감옥 안에 있는 요셉에게도 함께 하셔서 감옥 안에서도 형통하게 하셨다. 감옥 안에서도 총무 일을 보게 하셨다. 감옥에서 만났던 술 맡은 관원장과의 만남이 나중에 요셉을 임금 바로 앞에 불려 나가게 되는 계기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 아들에게 뱀이나 전갈을 잡아 주는 그런 이상한 아버지가 아니시다.
여전히 답답하고 운신의 폭이 좁은 비대면의 환경이지만 주님께 지혜를 구하자. 아버지께 총명과 은총을 덧입기를 간구하자.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가가셔서 말씀하시자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못 잡던 저들 일곱 명의 제자들이 그물이 찢어지기 직전의 엄청난 물고기를 잡았다. 여기서 모나미 153볼펜 이름이 정해졌다고 하지 않나.
사실 우리나라는 볼펜 심 하나도 제대로 만들 기술이 부족하던 나라였다. 볼펜용 잉크도 제대로 생산할 기술이 부족하던 나라였다. 그런 우리나라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독립된 세계의 140여개국 중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이렇게 정치를 엉망으로 하고, 불의하게 하고, 입법, 사법 행정이 거짓말투성이로 돌아가도 이만큼 강력한 나라로 발전한 것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복이다. 해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다.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그렇지 않나. 어부 경력이 화려했던 베드로다. 어부의 아들로 나서 자란 베드로다. 다른 일곱 명이 제자들이 다 어부 경력이 화려했는데도 밤새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못 잡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자 크고 풍성한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아 올렸다. 누가 한 것인가. 주님이 하셔야 한다. 주님이 하신 것이다.
왜 기도하나. 왜 ‘주여 주여’ 하나. 왜 새벽에 일어나 엎드려 주를 찾나. 왜 밤중에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나. 내 힘으로 내 건강을 지킬 수 있나. 내 경제력으로 내 몸을 지킬 수 있나. 내 실력, 내 학력, 내 경력, 내 사회 신분으로 내가 나를 지켜 갈 수 있나. 한 끼의 음식을 먹는 것이 내 힘인가.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밥 한 숟가락도 못 씹어 넘긴다. 주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내 힘으로 물 한 모금도 못 마신다.
그렇지 않나. 삼성 이재용 회장이 어떻게 하다가 옥중에 수감 되게 되었는가. 당신이라며 과거 그 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어떤 판단,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법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는 역사가 재 평가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그는 차디찬 감옥의 독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 하루를 버티며 살까.
하나님은 공중 나는 참새 한 마리도 지키시고,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도 돌보신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주님과 진정으로 동행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지 않나. 자기 생각, 자기 계획대로 한다면 벨사살 왕이 1,000여명의 고관대작들과 왕후가 지켜보는 연회장에서 그 날 밤에 그에게 죽음이 찾아오길 선택했겠나.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된다면 예수 팔아 버리고 유월절 식탁에서 도망치듯 예수의 곁을 떠났던 가롯 유다가 예루살렘 성전의 대 제사장 곁에서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100년이라도 권력을 누리며 더 살지 그런 불행한 선택을 하였겠나.
요즘 우리는 잠언을 읽고 쓰고 외우고 있다. 잠언 19장 6절에 보니까“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교훈하였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도망가도 찾아가 만나시고 멀리 가도 찾아가 만나시고 밤중에도 새벽에도 찾아가 만나셨다. 찾아가실 뿐만 아니라 저들의 그 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깨닫게 해 주셨다.
떡과 생선으로 배 불리 먹게 해 주신 예수.
예수께서는 밤새 헛 그물질하던 제자들에게 풍성한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 쌀쌀한 갈릴리 해변에 숯불을 지피우셨다. 미리 준비한 생선도 구워 놓으셨고 떡도 구워 놓으셨다. 방금 잡은 싱싱한 생선도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추위에 지치고 밤새 배도 고프고 밀려오는 잠을 이기며 씨름 하던 제자들이 숯불 곁에 둘러앉았다. 예수는 친히 생선도 굽고, 떡도 구워서 저들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일일이 섬기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현장이었다. 그 부활 예수께서 오늘도 지금도 나를 돌보신다. 나의 식탁 곁에서 생선살을 바르시고 떡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내 음식 접시 위에 올려 주시고, 내 입어 넣어 주길 원하신다. 부활 예수는 자상하고 섬세하신 사랑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필요의 공급자이시며 영생의 떡을 먹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한참 허기를 해결하며 시장하게 생선 살을 발라 먹고 떡을 먹고 난 제자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두 번째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다시 대답하였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내 양을 치라”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또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근심하며 대답하였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다시 또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제자 요한의 앞날의 운명을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해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다. 예수는 우리 각 사람의 주인이시다. 우리 각 사람이 부활 예수를 따르는 사명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다른 가정과 내 가정 비교하지 말고 나를 향하신 부활 예수의 음성을 듣자. 부활 예수의 분부하심에 귀를 기울이자. 오늘도, 지금도 부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의 앞날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평생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부활 예수를 따르는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