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26) 2021. 5. 23 성령강림주일
소위 임관하고 광주 보병학교 4개월 훈련 후에 제 1사단 15연대 3대대 1소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문산에서 임진강을 건너 판문점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휴전선을 맡아 GOP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중대장과 함께 몇몇 병사들과 휴전선 안에 지뢰 제거 현장에 투입된 적이 있다. 어떻게 그날 일과를 마치고 휴전선 게이트 밖으로 철수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핑 돌고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설 정도이다.
여차하면 발목이 날아갈 수도 있고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일상이 그렇게 진지하고 두렵고 겸손하고 떨리는 마음 가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욕, 육체의 일을 따라 살아가면 필경은 망하고 죽고 말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교훈하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은 너무나 명쾌하고 분명하다.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한 것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으로 인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신자로 신자답게 하는 힘도 성령이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우마차는 소나 말이 마차를 끄는 힘이다. 경유 자동차는 경유, 휴발유 자동차는 휴발유가 원료이다. 요즘 전기 자동차, 혹은 수소 자동차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경유, 휴발유, 전기, 수소 그 모든 것이 자동차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인 것이다.
수천명의 군인들이 몇 달씩 바다 위에서 머무는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의 연료는 핵 에너지이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만 그 권능에 의해서 삶의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이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엔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 ~ 1917)의 <성령님의 임재연습>이란 참 좋은 책이 있다. 그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영성가요 성자의 칭호를 받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목사의 아들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에 유학하고 목사가 된 그는 선교를 교회의 제 일 목적으로 여기며 목회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을 심도있게 하는 성령 중심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실천하고 성도들에게 강조하였다. 그는 경건생활과 기도, 복지, 교육 등에 균형 있는 사역을 평생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20여 권의 경건서적을 저술하였다. 우리나라에만도 15권 이상의 책들이 소개 되어 있다. 그의 책, <성령님의 임재 연습>에 보면, “하나님, 죄, 그리스도, 복종, 성령, 믿음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하여 너무나 분명하고 명쾌한 묵상과 교훈을 주고 있다. 그야말로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몰라서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대표적인 바리새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 성에 살면서 예수 믿는 이들을 색출해서 처단하려고 찾아가던 중에 그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사흘 동안 앞을 못 보았다. 다메섹 성의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안수 기도를 받았을 때에 눈의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순간에 바울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였다. 그날 그 순간 이후 사도 바울을 평생토록 예수의 부활 복음을 증거하는 이방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사도행전 9장은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로 변화되는 순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내용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냐 아니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냐”의 두 구분으로 나눈다. 17절의 내용은 이를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 보면 그 내용이 더욱 명확하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 그러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내용을 먼저 차근 차근 살펴 볼 이유가 있다.
육체의 소욕.
17절의 ‘육체의 소욕’이란 ‘육체의 욕망’이란 뜻이다. 16절에서는 ‘육체의 욕심’이라고 했다. ‘육체의 소욕’ 즉 ‘육체의 욕망’ 가운데 사는 사람은 성령의 요구를 거스르며 살아간다.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다스림은 서로 대립된다. 사람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육체의 욕망 가운데 사는 사람의 ‘육체의 일’이란 어떤 것들일까. 19절의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라는 교훈의 ‘분명하다’는 헬라어‘파네라’(φανερὰ)라는 말은 ‘눈에 띄게 명백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육체의 분명한 욕망을 15가지로 자세하게 구분하여 차근차근 교훈해 주고 있다.
앞부분의 세 가지 내용은 모두 성적 범죄에 관한 것들이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이라고 하였다. ‘음행’이란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성적 부도덕한 상태를 말한다. ‘더러운 것’이란 좀 더 광범위한 면에서 행동이든 마음의 생각이든 성에 대한 모든 범죄를 통틀어 하는 말이다. ‘호색’이란 이런 여러 가지 성적 범죄를 행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타락한 모습을 말한다.
다음은 영적인 내용들이다. “우상 숭배와 주술”이라고 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는 바이다. 지난 주중에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 관한 말씀을 새벽 묵상으로 나누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길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에게 절하거나 섬기는 것을 계명으로 금하셨다. 그런데 인류의 긴긴 역사는 대대로 우상을 숭배해 왔다. 심지어는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의 형 아론을 앞장세워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하면서 그 송아지를 하나님처럼 숭배하였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도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신앙에서 벗어나서 수 없이 반복적으로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의 죄악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도 그랬겠으나 오늘날은 자식이 우상이다. SKY대학 보내는 꿈이 우상이다. 돈이 우상이다. 재물 마련이 우상이다. 넓은 아파트 장만하는 것이 우상이다. 강남의 아파트는 한 평당 1억도 넘는 곳이 허다하다. 월급으로 생활하는 이들은 평생을 쓰지 않고 벌어 모아도 아파트 한 채 장만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외모가 우상이다. 미모가 우상이다.
TV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얼마나 눈과 코와 피부와 턱 모양과 광대뼈를 고치고 고쳤는지 남자나 여자나 그 얼굴이 그 얼굴 같다. 건강관리가 우상이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이 우상이다. 육체가 우상이다. 보여지는 것이 우상이다. 탐심이 우상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분명한 육체의 욕심으로 인한 일 중의 하나가 우상 숭배이다.
또한 ‘주술’(呪術)이다. 주술하는 이들은 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각양 마술과 술책을 동원한다. ‘주술’이란 헬라어 ‘파르마케이아’의 뜻은 ‘약을 제조한다’는 의미이다. 내 몸이 중한 병에 걸리고 나면 누가 “이런 약이 좋다더라, 그 약이 잘 듣는다더라, 누가 그 약으로 나았다더라”하는 소문을 들으면 귀가 여려진다. 돈을 싸 들고 가서 억만금을 주고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어한다.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심리를 악용하는 것이 ‘주술’하는 이들의 특징이다. ‘주술’이란 몸이 약하고 마음이 약한 이들을 현혹해서 병은 고치기는커녕 재산을 날리고 병도 못 고치고 몸과 마음만 점점 피폐하게 만드는 일체의 종교적 일탈 행위를 일컫는 것이다.
그 다음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하는 대인관계를 파괴하는 죄와 악에 관한 내용들이다. ‘원수 맺는 것’이란 여러 사람이나 집단 혹은 민족이나 계층 간에 서로 적대감을 갖고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행동을 일컫는다. 그 대표적인 역사의 사건이 독일의 히틀러가 앞장서서 유대인을 600만명 이상 학살한 사건이다. 사료에 찾아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던 켈트족의 호전적인 기질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오늘날 지구촌에 여전한 불씨로 남아 있는 인종 갈등, 아시안 혐오, 외모와 피부색에 의한 인종 차별 등이 ‘원수를 맺고 분쟁’하는 저변에 폭탄의 뇌관처럼 항상 위험한 요인으로 도사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이다. ‘분쟁’(忿爭)이란 그 앞에 나오는 ‘원수를 맺는 것’의 결과로 ‘다툼’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 사이에서는 할례에 대한 해석으로 인해서 분쟁이 계속되었다. 갈라디아 2장의 교훈이 그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시기(猜忌)’는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일어나는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시기의 상태가 절정에 달하면 ‘분’을 내게 된다. 분을 낸다는 것은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화를 내는 것’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렇지 않나.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주변의 요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 속에 다스려지지 않는 다툼과 시기심이 쌓여서 화산이 폭발하듯이 화를 내는 상태를 말한다.
이번 인천의 노래방 주인이 손님을 죽인 살인, 시체 유기 사건을 보라. 범인으로 붙잡힌 노래방 주인 34살 허민우는 인천의 폭력배 조직인 꼴망파의 일당이다. 집행 유예 기간 중에 주점인 노래 방을 운영하다가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 지난 4월 22일 새벽 2시경에 40대 손님과 술값 시비를 벌이던 중에 손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심하게 해서 죽게 하였다. 죽은 시체를 노래방 빈방에 숨겨 두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가까운 마트에서 락스 14리터, 75리터 대형 쓰레기 봉투 10장, 테이프 2개를 구입했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시체를 훼손한 후에 인천의 무의도 등 이곳 저곳에 싣고 다니다가 부평의 철마산 중턱의 으슥한 풀숲에 버렸다.
왜 이렇게 자세하게 말하냐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소욕, 육체의 욕망으로 인한 분명하게 드러나는 육체의 일이란 것이 21절에서 말씀하는 술에 취하는 상태와 더불어 다투고 원수 맺고 시기하고 화내고 하는 상태로 이어지는 육체의 악인 것을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극악한 범죄로 이어지는 공식과 같은 죄와 악의 뿌리가 있다.
그렇지 않나.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고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에 빠지겠는가. ‘당 짓는 것’이란 ‘삯꾼’이란 표현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어느 당파에든지 가담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에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강한 결속을 이루며 대표적으로 당을 짓던 이들이 ‘바리새파’사람들이었다. 그 뒤에 ‘분열(分裂)함’이란 당을 짓는 행동에 따른 결과를 말한다. 자기의 당파 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분열과 분쟁도 불사하는 호전적인 태도를 말한다. 그 뒤에 나오는 ‘이단’(異端)이란 말은 우리가 아는 정통 교리에 반대하는 특정 종교 집단과는 다른 의미이다. 자기들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분쟁과 다툼을 일삼는 자들을 사도 바울은 ‘이단’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웃하고 있는 동족이 북한이다. 북한 공산당이 자기의 체제를 말하는 공식 명칭은‘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그 용어와 표현이 그럴싸하지 않나. 그러나 그런 삼대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분열과 다툼과 분쟁이라도 불사하려는 집단이 북한이 아닌가.
사도 바울이 이렇게 신랄하게 육체의 소욕에 대하여 언급하고 육체의 분명한 일에 대하여 꼼꼼히 짚어 가며 교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당시 갈라디아 지방이 그런 곳이었고 갈라디아 지방에 세워진 교회와 성도들 간에 그런 심각한 문제들이 교회 안에까지 파고들어 와 있었다.
마지막 교훈이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앞에 소개된 ‘시기’가 남을 질시하여 멀리하는 성향이라면 ‘투기’(妬忌)는 남이 갖고 있는 소유나 지위를 빼앗으려는 악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마음의 동기기 투기심이었다. 그 뒤에 나오는 ‘술취함’이란 과음 혹은 폭음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나 세상의 모든 더러운 타락과 방종과 음행과 호색과 싸움과 다툼과 화를 내는 일들이 술 취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잠언 23장 29절부터 보면 술 취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재앙, 근심, 분쟁, 원망, 까닭 없는 상처, 붉은 눈이 뉘게 있느냐”라고 질문하며 술에 취한 자의 심각한 상태를 지적한 잠언 기자는 그 마지막 절인 35절에서 술에 취한 사람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고 경고하였다. 술에 취하는 자들은 그 술이 자신을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이고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보면 투기와 술취함은 ‘방탕함’으로 이어진다. ‘코모스’라는 이 표현은 “술에 취해서 마구 떠들고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21절 끝에 보면 사도 바울은“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
자, 그러면 도대체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사람, 육체의 분명한 일을 멀리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그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라고 명쾌하게 교훈하여 주고 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아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하였다. 그다음 절에서 하신 말씀이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고 하셨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맺히는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랑, 희락(喜樂), 화평(和平) - 대신결실(對神結實)
오래참음, 자비(慈悲), 양선(良善) - 대인결실(對人結實)
충성(忠誠), 온유(溫柔), 절제(節制) - 대아결실(對我結實)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고 섬기고 따르며 살아가면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희락 즉 기쁨과 화평(love, joy, peace)이 샘솟는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물론 지구촌의 열방 백성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려면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위협이 계속되는 것은 사실이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을 찾아 가셨다. 밤새 물고기 잡으려던 일곱 명의 제자들을 찾아 가신 것이다. 한 마리도 못 잡은 저들에게 명하셔서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갈릴리 해변에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구워 제자들로 하여금 배불리 조반을 먹게 하셨다. 그 때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렇게 시작해서 세 번이나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받아 내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의 분부이셨다. 사랑이 대답이다. 사랑이 전부이다. 사랑이면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성도라면 사랑과 희락 즉 기쁨과 화평 이 세 가지가 하나로 같이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희락(喜樂)이란 기쁨인데 그 기쁨이란 것도 그냥 기쁜 일이 있어서 기쁜 그런 정도의 기쁨이 아니라 내 안에 샘 솟는 기쁨이 가능하려면 “JOY”의 머리말을 따라 의미를 부여한,
J-Jesus First
O-Other Second
Y-You Third
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나와 주변 사람과의 사이에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가 “오래참음, 자비, 양선”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상대방에 대하여 오래 참아 주는 인내심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나. 오래 참음이란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함께 따라 오는 성령 안에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에게 맺히는 열매임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교훈이 바로 그러하지 않나. 자비와 양선도 그러하다. 양선이란 착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착해야 하다. 양선이 성령의 열매이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매이다. 자신에게 충성스러워야 한다. 온유는 예수의 성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절제가 성령의 열매이다. 자기 다스림이 없으면 그 누구든지 육체의 욕심에 빠져 타락하고 죄를 범하고 말 것이다.
십자가 신앙.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의 신앙을 십자가 신앙으로 교훈하였다.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아는 갈라디아 2장 20절 말씀의 교훈이 이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결혼을 약속하고 달콤한 연애를 하면서 연인은 행복한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었다. 남자는 결혼을 위해 제법 큰 아파트를 준비했고 여자는 새 아파트에 맞는 세간을 알아보고 다녔다.
그렇게 희망이 부풀어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아버지인 예비 장인이 경영하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서 회사의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여자의 아버지가 쓰려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자의 집이 가세가 기울고 있었다.
그래도 결혼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결혼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남자는 여자의 손을 꼭 잡고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 내 마음 알지,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라며, 그때 보여 주었던 그 아파트는 사실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해 놓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 또한 새 아파트에 가져갈 혼수품을 살 수 없는 형편이라 걱정하고 있었기에 그 말에 그렇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 연인은 그렇게 결혼을 했고 어렵게 단칸방에서 달콤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메달 내어 놓는 남편의 월급이 결혼 전에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너무 작았다. 그래도 아내는 신혼 맛에 기쁘게 살림을 했다. 친정아버지도 건강을 되찾아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사업도 제법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친정집이 어려울 때는 그저 있는 것에 감사하고 살았는데 친정집 형편이 좋아지면서 자기의 모습이 왜 그리 초라해지는지, 결혼하기 전에 아파트를 보여주면서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해 주겠다던 남편의 말이 모두 상처로 되살아났다.
그렇게 사랑스럽던 신랑이 매사가 미워졌다. 결국 여자는 그 속상한 마음에 무능한 남자와 해어져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친정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이야기하는 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있던 친정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정어머니는 딸의 눈물을 닦아주며, 딸에게 그동안 숨겨놓았던 비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은 김 서방이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털어놓아야겠구나.”
남자는 혼수용품을 해올 형편이 못 되는 신부의 마음이 상할까봐 자기 아파트를 팔아 여자 아버지의 빚 갚는데 보태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밀로 하라는 것은 혹시 네가 기죽어 살까 봐서 그랬단다.”
그리고 사위는 월급의 적지 않은 돈을 매달 장인의 병원비로 썼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의 눈에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뜨거운 사랑과 감동의 눈물이었다. 가슴이 사무치도록 밀려오는 사랑을 느끼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인가. 우리가 성령으로 사는 성도라면 성령으로 행하여야 한다. 더 이상 육체의 욕망에 갇혀서 헛된 영광을 구하면 안된다.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 받은 성도는 성령의 열매로 대답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만 한다. 나무는 열매로 말하는 것이다. 올해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