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동행(눅24:30-31) 2021. 1. 17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요즘 무슨 기도를 하며 생활하는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믿는가. ‘기도의 동행’이란 사람이 계속해서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늘 기도하며 사는 생활을 의미한다. 호흡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듯이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영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증거이다. 성경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의 요한 사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쓰신 성경의 인물들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부르짖는 기도생활을 강조해 주셨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사무엘은 사무엘상 12장 25절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라고 기도 생활의 거룩한 부담에 대하여 선포하였다.
예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왜 늘 그렇게 기도생활에 집중하셨을까. 예수는 밤에도 기도하시고 새벽에도 기도하셨다. 예수는 평생 기도하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전날도 밤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기도하셨다. “이 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셨다. 예수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이마의 땀방울에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기도하시던 중에 붙잡히셨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끌려 가셨다. 예수는 기도로 그의 생을 마감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무엇인가.“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처절하게 절규하는 기도를 하신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신 후에도 기도하셨다. 예수는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증거셨고 항상 기도하셨다. 예수는 승천하시면서도 제자들에게 성령 받기를 기도하라고 분부하셨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그 날, 수많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시고 거창한 부활 기념 축제를 벌이시지 않으셨다. 열흘 전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그 무리들은 더 이상 예수 곁에 보이지 않았다. 수 많은 무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호산나 호산나” 하고 큰 소리를 외치던 그 날의 함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날 오후 내내 너무나도 조용한 시간을 보내셨다.
예수는 부활하시던 날 새벽에 조용히 빈 무덤을 남겨 두고 그 자리를 떠나셨다.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던 몇몇 여인들은 비어 있는 무덤만 보았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한 것은 예수의 빈 무덤에서 만난 두 명의 천사들이었다. 그 새벽 얼마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인들 곁에 나타나셨으나 여인들은 그가 동산지기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예수는 부활하신 날 오후 시간을 두 명의 제자들에게 집중하셨다. 글로바와 또 한 명의 제자가 그 영광의 주인공이다. 저들이 엠마오 마을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예수는 아직 갈 길이 남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글로바와 또 한 제자가 예수를 강권하였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엠마오 마을의 한 집에 가서 묵어가시라”고 권하였다. 저들의 청을 받아들이신 예수께서 저들과 함께 한집에 들어가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이신 것을 몰라보고 있었다. 저들을 맞아들인 그 집 주인도 저들이 누구인지 그 셋 중의 한 분이 부활 예수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와 저들 두 제자는 그 집에서 차려 주는 저녁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때 예수께서는 감사 기도하길 청하셨다. 다 같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것이다. 성경에 ‘축사’(祝謝)하시고 라는 표현은 ‘gave thanks’ 즉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뜻이다. 한문 성경인 <중국어성경>에 보면 ‘축사료’(祝謝了)라고 했다.
축복하는 감사 기도를 하시고 예수께서 떡을 떼어 글로바와 또 한 제자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 장면은 마치도 예수께서 부활 후에 처음으로 행하시는 성찬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 장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그 마지막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예수와 마주 앉아서 예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떡 한 쪽을 떼어 주실때에 저들 두 제자의 눈이 밝아졌다. 그제야 동행하시던 그분,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계신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이신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
늘 그렇게 하는 대로 오늘도 세 가지 작은 주제를 관찰하며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길 원한다.
예수와 함께 먹는 음식.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 예수.
눈이 밝아진 제자들.
오늘은 위의 세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어서 묵상하려고 한다.
누구와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가족끼리는 매끼마다 음식을 같이 먹는다. 사람이 아무하고나 함께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서로 마음과 생각과 삶을 나누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상이 상대방 국가에 방문하면 체류하는 일정 중에 함께 양국 정상이 만찬을 같이 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는 그냥 음식을 같이 나누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서로 공감대를 같이하며 서로의 현재의 삶을 같이 나누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보급된 책 중에 키이스 페라지(Keith Ferrazzi)의 <혼자 밥 먹지 마라>(Never eat alone)라는 책이 있다. 혼자 밥 먹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관계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미국 펜실베니아의 가난한 시골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미국의 알려진 마케팅과 세일즈 분야의 두각을 나타내는 회사를 창업하고 발전시키기 까지 누군가와 만나 사귀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함께 교분을 가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하여 자신의 생생한 체험담을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참 유익한 책이다.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Warren Buffett, 1930-)과 함께 점심 한 끼를 먹는데 30억 가까운 식대를 투자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지 않나. 그건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누구와 만나서 어떤 음식을 먹느냐보다 천배 만배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그 식탁에 둘러앉아 무슨 대화하느냐는 것이 아닌가.
“지식은 과거를 아는 지혜이고 지혜는 미래를 아는 지식이다”
라는 말이 있다. 워런 버핏과 만나 두 어 시간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나누는 대화 중에 얻는 지혜가 30억 이상의 가치가 주어질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면 어찌 그런 투자를 하겠는가.
뿐 만 아니라 한 끼의 음식은 그 음식을 접하는 사람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끼의 음식을 통해서 기운을 얻고 그날의 일과를 소화하며 살아간다. 예수께서도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 음식을 함께 잡수셨다. 부활하신 이날 오후에도 엠마오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음식을 앞에 두고 축복하는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떡을 떼어 글로바와 다른 또 한 제자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는 정작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서 음식을 잡수지 않고 자리를 떠나셨다. 그 장면을 누가는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신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31)고 하였다.
눈이 밝아지는 것은 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어떤 늙은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려고 했다. 이 아버지에게는 18마리의 낙타가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는 끝까지 아버지가 타고 다니기로 하고 17마리의 유산을 가지고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풍습으로는 장자에게는 1/2을, 둘째 에게는 1/3을, 셋째에게는 1/9의 비율로 나누어 주도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17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이런 비율로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형제는 지혜롭다고 소문난 랍비를 찾아갔다. 랍비는 저들 삼형제의 늙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만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은여생 타려고 하는 그 한 마리의 낙타도 내어 달라고 하였다. 랍비는 18마리를 가지고 1/2인 9마리를 큰 아들에게 주었다. 둘째에게는 18마리의 1/3인 6마리를 주었다. 셋째에게는 1/9인 2마리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남은 한 마리를 다시 늙은 아버지에게 되돌려 드리고 화목하게 재산분배를 마쳤다.
이런 지혜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모르는 것이 없으신 지혜의 원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 증거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도록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예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아니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케 하셨다. 그 예수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덧입고 죄 사함의 권세를 누리게 하시는 대속(代贖)의 주님이시다.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예수와 엠마오를 향하여 가던 길에 예수의 말씀을 듣던 중에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알았다. 예수의 감사기도 가운데 눈이 밝아진 저들은 부활 하신 예수를 알아 보게 되었다. 우리가 늘 대하는 익숙한 말씀이라 그러하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고 얼마나 감격스러운 체험인가.
그러나 저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 보는 그 순간에 예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함께 계시지 않았다.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거기서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다시 그 밤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갔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와 몇몇이 함께 숨어 있는 곳을 찾아갔다. “예수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실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엠마오의 식탁에 마주 앉아 두 제자에게 기도하지 하시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그 기도 시간을 우리는 알수 없다. 무슨 내용의 기도를 드리셨는지도 알 수 없다. 성경은 그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일 분 정도 짧게 기도하셨는지 십분이 지나도록 길게 기도하셨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사 기도 후에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눈이 밝아져서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이신 것을 알아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진 저들이 한 일은 “예수가 과연 살아나셨다”고 증언하는 일이었다.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전하고 있던 그 시간에 예수께서 그 자리에 나타나셨다. 예수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문안하셨다. 저들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면서 예수가 영으로 나타나셨나 하고 의심하면서 놀라워하고 무서워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다. 숨어 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놀라워했다. 누가복음 24장 41절에 보면 그러나 “아직도 믿지 못하고”라고 하였다. 오늘날 나는 어떤가. 남들이 예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데 나만 안 믿어진다고 하면 나만 믿음 없는 사람 같아 보일까 봐 말꼬리를 흐르며 “나도 믿긴 믿는다”고 우물쭈물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때에 예수께서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먹을거리를 찾으셨다. 그때에 누군가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 예수께서는 다 식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으셔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아마도 부활하신 그 날 깊은 밤에 잡수신 첫 식사가 다 식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이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의 이런 기록들은 우리에게 무슨 생각을 갖게 해 주나. 예수는 죽임 당하시기 전날 밤에도 제자들과 마주 앉아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셨다. 예수는 부활하신 그날 밤에도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에 찾아가셔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 중에서 누군가가 내어 드린 다 식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못박히셨던 못 자국난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신 것은 예수의 부활하신 부활이 영의 부활이 아닌 몸의 부활인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 분명하다.
맞다. 기도는 음식을 먹는 생활과 같고, 숨을 쉬는 생활과 같아야 한다. 지난 주일에 ‘말씀의 동행’, 이번 주일에 ‘기도의 동행’이라고 말씀의 제목을 정하고 같은 본문을 또 다시 묵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이만기 씨 같은 장사라도 먹어야 산다. 사람이 우주 공간에 날아 올라가서 지내는 동안에도 그런 공간에서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다. 우주 공간의 우주선 안에서도 잠깐이라도 숨을 멈추면 죽고 만다. 무언가를 먹고 24시간 동안 계속하여 숨을 쉬어야 생존할 수 있다.
기도의 동행, 기도의 일상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예수와 동행하며 엠마오를 향하던 그 날 오후 시간에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도 중에 눈이 밝아져 예수가 부활하신 사실을 알아 보게 되었다. 영의 눈이 활짝 떠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하고, 기도로 영의 눈이 활짝 열려야 한다. 육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 보이질 않는다. 각종 새와 꽃과 풀과 숲과 나무들과 들판과 산과 강과 바다와 하늘과 바다와 파도와 물고기와 뜨는 해와 지는 석양과 달과 별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볼 수가 없다. 못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육의 눈이 어두우면 이 아름다운 삼라만상과 해와 달과 별들의 낮과 밤의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상태란 그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세계 열방의 온 인류를 코로나 19의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의 눈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영의 눈이 환하게 떠지길 기도해야 한다. 영의 눈이 활짝 떠지길 사모해야 한다.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안과 질환 중에 ‘색맹’(色盲, color blindness)이란 것이 있다. 선천적으로 전혀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밝고 어두운 명암과 형태밖에는 볼 수가 없다. 선천적인 색맹인 경우는 모든 사물을 흑백으로만 보는 이들도 있다. 선천적으로 색맹이어서 색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꿈에서도 사물을 흑백으로만 인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색이 있는 사물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의학 상식을 접하다 보면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인 것을 쉽게 깨닫게 한다.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영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 없는 이들은 영의 세계에 대하여 전혀 이해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의 눈은 700여만개의 원추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각종 색을 구분한다. 건강한 사람의 눈은 100만가지의 다양한 색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신비하지 않나.“와 아름답다”고 감탄할 때의 그 아름다움이란 이렇게 설명이 불가능한 형형색색의 조화가 우리 눈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색맹의 경우에는 빨강, 초록, 파랑색 중에서 한 두가지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빨간색이 색맹인 사람은 빨간색과 초록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파란색 색맹인 사람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초록색 색맹인 사람은 초록색 부분을 보지 못한다. 후천성 색맹은 망막이나 시신경의 질환에 의해 발생한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타락 이후로 영의 눈이 어두어진 불행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가 누구신지 몰라 보게 되었다. 사울도 몰라 보았기 때문에 핍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눈이 다시 보게 되면서 영의 눈도 새롭게 열린 것이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글로바와 또 한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부활 예수를 알아 보았다. 그들은 평생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영의 세계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흘동안 눈에 비늘 같은 것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고 지내던 사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울은 사흘동안 못보는 상태였다. 못 보게 된 사흘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지자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셔서 안수하게 하셨다. 그 순간에 눈의 비늘같은 것이 벗겨졌고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것이 영적인 사건이다. 영적 체험이다. 사도행전 9장 19절의 “다시 보게 된지라”라는 이것은 사울에게 있어서 이전의 사울과 이후의 사울로 운명을 가르는 영적 사건이 되었다. 그 순간 이후로 사울은 이방 복은 전도자 바울로 바뀌는 순간이 찾아 왔다. 그 순간 이후로 사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며 다녔다. 부활 예수를 전하는 사울로 인해서 그를 알고 있던 유대인들마다 당혹스러워했다. 그렇지 않았 겠나.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사울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예수 믿는 이들을 곳곳마다 찾아가서 색출해다가 처단하려 하던 혈기 등등한 유대주의자가 아니었나.
여기서 언급하는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영의 세계를 보는 새사람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성경은 그 어디를 찾아 보아도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의 나중 행적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는 마치도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21장 25절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는 내용으로 요한복음이 끝난다.
맞다. 우리가 성경에서 글로바와 또 한 제자의 복음 전파에 대한 나중 행적을 접할 수 없다고 해도 좋다. 분명한 것은 부활 예수의 말씀 해석으로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감사 기도 해주시던 엠마오의 저녁 식탁 앞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분명한 체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 예수를 알아 보게 된 저들의 나중 생애가 어떠하였을지는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일상기도>라는 책이 있다. 폴 밀러는 성경공부 교재를 개발하고 제자훈련하는 선교 기관인 seejesus. net의 대표이다.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여섯명의 자녀들을 키우며 아내와 함께 여덟식구가 생활한다. 그는 책의 시작 부분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토요일에 딸 킴만 엄마와 집에 남고 나머지 다섯명의 자녀들과 함께 아빠가 캠핑을 즐겼다. 그런데 저 만치 밴 옆에서 14살된 딸 에슐 리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속상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애슐리 무슨일이야”하고 아빠가 물었다. 애슐리는 “콘택트 렌즈를 잃어 버렸어요”하고 시무룩하게 대답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낙엽과 잔가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빠가 말했다. “애슐리 움직이지 마. 기도하자”그 순간 애슐리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기도가 무슨 소용이에요. 그 동안 캄이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아직도 말을 못하쟎아요.”여동생인 캄은 자폐증, 발달지체로 고생하고 있다. 미세운동 기능도 약하다. 몸의 동작이 자유롭질 않다. 그래서 말도 못하는 상황이다. 5년을 전문 병원에 다녔지만 말을 한 마디도 못한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캠핑 중에 컨텍트 렌즈를 잃어 버린 딸에게 ‘기도하자’고 말한 아빠에게 애슐 리가 대들 듯이 한 말이 이것이었다. 그 동안 언니 애슐리는 동생 캄이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고계셨다. 저들에게 기도는 더 이상 소용없는 시간 낭비와 같아 보였다.
기도하는데도 응답이 없거나 지나치게 응답이 지연되면 “기도해 봤자 다 소용없다.”는 냉소주의나 영적 피로감이 몰려 오게 된다. 그래서 기도를 등한히 하게 되고 기도의 필요성을 점점 무시하게 된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기도해 보겠다”는 대화법으로 곤란한 상황을 슬며시 벗어나기도 한다. 반대로 주문을 외우듯이 오래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난 기도해 봤자 소용없어. 하나님은 내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 것 같애”라고 기도에 대하여 마음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아빠 폴 밀러는 울고 있는 딸 애슐리 앞에서 “하나님 콘택트렌즈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하고 딸에게도 들리도록 기도하였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자 마자 몸을 구푸려서 어수선한 나뭇잎과 잔 가지가 가득한 숲을 살펴 보고 있는데 거기 나뭇잎 하나가 콘택트렌즈를 손바닥이 받혀 들고 있는것처럼 눈에 들어 왔다. 큰 소리로 울고 있던 딸 애슐리는 울음을 멈추었고 그날 캠핑은 특별한 추억을 그들 가족에게 안겨 주었다.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늘 기도하셨다. 마가복음 1장은 마태, 누가복음과 다르게 예수의 그런 기도의 일상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다. 회당에서 나온 예수는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곳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예수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깨끗이 나은 베드로의 장모는 음식을 준비해서 예수와 제자들에게 대접하였다.
예수는 그 날도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의 장모가 차려주는 음식을 맛있게 잡수셨다.
마가복음 1장 32절에 “저물어 해질 때에” 환자들이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거기 ‘저물어 해 질 때에’라는 말씀은 안식일이 끝났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시간이 하루의 새로운 시작이다. 예수는 그 저녁 시간에 시작해서 밤이 깊도록 모든 병자,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었다. 온 동네의 환자들이 그 집 앞에 모여 들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였다. 그 때 시몬 베드로와 몇몇의 제자들이 그 새벽에 예수의 뒤를 따라가서 말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른 새벽인데 벌써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몰려 온 것이다. 예수는 그런 중에서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그리고 만나는 각색병자들을 고치셨다. 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리고 예수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
기도의 일상을 살아가며 예수와 동행하는 기도의 아름다운 동행이 계속되길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