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가라(살전5:12-18) 2020. 11. 8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Alexander, B.C356-323)가 32살에 갑자기 죽었다. 그 후에 카산드로스(Κάσσανδρος,BC 350-297)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이복 누이 데살로니키( Θεσσαλονίκη)와 결혼하고 에게해로 진출하는 새로운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도시의 이름에 아내의 이름을 붙여서 ‘데살로니가’라고 불렀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한 농산물을 육로와 해로로 수출하는 관문이 되었다.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큰 해양도시이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그 당시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서로 지역을 나누어 분할통치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7장 8절에도 보면 ‘읍장’이란 행정 칭호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한 도시에 삼 주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는데 적지 않은 믿는 자들이 탄생하였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몇 해가 지나가는 동안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매우 끈끈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저들을 보살피고 목회적으로 돌보는 감독도 세워졌다. 사도 바울은 늘 자신의 곁에 있던 디모데를 파송해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돌볼 정도였으니 바울의 마음 속에 저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이다. 그 당시에 가는 곳곳마다 환난과 핍박이 극심하였음으로 바울 사도 자신에게 그런 신앙이 더욱 컸을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어떤 신앙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편지의 끝 부분에 속하는 본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서로 존중하며 화목하라.
13절 끝에 보면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하였다. 12절부터 이어지는 이러한 교훈의 바탕은 목회자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라고 권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수고’라는 말은 그냥 세상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생활하고 사업하고 장사하고 그런 차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1장 3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사랑의 수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고 중에 다스림과 권면이 포함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수고를 많이한 사도였다. 갈라디아서 4장 11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장사도 어렵고, 사업은 더군다나 쉽지 않고, 만만한 직장에 이력서 내고 합격해서 자리 잡고 인정 받고 승진하고 역할을 제대로 하기도 쉽지 않다. 끝이 없는 수고를 요구한다.
그런데 주의 일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교회 공동체의 사역이 그러하다. 바울 당시의 바울이나 실루아노나 디모데가 그러하였다. 이는 오늘 날 나라 안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이나 나라를 떠나 선교지의 미지의 땅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가령 사도 바울은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1:24/공동번역)
교회 사역이란 것이 잘 되면 잘되는 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사역자의 두 어깨에 느껴지는 사역의 끊임 없는 부담이 주어진다. 그런 사역자의 수고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수고와 다스림과 권면을 알아서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며 서로 화목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을 귀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그 사역의 수고에 대하여 존중하고 성도 간에 목회자를 중심으로 서로 서로 화목하여야 한다. 편을 가르면 안된다. 내편 네편하면 교회는 병들고 만다. 교만해도 안되고 남을 무시해도 안된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해도 안되고 비겁해도 안된다. 왜냐하면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 주고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변의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하고 다 존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이 신앙 다워지기를 위하여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사역자들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고 서로 간에 화목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신앙 생활이란 것이 “목회자와의 관계, 목회자의 가족과의 관계”가 은연 중에 나의 신앙 생활의 범사에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로 하면 “속장과 속도원, 교사와 교사, 성가대로 하면 지휘자, 반주자, 대장, 총무, 대원 각 사람들 간에 원만한 관계가 얼마나 교회 생활에 소중한 요소인지 모른다. 각 기관에서 주변의 그 누군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 이 모든 면에서 외톨이가 되면 안된다. 혼자만 앞서가도 곤란하다. 혼자만 교제를 끊고 독야청청하려 해도 문제다.
교회는 서로 다 다른 환경과 여건과 배경과 신분과 사회 지위와 사회 역량을 뒤로 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구성원으로 서로를 마음을 다하여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밤 시간에 곽온유 어린이가 응급실을 거쳐서 한 밤중에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소식을 듣고 전화로 기도하였다. 예전 같으면 한 밤중에라도 응급실에 달려 가서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서 찾아 가도 병원 안에 출입이 불가능하다. 다음 날도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며칠간 복통으로 고생하고 제대로 먹질 못해서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문병도 불가능하다. 전화로 온유를 격려하였다. 퇴원하고 나면 맛있는 것 사주겠다고 했다. “온유야 돈가스, 피자 뭘 사줄까”, “담임목사님 저는 짜장면을 좋아해요. 짜장면 사주세요.”그래 짜장면을 사 주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퇴원한 소식을 집에서 전화로 전해 왔다. “목사님 저 온유인데요 집에 와서 된장국 한 그릇 다 먹었어요. 다음에 강화도 마니산 짜장면 사 주세요. 한 그릇 다 먹을 수 있어요.”“그래 곱빼기로 사 줄게.”“곱배기가 뭔데요.”“으응 곱빼기는 면을 갑절로 시켜 먹는 거야”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성도와 목회자 간에는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이런 저런 대화 가운데 마음이 오고 가는 것이다.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고 사랑이 느껴지고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귀히 여기며 주를 믿는 믿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그것이 있어야 한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교훈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수고와 사역자들의 수고와 다스림과 권면을 알아 주라는 것이다. ‘알아 주라’는 말은 ‘그 수고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고 존중하며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서로를 선하게 대하라.
신앙생활은 서로를 선하게 대하는 것이다. 누가 내게 악을 행할지라도 그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이렇게 갚으면 누구 눈이 남아나고 누구 치아가 남아나겠는가. 예수께서는 무한한 용서 끊임 없는 용서를 교훈해 주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만이 아니라 끊임 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도 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이다. 삼가서 누구든지 서로를 악으로 대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항상 선하게 대하라고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7-18절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다음 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12:19-20)고 하였다. 주님은 바울 사도를 통하여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교훈해 주셨다.
이러한 교훈은 세상에 나가서 행할 교훈이기도 하지만 특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다.
14절에, “모든 사람에게”라는 그 대상에 예외가 없다. 누구를 대하든지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몇가지의 예를 든다. 14절에 보면,
게으른 자들
마음이 약한 자들
힘이 없는 자들
이라고 하였다. “게으른 자들”이란 <새번역 성경>에 보면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우리가 오래도록 보던 <개역 한글>에는 “규모 없는 자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원래의 단어인 ‘아타크투스’(ατάχτους)는 ‘군대의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를 일컫는 용어이다. 지금은 베트남에 상주하는 이민석 형제가 군대에서 사복 헌병으로 늘 사회에서 탈영병을 색출해서 붙잡아 들이는 일을 주업으로 하였다고 들었다.
교회로 적용하면 “교회의 질서와 규율을 깨트리고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을 지목해서 언급한 말이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좋은 교회로 소문나고 본이 되는 교회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러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교회 안에 섞여 있었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실상을 익히 알 수 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살후3:6-7)
현대인의 성경으로 데살로니가 후서 3장 6-7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여러분은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우리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제멋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렇게 좋은 소문이 났던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도 제 멋대로 사는 교인들이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며 교회 곁을 배회하고 성도 곁을 넘석거리는 이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하였다. 물론 사랑을 품고 오래 참아 주어야 하지만 교회를 어지럽히고 질서를 깨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제 멋대로 대하는 이들을 조심하고 가까이 대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첫 편지에서 그러한 자들을 권계하라고 하였는데 나중 편지에서 “그러한 자들을 멀리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런 자들로 인한 교회와 성도들이 겪는 폐해가 심각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라고 하였다. ‘마음이 약한 자들’이란 ‘소심한 자들, 쉽게 낙담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언급의 근거는 그 당시 예수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에 대하여 불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에 보면 그런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4:13)
오늘날 나는 어떤 신앙인가. 지금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떤가. 나에게 과연 천국 신앙, 재림 신앙이 분명한가.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은 천국, 지옥은 무슨 지옥”그러면서 그냥 교회가 좋아서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예언한대로 환난과 핍박이 적지 않았다. 지난 주일 예배 때 대한 데살로니가 전서 1장 6절에 보면 “또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적지 않은 환난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더러 그런 믿음에 대하여 불분명한 상태로 마음이 약한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슬퍼한 것이다. 바울은 그런 저들에 대하여 “격려하라, 위로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라고 하였다. 여기서 힘이 없는 자들이란 몸이 병들어 힘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지탱할 만한 분명한 신앙의 의지가 불확실한 자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단과 사이비에 빠져 버리고 배교하는 이들이 있다.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 있었다.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3:5)라고 하였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과 시험과 욕망에 이끌려서 육체의 욕망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는 불쌍한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가정을 떠나기도 한다. 아내를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살전4:5)라고 편지에서 언급한 것이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가정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형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다.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오래 오래 참아 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누가 나에게 악하게 대할 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하였다. 여기 ‘따르라’는 단어는 ‘디오코’(διώκω)는 “사냥감을 추격하는 사냥꾼의 집요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선으로 악을 대하다가 쉽게 포기 하지 말고 주께 모든 상황을 맞기고 선으로 악을 대하여 이기라는 말씀이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336장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라.
그 유명한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그리고 이어서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일까.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살아가다 보면 기쁜 일도 더러 있기는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과 역경과 고통과 슬픔와 아픔을 견뎌 내며 살아야 하는가. 사도 바울 자신이 그러하지 않았나. 그가 복음을 이방 땅에 전하는 사도로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나.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걸까. “항상 기뻐하라”이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한 번 말하고 더 이상 하지 않은 말이 아니다. 바울은 편지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된 나는 과연 무엇을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 기뻐하여야 하나.
무슨 일에 대하여 기뻐해야 하나. 누구에 대하여 기뻐해야 하나. 더 궁극적인 질문을 해 보자면 “왜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나”의 문제이다.
고린도 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난에 대한 간증을 대하다 보면 바울에게 과연 기쁨이 있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3-30)
그렇지 않나.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기쁨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강조한다. “항상 기뻐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이다.
꼭 웃고 있어야만 기쁜 것은 아니다. 꼭 즐거워야만 기쁜 것도 아니다. 반드시 소유하고, 쌓아 놓고, 업적으로 이루고, 남들이 알아주어야만 기쁜 것도 아니다. 기쁨은 바람처럼 매 순간마다 스쳐 지나가는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그 순간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기도 가운데 감사하며 다시 또 기쁨의 이유와 그 근원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거의 대통령 당선이 분명해져 가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 예정자는 남다른 슬픔을 겪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조’라고 부르는데 조셉이다. 창세기의 요셉이다.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펜실베이니아의 화로 청소부요 중고 자동차 상에서 일하던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말더듬이로 자라나서 주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으며 컸다. 그의 어머니는 “네 앞서가는 생각을 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뿐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하며 키웠다. 법률대학원인 로스쿨 졸업 성적도 85명 중에서 76등이었다. 그래도 변호사 자격을 받았다. 24살에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는데 결혼 6년 만에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 사고 얼마전에 델라웨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아내가 죽고 어린 딸이 죽은 슬픔 속에 중상을 입은 두 어린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두 아들들을 간호하면서 울면서 상원 의원 선서를 하였다. 31살 때의 일이다. 고맙게도 잘 자라준 큰 아들은 델라웨어 주 대법원장이 되었다. 많은 주변 사람들은 큰 아들인 그가 아버지의 대를 이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5년 전인 지난 2015년에 큰 아들이 45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는 중에 아버지 조 바이든은 6선 상원 위원을 지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곁에서 8년간 부통령도 지냈다.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 다녀 갔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두 번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의 77년 역사는 슬픔과 충격과 아픔과 고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전히 그런 아픔과 슬픔을 딛고 80을 바라 보는 나이에 미국의 대통령직 수행을 향해서 한 걸음 씩 한 걸음씩 다가 가고 있다.
왜 항상 기뻐해야 하는가
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가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가
이 시간 각자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스스로에게 대답하여 보라.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울면서도 기뻐하고 슬퍼하면서도 기뻐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기쁨의 이유를 찾아 나서고 앞이 캄캄하여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을 때에라도 여전히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또 감사의 이유, 감사의 조건, 감사의 분량을 찾아 보고 감사해야만 한다. 감사하며 살아남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계신 것이니 말이다.
답답한 올 한해, 여전히 답답한 이 계절,
기쁨의 이유
기도할 이유
감사할 이유를 세세하게 찾아서
여전히 기뻐하고,
그래서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서로를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고
화목하게 살며
서로를 잘 참아 주고
항상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