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의 예물로 드리는 감사(레2:1-16) 2020. 11. 15
레위기에 소개되는 제사는 크게 두 가지이다. 동물로 드리는 제사와 곡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섯 가지다. 번제(燔祭),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는 동물 제사이다. 또 하나는 곡물로 드리는 소제(素祭)이다. 번제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번’(燔)자가 태운다는 뜻이다. 화제(火祭)라고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에 태워서 드린다는 의미이다. 번제나 화목제(和睦祭)는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자원제 중에 또 하나가 레위기 2장 전체에 소개된 소제이다.
소제는 누구든지 드릴 수 있다. 2장 1절에 “누구든지”라는 말씀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소제를 드릴 수 있다. 다음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킨다.
오늘은 소제를 예물로 드리는 감사 신앙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첫째, 처음 익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12절에 보면, 소제는 보리의 첫 이삭으로 드리는 것이다. 보리는 매년 첫 번째 나오는 열매이다. 이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성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성도들만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 수 있다. 이는 예배자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그래서 첫 열매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직 스스로 주 안에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는 증거일 수 있다. 우리가 나보다 귀한 누구를 만나려면 약속 시간보다 미리 가서 기다리고 헤어질 때에도 상대방이 그 자리를 떠나기까지 배웅한 후에 자리를 떠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에 첫 열매를 들고 나와 드리는 심정으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잡념에 빠지거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습관적으로 졸거나 눈을 감고 명상하듯 예배하면 안된다. 찬송을 불러고 힘차게 무대 위에서 독창하는 성악가의 심정으로 진지하게 찬송해야 한다. 기도를 드리는 시간에도 마음을 모아서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대할 때에도 경청하고 묵상하는 예배자의 태도를 지켜나가야 한다. 예배가 병들면 모든 삶이 병드는 것이다.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일상이 주 안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감격을 갖고 예배드리는 것이 감사절 신앙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코로나로 인해서 경영이 멈추어 서 버린 사업체가 있다. 우리 교회에도 몇 가정이 있다. 지난 해 추수감사절 때에 올 2020년의 추수감사절의 나의 사업자의 운명을 예상한 그 누군가가 있나. 없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신앙은 만물이 결실 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풍성한 꽃이 피었 다고 해도 그 꽃이 지고 열매가 맺고 그 열매가 풍년이 되려면 마지막 추수를 거두어 창고에 알곡을 쌓기 까지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해마다 주님의 분깃을 구별하여 드리는 봉헌 신앙은 모든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전부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마치도 첫 단추를 잘 못 낀 것과 같아서 나중이 우수꽝 스러워지고 만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예배는 한해의 마지막이며 또 새로운 출발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감사의 예배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절기 신앙으로 하면 모든 날들이 시작이며 끝이고 끝이며 시작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이 예배가 나의 마지막 예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내 생애에 앞으로 몇 번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 앞으로 갈까”이렇게 질문하면 아마도 젊은이들은 웃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나그네 인생 길이 그렇게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열매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소제로 드리는 신앙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지 모른다.
둘째, 볶아서 찧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14절에 보면,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라고 말씀하셨다. 볶아 찧어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야 한다. 1, 2, 4, 5, 7절에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강조가 ‘고운 가루로’예물을 삼으라는 것이다. 고운 가루를 만들려면 볶아야 하고 찧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나 주장이나 고집이나 편견이나 불완전한 지식이 깨뜨려지고 부수어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고집이나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사탄이 가장 건드리기 좋아한다. 그래서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교회에 불화가 생기도록 부추긴다. 사탄·마귀 귀신이 인간의 불신안으로 인한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건드려서 화가 생기게 하고 불화를 일으키게 한다. 로마서 2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볶아서 찧은 고운 가루가 아니면 반죽이 되질 않는다. 뭉쳐지질 않는다. 14절에서 말씀하는 “볶아 찧은 것으로”라는 말씀은 불에 볶아서 처음 익은 열매를 익혀서 그 낱알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의 말씀들을 보면 고운 가루를 만들어서 화덕에 떡을 굽거나 번철에 부쳐서 소제로 드리게 되어 있다.
볶는 것도 불을 통과해야 하고 화덕에 굽거나 번철에 부치는 것도 뜨거운 불을 통과하여야 한다.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소제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적용해 보면 우리 각 사람의 삶이 그러하다. 고난, 시련, 역경, 질병, 사고, 실패, 환난, 우환이 전혀 없이 날마다 따뜻한 봄날과 같은 순탄한 삶을 살아 온 이들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존귀하게 쓰임 받은 신앙의 선진들이란 거의 없다. 아마 그런 이들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잘된다.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예수 믿으면 병도 안걸린다. 예수 믿으면 자식들이 잘된다.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해진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런가. 반드시 그런가. 아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런 차원의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가령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아가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은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임 당했다. 옥중에 갇혀 있던 그는 목 베임을 당하고 그의 잘린 목은 헤롯의 잔치자리에 쟁반에 담겨 나갔다.
예수는 33세에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 12제자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다 도망가고 숨어 버렸다. 예수는 홀로 남아 외롭게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다. 넘어지고 쓰려지며 채찍에 맞고 또 맞아 피 범벅이 되었다. 예수는 뜨거운 불에 볶아지고 절구에 찧어져서 고운 가루로 반죽이 되어 이글 이글 타는 화덕에 올려진 소제의 떡 한 덩이같은 생을 마치셨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변치않는 향기나는 제물이 되셨다. 그는 죽임 당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의 제자 중에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처형당했다. 그 외의 제자들의 생애를 일일이 나열할 시간이 없다. 사도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지난 주에 우연히 새롭게 하소서 최근 분량을 접하였다. 감리교 전국 5대 ㄷ교회에 속하는 만명 이상이 모이는 분당의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가 간증하였다. 아버지가 목사였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30대 후반에 큰 교회의 후임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 아들이었지만 잡기에 능했다. 중학교 때부터 고스톱과 포커에 빠졌다. 신학교 입학 원서도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접수했다. 피할 길이 없어 신학교 시험을 봤다. 신학교 내내 놀음하고 당구에 빠져 지냈다. 그래도 공부는 좀 했다. 군목 시험에도 합격해서 동료들보다 먼저 목사가 되었다. 신학교에 만난 여학생과 결혼도 하였다. 전방에서 군목으로 지내면서 낮에는 군목으로 활동하고 밤에는 다른 동료 목사와 함께 군 숙소에서 밤새 포커를 했다. 주말에도 여관방을 잡아 놓고 포커에 빠져 지냈다. 아내가 그 사실을 알았지만 묵묵히 참고 주께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군목단 수련회에 가야 했다. 않 가면 안되니까 마지 못해 참석했다. 그런데 그 밤에 주님이 그를 부르셨다. 밤을 세워 기도하였다. 저 만치에서 늘 그와 포커를 즐겨 치던 그 동료 군목도 밤새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그 밤에 그를 다시 부르셨다. 그는 수련회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부대장에게 연락하고 그 기도원의 기도굴에 들어가서 여러날 기도하며 지냈다. 자기의 의지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때가 되어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는 이십대 중반부터 탈모가 심해서 이미 이십대 후반부터 오십대 분위기의 모습으로 지냈다. 그래서 그는 외모상 삼사십대가 없는듯한 날을 지냈다.
군목 제대하고 미국 유학 중에 아버지 목사님이 병들어서 급히 귀국하여 아버지의 목회를 돕고 있었다. 아버지는 회복하지 못하시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젊은 나이에 부채 많은 큰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로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는 중에 첫 딸이 태어났다.
출산 후 의료 사고로 딸이 패혈증, 뇌가 굳어가고, 혈당 지수가 제로가 되었다. 응급실로 실려 가고 경기를 하며 자라났다. 지난 삼십년을 그렇게 자라났다. 두 살 아래 남 동생이 누나의 손과 발이 되었다. 같은 초등학교부터 12년 동생은 누나의 곁을 지켜 주었다. 딸은 항상 꼴등, 아들은 항상 일등 그런 가운데 성도들의 삶을 이 끝에서 저끝까지 몸으로 공감하는 날들을 지내며 여기 까지 왔다. 지난 해에 딸과 아들이 한 해에 결혼했다. 교회 장애우교실에서 만난 여교사가 딸의 소개로 며느리가 되었다. 딸도 충남 보령의 사회복지사가 나타나서 결혼이 성사되었다. 아들은 신학교 마치고 통역 장교로 군대가 있다.
본인은 지난 20여년 목회 중에 8년 동안 여덟 번 결석으로 고생했다. 공황 장애가 와서 죽을 것만 같았다. 설교 중에 공황 장애 증상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그런 날들이 여러해 지속되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도 없고 견딜 수 없는 힘 겨운 나날들이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부흥하고 부흥했다.
“용서하소서” 라는 찬양이 있다.
주님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금은 보화 자녀들 까지 주님것을 내 것이라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사명 맡긴 재물을 주를 위해 쓰렵니다.
천한이 몸 내 것이라고 주의일을 멀리 했네
주신이도 주님이시요 쓰신이도 주님이라
아버지여 불충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유혹 다 멀리 하고 주의 일만 하렵니다
주님 사랑 받기만 하고 감사할 줄 몰랐었네
주님 말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었네
아버지여 연약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명령 순종하면서 주를 위해 살렵니다.
아버지여 연약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명령 순종하면서 주를 위해 살렵니다.
주를 위해 살렵니다..
셋째, 기름을 부어야 한다.
1절에 보면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이 그 위에 기름을 붓고”라고 했다. 4절에도 보면“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라고 하였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거나 섞는 것은 곱게 깨어진 고운 가루와 같은 마음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물 인생이 되려면 깨어진 마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기름은 보릿 가루가 반죽이 되어 화덕에 들어갈 때에 타지 않고 골고루 잘 익게하는 역할을 한다. 타면 먹을 수도 없고 매캐한 냄새만 고약해진다. 기름이 없이 화덕에 떡을 구울 수는 없다. 결국은 다 타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기름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름이 필수이다. 기름 부음 즉 성령 충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예물 즉 제물 인생이 될 수 없다. 기름 부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연기만 나고 새카맣게 타고 만다. 주변을 둘러 보라. 성령 받고, 은혜 받고 신앙 생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불평 불만과 원망과 시비로 스스로 불행의 늪에 빠져 들고 만다. 불에 타서 재가 되고 연기만 난다. 주변 사람들이 눈을 뜰수 없게 만들고 주변 사람의 눈에서 눈물만 나게 한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골고루 잘 발라야 화덕에 들어갈 때에 노릇 노릇하게 보기도 좋고 향기도 좋고 맛도 좋은 소제물로 무교병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기름을 발라야 철판에 부칠 때에 맛있는 무교전병이 만들어 지는 법이다. 해답은 기름 부음이다. 해답은 성령의 임재다. 해답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내 신앙생활이 향기롭지 못하고 타는 연기만 가득한가. 기름이 부족해서다. 성령 충만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맛있는 무교병과 무교 전병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감사절 신앙이란 우리 각 사람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신앙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넷째, 화덕에 굽거나 철판에 부친 것으로 드려야 한다.
화덕이나 철판의 특징은 뜨거운 불이 있다는 점이다. 팔레스틴 사람들의 화덕이란 둥그렇게 만든 화덕의 안쪽 벽에 반죽에 기름을 발라서 던져 넣어 굽는다. 중동 식당이나 인도 계 레스토랑에 가면 난이라고 하는 잘 구운 밀 반죽 전병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이는 신앙 생활의 연단과 시험을 말한다. 창세기의 요셉은 애굽의 노예 생활 13년이 화덕과 철판과 같은 곳이었다. 다윗에게는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해 지내야 했던 엔게디 광야와 막벨라의 동굴 생활이 화덕과 번철과 같은 시험과 연단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점이 있다. 화덕이나 철판과 같은 불 같은 시험을 받기 전에 먼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에 새카맣게 타 버리지 않고 정금처럼 오히려 더 빛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되는 법이다. 가령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시기를 받아 죽음의 위기를 수 없이 넘기기 훨씬 전에 이미 성신의 충만함을 받았다. 사무엘 상 16장 13절을 다 같이 보자.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맞다. 믿음의 사람은 불 같은 시험을 당하기 전에 주님께 성령 충만을 늘 사모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유비무환의 신앙이다.
에스더로 하면 일찍이 부모 잃고 홀로 성장하면서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돌봄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불 같은 시험과 환난을 견기도 이겨 내야만 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화덕에 던져지고 철판에 올려지는 듯한 불 같은 시험 앞에서 오히려 더 향기로운 인생으로 정금처럼 다듬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름 부음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조금만 뜨거운 불 시험이 닥쳐와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는 매운 연기만 나는 새카맣게 타 버린 숯덩이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말것이다.
그러므로 화덕에 들어가고 철판 위에 올려지기 전에 기름 부으심을 반드시 사모하여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날마다 의지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한다. 전도와 봉사에 즐거운 마음으로 앞장 설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조각을 나누어 드려라.
5절과 6절에 보면 화덕에 구운 무교병이나 무교전병을 다시 철판에 기름을 섞어 부친다. 그것을 조각 조각 부수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이 소제다.
조각 조각 부수어서 드리는 것은 온전한 희생과 헌신이다. 볶은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것이 희생과 헌신의 시작이라면 화덕과 철판을 거치게 한 후에 다시 조각 조각 부수어 드리는 것은 완전한 희생과 헌신의 마지막 모습으로 말한다. 이는 자기의 원래의 모습을 자랑하지 않고 부수어지고 나누어지고 뒤 섞이고 하나 되어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지는 화제의 절정이다. 이렇게 소제를 드리는 성막과 성전에는 소제의 무교병과 무교전병을 구워 봉헌하는 구수하고 향기로운 냄새로 진동하게 된다.
이는 마치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준비하였던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가 옥향 향유 나드를 깨트려 예수의 발에 부어 드린 향기나는 헌신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아닌가.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다가 여호와께 화제로 불태워 드린다. 이것이 화제인데 ‘향기로운 냄새’(레2:9)라고 하였다. 그렇게 드린 소제물 중에서 남은 것을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으로 돌렸다. 10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여섯째, 유향을 더하여야 한다.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되 두 가지를 금해야 한다. 11절에 보면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라고 했다. 누룩을 넣지 말라는 것은 부패와 분열과 위선을 경계하신 것이다.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쾌락과 유혹을 주의하라는 교훈이다.
12절에 보면 예외가 있다. 처음 익은 열매로 소제를 드릴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태워 드려지는 소제가 아니라 제사장이 먹을 목의 소제인 경우에는 누룩과 꿀을 섞어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리는 소제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룩이나 꿀은 불이 닿으면 변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교병과 같이 변하지 않는 신앙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불과 같은 시련과 연단 앞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변질되지 않는 순수한 신앙을 기대하신다.
금요일 밤부터 다니엘서를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누룩이나 꿀이 섞이지 않은 신앙이었다. 그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명령이라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고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저들의 순결한 신앙을 보시고 사자 굴에서도 건져 내시고 평소보다 일곱배다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건져 내셨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소제물을 준비할 때에 누룩이나 꿀을 섞지 말고 유향을 더하라고 하셨다. 1절에도 보면, 소제의 예물은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으라고 하셨다. 유향은 히브리어로‘레보나’(לבונה)라고 해서 유향나무에서 축출한 고급 향료이다. 이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는 성도의 찬양과 기도생활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만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중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찬송하고 기도하여야 한다. 그것이 향기로운 냄새요 유향을 더하는 신앙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구원 받는 성도들에게나 세상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생명이 이르는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일곱째, 소금을 쳐야 한다.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였다. 소금은 부패와 변질을 방지한다. 소금은 음식물의 고유한 맛을 유지하게 해 준다. 소금이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어떤 계약을 성사할 때 현장에서 서로가 떡과 소금을 함께 먹었다. 이는 계약을 파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 나가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소제물에 누룩과 꿀을 섞지 말라고 하셨다. 대신에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하셨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룩은 부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허풍으로 부풀려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도 안된다. 또한 꿀을 섞지 말라고 하셨다. 꿀은 불이 닿으면 그 성질이 변한다. 꿀은 입에 달지만 불 시험이 오면 변한다. 그런 성질을 아시는 하나님이 소제에 꿀을 섞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우리 신앙이 그러해야 한다. 우리 신앙에 누룩이 섞이거나 꿀이 섞여서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의 변질을 원하지 않으신다. 고운 가루에 소금을 쳐서 화덕에 굽고 철판에 다시 구워서 곱게 조각 낸 정성스러운 소제를 향기나는 냄새로 여호와께 드리기를 원하신다.
13절에 보니까 이것을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맞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언약은 그 누구도 파기할 수 없다. 영원 불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금 언약’인 것이다. 이 소금 언약이란 말씀이 역대하에도 나온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13:5)
그렇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 언약은 영원 불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금 언약인 것이다.
올해도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한달 반만 지나면 2021년을 맞이할 것이다. 죽은 자와 살아 남아 있는 자들 사이에 끼어 사는 우리 각 사람은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불변하는 신앙의 주인공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라는 교훈을 강조해 주셨다. 소금의 맛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소제에 소금을 치는 것은 변하는 않아야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교훈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는 “소금은 좋은 것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4:6)고 교훈하였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변찮는 믿음, 불변하는 믿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