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신 갑주(엡6:10-20) 2021. 8. 22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에베소서의 말씀을 계속하여 묵상하여 왔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교훈 즉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무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맞다. 적에게 지지 않도록 완전무장하라는 교훈이다.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는데 그 쉬운 뜻을 <공동번역성경> 에서 보면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은 엄마의 태 중에 잉태되는 과정으로부터 모든 것이 경쟁이요 씨름이요 싸움이다. 이겨야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과거에나 오늘날이나 인간의 싸움은 계속된다.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끊임이 없다. 세계 제 1, 2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평화를 위한 UN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오늘날도 지구촌의 그 어딘가에서는 끊임이 없는 싸움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탈레반에게 점령당하고 권력을 빼앗긴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라. 스스로를 지킬 힘이 무너지면 싸움에서 지고, 전쟁에서 지게 마련이다.
이는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기업과 기업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에베소교회가 세워진 도시 에베소는 사도 바울 당시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거대한 항구도시였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그곳은 정치, 경제, 무역, 외교, 문화, 군사 등등 모든 면에서 그 이상의 도시가 없다고 할 정도로 왕성한 도시였다. 에베소 도시는 주전 1,000여년 전에 아테네 왕의 왕자 안드로쿨루스와 이오니아인들에 의해서 건설된 헬라권 최대의 도시였다. 저들은 ‘아데미’라는 여신을 숭배하였다. 오늘날의 터어키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에베소에 있는 ‘아르데미손’이라고 불리우는 아데미 신전은 그 규모나 건축 양식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신전의 길이가 100미터, 폭이 54미터이다. 거대한 17미터 높이의 대리석 기둥이 100개가 버티고 있었다. 신전의 뜰에는 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 규모는 로마에 있는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광장보다 2. 3배나 큰 규모였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하여 에베소 시민들 중에 폭동이 일어났다. 폭도로 변한 시민들이 큰 연극장으로 몰려들어 갔다. 피온산 골짜기에 있는 그 극장은 약 25,000명을 수용할 정도의 거대한 규모였다. 건물의 길이만 150여 미터에 이르렀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 안에 있다. 옥중에서 편지한 바울은 이제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면서‘끝으로’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심정과 영혼 사랑에 대한 열정을 갖고 권면한 여러 가지 내용의 편지 중에서 지금 바울은 무슨 교훈을 더 쓰고 싶어서 ‘끝으로’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를 상대하여 싸우나.
<현대인의 성경>으로 10-12절을 읽으면 내용 전달이 훨씬 쉽다.
“끝으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십시오. 마귀의 계략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무장하십시오. 우리는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왜 성도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져야 하는가.
왜 성도는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해야 하는가.
성도는 사람을 상대로 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언제나 마귀의 계략에 맞서서 싸우는 것이다.
성도는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맞다. 성도의 싸움이란 세상 사람, 내 주변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언제나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다. 영적 싸움이란 결국은 내 안에서 끊임이 없이 일어나는 육체의 욕망과 관련이 깊다. 성도의 싸움의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성도는 내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는 사탄 마귀와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다. 12절에서 말씀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란 타락한 천사나 악한 영 즉 사탄을 의미한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란 사탄 즉 마귀를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사는 세상을 이 땅으로, 마귀가 존재하는 곳을 두 번째 하늘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세 번째 하늘로 구분하였다.
2000년 전의 에베소는 인구 25만 명 이상이 살던 큰 도시였다. 그러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여유로운 이들도 많았다. 따라서 술과 도박과 음란과 온갖 방탕한 놀이 문화가 넘쳐 났다. 그런 세속적인 도시 환경에서 교회가 탄생하고 믿는 자들이 생겨났으나 교회 안에도 문제는 심각하였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사도 바울이 2년 반 정도 에베소에 머물며 교회의 탄생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사도행전 18장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울의 제 1, 2, 3차 전도 여행 기간 중에 가장 오래도록 머물며 선교의 정열을 다 하였던 도시가 바로 에베소이다. 에베소 교회는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거대한 항구도시에 세워진 교회 안에 이러 저러한 문제들로 가득하였다. 거짓말하고, 서로 비방하고, 다투고, 싸우고, 떠들고, 분노를 품고, 파당을 짓고, 술에 취하고, 도둑질하고, 음란한 일들이 여전하였다.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사탄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교회다운 교회, 성도 다운 성도, 믿음 다운 참믿음을 지켜 가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해서 이런 편지를 쓴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를 예로 들며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교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탄이 나라를 허물기 전에 가정을 허문다. 가정이 병들고, 부부 사이를 갈라놓고, 가족 사이에 불화하고, 가정에 행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나라도 병들고 국가도 약해진다. 911테러 사건 이후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있던 탈레반을 내어 쫓고 새 정부가 들어서게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스스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자 이번에 미군의 철수와 함께 다시 탈레반에게 정권을 내어 주고 말았다. 힘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선량한 백성들만 고난을 겪게 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초고속 고령화 국가이다. 게다가 출산율 최저 국가이다. 최근에 발표된 감사원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이 상태로 100년이 가면 우리나라의 인구는 지금의 5,000만명에서 1,500만명으로 줄어든다. 서울 인구는 지금의 1,000만명에서 260만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100년 후에는 인구의 절반이 65세 이상이 살아가는 최고령화 국가가 될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나라는 연애, 결혼, 자녀 출산 등을 포기하고 청년들이 남자나 여자나 혼자 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하여도 자녀 출산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든다. 지하철 역 주변마다 완룸 아파트가 하늘을 찌른다. 모든 분야가 혼자 사는 이들을 상대로 상업도 발전한다. 농어촌에는 빈 집 투성이다. 그래도 주인은 있으니 흉물스러운 폐가를 행정적으로 어떻게 손볼 수도 없다. 마을 안에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지 오래다. 그 넓은 운동장과 좋은 시설의 시골 초등학교가 텅텅 비어 간다. 한때는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 오후로 수업을 나누어 하던 학교가 텅 비어 있다. 이는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이다. 결혼을 포기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한 명 이상 아기를 낳으려 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들끼리 맞벌이하며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지금 이슬람 국가, 이슬람 가정들은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슬람 인구는 급 팽창하고 있다. 자녀들도 엄청나게 많이 낳는다. 반대로 기독교 국가, 기독교 가정에서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마귀가 기뻐하고, 사탄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들면 안된다. 벌어야지, 출세해야지, 성공해야지, 유명해져야지 하면서 에베소 시민들이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듯이 오늘날은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그러면서 돈돈돈돈하며 살다가 돌아버린 사람, 돌아 버린 가정이 한 둘이 아니다. 물론 좋다. 돈이 필요하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니다.
엊그제 금요 기도회에 다녀 간 우상용 전도사는 20대 중반에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 대학 복학을 꿈도 못 꾸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청계천에서 짐 자전거 타고 짐 날라다 주던 청년이 창업해서 오늘날 거대한 중소기업의 경영자가 되었다. 구파발 역 앞 앵봉산 자락의 가난한 서울 변두리 판자촌에 살던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딴딴한 기독교 기업가가 되었다. 주변에 성공한 기업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는 그냥 성공하고, 그냥 돈 많이 벌고, 그냥 기업 부채 제로의 성공한 사업가 정도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기업가로 살아왔다. 그가 야간에 신학을 공부하고 개척교회 전도사로 목사가 되길 원하는 목표는 분명하였다.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상대방들을 한 사람씩 복음으로 양육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가고 싶은 불붙는 열망이 있었다. 그는 사옥에 한 층 전체를 예배당으로 꾸몄다. ‘행하는 교회’라는 교회 이름을 지은 것도 말만 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생각과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싶은 분명한 신앙 고백을 교회 이름에 담았다.
그는 나 하나 잘 벌고, 사업 성공하고, 출세하고, 경제력 있게 기반 잡아서 나 한 사람 혹은 내 가족 몇 사람 잘 먹고 잘 입고 세상 즐거움을 누리며 살겠다는 그런 수준의 꿈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한 신앙의 푯대가 있었다. 그래서 그를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 신학교 가고, 다 목회자 되고, 다 선교사 될 수는 없지만 직장과 기업과 경영과 상업의 현장에서 이런 선교적인 마음가짐, 이런 전도의 열정, 이런 구령의 확신을 갖고 주변 사람을 대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는 한 명뿐인 아들에게도 그런 분명한 신앙을 심어 주었다. 한 달 전에 결혼한 아들 부부가 그런 신앙으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중소기업을 경영을 승계하며 아버지가 걸어가는 길처럼 기업 선교, 직장 선교를 위하여 대를 이어 기독교 기업을 이루어 가고자 하는 분명한 꿈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지금 내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의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인가 아니면 그렇지 아니한가 하고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살아가려면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 가야 한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여야 한다.
내 안에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사탄 마귀의 유혹을 떨쳐 내고 이겨 내야 한다. 그것이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길이다.”
최근에 탈레반에게 다시 주권을 빼앗긴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라. 수도 카불에 있던 다만 가니 대통령은 1억 6,9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000억 정도의 돈을 챙겨가지고 아랍에미리트(UAE)로 도망가 버렸다. 차량 4대에 달러를 싣고 도망치던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도망갔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난민 행렬을 보라.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겪는 참담한 실상을 보라. 사람의 목숨을 벌레 죽이듯이 총으로 쏘아 죽이는 악랄한 살인의 현장을 보라. 악의 영이 한 나라를 장악한 증거가 분명하다.
악의 영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나라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개인도 망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사람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끊임이 없이 일어나는 악의 영과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최후 승리를 얻으며 의의 면류관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전신 갑주가 무엇인가.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하였다. 완전무장(完全武裝)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악한 날에 능히 악의 영들을 능히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그러므로 악한 날에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고 모든 일을 완성한 후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무장하십시오.”이다.
그렇지 않나. 6. 25때에 우리나라 군대가 유엔군과 미국 군대의 도움을 받아 북한 인민군과 싸우고 중공군과 싸우던 그 당시에 능히 싸워 이길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3. 8선으로 분단된 상태로 68년째 이어 오며 김정은과 김여정에게 이처럼 조롱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권면은 분명하다.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싸워 악의 영 즉 사탄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완전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무장이 전쟁 준비의 전부는 아니다. 싸워 이기기 위한 준비일뿐이다. 완전무장을 하였어도 블레셋의 골리앗처럼 교만하고 어리석게 처신하면 다윗이 던진 한 개의 물맷돌을 맞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전신 갑주 완전무장을 하였더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전신갑주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대 로마의 군사 무장을 비유로 교훈하였다. 그림을 보며 설명을 나누자.
진리(眞理)의 허리띠
의(義)의 호심경
평안(平安)의 복음이 준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救援)의 투구
성령(聖靈)의 검
이것들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 다 소중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읽자.
“여러분은 굳게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가슴받이를 붙이고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할 태세로 신발을 신고
이 모든 것 외에
마귀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님의 칼을 가지십시오.”
요즘 우리나라 육해공군이 전쟁이 없는 시대에 사니까 군대가 타락하고 병들고 각양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빠져서 처처에서 부끄러운 소식들이 계속하여 들려 오고 있다. 최근에는 사단장이 부끄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보직해임되기도 하였다. 왜 그런가. 중국 역사에 보면 만리장성을 쌓았어도 적군과 내통한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주어서 외침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각 사람이 내 안에서 나를 병들게 하고 나를 무너지게 하고 나를 타락하게 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아무리 겉으로 완전무장을 완벽하게 한 것 같아도 그 병사 한 사람의 마음 가짐과 태도가 올바르지 못하면 그 병사는 싸움에서 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결코 허리띠나 호심경 즉 가슴받이나 신발이나 방패나 투구의 문제를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거기에 하나 더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앞의 다섯 가지 덕목들이 하나하나 다 ‘하나님의 말씀’ 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직분, 직임, 경력, 신앙생활의 길이가 나를 대변하는 것 아니다. 예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경고하셨다. “거짓을 이기는 진리, 불의를 이기는 정의, 불화와 다툼과 미움과 시기를 이기는 평화, 의심을 이기는 믿음, 영적 미혹과 타락을 뛰어 넘는 구원”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셨다. 사십일 째 되는 날 마귀가 와서 예수를 시험하였다. 예수는 그 세가지 시험을 차례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어느 나라나 대개 그러하지만 우리나라도 법을 공부한 이들이 입법, 사법, 행정부를 도맡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도 거의 다 사법고시 출신들이다. 얼마나 긴 세월 법을 공부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잘 아는 법을 가지고 나라를 점점 헌법에서 멀어져 가는 이상한 나라, 저들이 즐겨 쓰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나.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각 사람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곡해하면 안 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하였다. 진리가 무엇이고 자유함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 진리를 깨닫고 믿고 따를 때에 그 진리가 우리의 삶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받은 자녀의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분명한 성도라면 그 영원한 진리의 가치는 이 세상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인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나.
말씀과 기도는 성도의 믿음을 지켜 가는 두 기둥과 같다. 18-19절에 보면 성도가 왜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다. 호흡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한다. 그래도 호흡이 소생되지 않으면 죽고 마는 것이다. 교회는 다니는데 기도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산자의 믿음, 산자의 신앙생활 모습이 아니다. 살았다 하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호흡은 선택이 아니다. 잠이 든 시간에도 호흡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섭취하지 않고 영의 호흡인 기도 생활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나는 영적으로 살았다는 모양만 있을 뿐 실상은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18-19절 말씀을 주목하여야 한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성령님 안에서 항상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며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또 내가 입을 열 때마다 나에게 말씀을 주셔서 기쁜 소식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의 기도에 관한 권면은 구체적이다.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라.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라.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끊임이 없이 기도하라.
나, 바울이 입을 열 때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기쁜 소식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권면은 이방인들이 우상 앞에 중언부언 빌듯이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말씀이다. ‘항상’이란 것은 ‘ἐν παντὶ καιρῷ’(엔 판티 카이로) 즉‘모든 경우에’라는 말씀이다.
개인, 가정, 가족, 교회, 성도, 목회자, 국가, 민족을 위하여 쉬지 말고 끊임이 없이 항상 기도하여야만 할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는 선선해졌다. 밤 기온은 뚝 떨어졌다. 창문을 열고 자기에 서늘할 정도이다. 변이종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코로나의 위협이 여전하지만 오곡백과가 결실하는 계절,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다.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 말씀과 기도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