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있는 사람(엡5:15-20) 2021. 8. 15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핵심 군사 시설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다음 해 초여름인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해전까지 연전연승을 거뒀다. 필리핀ㆍ인도네시아ㆍ말레이시아ㆍ미얀마부터 중국 일부까지 851만㎢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였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꿈꿨다. 미국 본토라도 삼킬 기세였다. 그러나 1945년 2월에 미군은 필리핀을 탈환하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돼 즉시 7만 명이 죽고 7만 명이 부상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원자 폭탄으로 4만 명이 죽고 4만 명이 부상했다. 그 하루 전날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드디어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천황의 지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국은 이 조건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일부 장교단이 항복을 거부하며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히로히토(Hirohito , 裕仁)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이 남았지만 아무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장관이 악역을 떠맡았다. 그는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외교관이었다. 마침내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시게미쓰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태평양전쟁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요즘 사사기에서 전쟁의 승리와 패배가 어떻게 찾아 오는 지를 보고 또 보고 있다. 우리 역사에 찾아 온 일본의 패전과 우리 나라가 맞은 해방 즉 광복의 날은 하나님이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시편 126편 1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런 감격의 순간을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노래하였다.
우여곡절 많은 역사를 뒤로 하고 발전해 온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들이 계속되기를 간구한다.
데일 카네기는 “세상에는 많은 능력이 존재하지만 사람을 사귀고 친구로 지내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라고 말하였다. 데일 카네기(Dale B. Carnegie, 1888~1955)는 미국의 작가이며 전문 강사이다. 미국 미주리주 매리빌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미주리주 중부 주립대학교(Central Missouri State University)를 졸업한 뒤 네브래스카에서 교사, 세일즈맨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24살 때인 1912년에 YMCA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 및 연설 기술’을 강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데일카네기코스'라는 강좌가 개설되었다. 교육은 참가자의 실천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후에 데일 카네기는 이라는 이름의 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현재는 전세계 90개국에 <데일 카네기 프랜차이즈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요즘이야 인간 관계를 주제로 한 책도 많고 강연도 많고 명 강사도 많지만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데일 카네기는 “인간 관계론”에 대한 연구와 실제의 대가라고 하여도 결코 손색이 없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의 책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은 그 계통의 고전과 같은 책으로 그의 책을 능가하는 또 다른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도록 널리 읽히고 사랑 받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전혀 읽어 본 적이 없다면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읽어 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많은 다양한 내용과 교훈을 접하게 된다. 그는 책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최근 나는 뉴욕에서 열린 한 저녁 모임에 참석했다. 손님 중에는 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모피 코트와 다이아몬드, 진주 등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얼굴은 심술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 즉 여인의 표정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나 패물보다 백배는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우스갯소리지만, 이 말은 여러분의 아내가 모피 코트를 사달라고 할 때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도 바울은 그 동안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원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소상하게 교훈하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떤 태도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시 언급하고 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15절 말씀을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너희가 어떻게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지를 주의 깊게 살피라”는 교훈이다. 자, 그러면 이 세상을 어리석거나 미련하게 살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길이란 무엇일까.
세월을 아끼라.
16절에서 말씀하는 ‘세월’이란 헬라어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말한다. 헬라인은 시간을 ‘크로노스’(Κρόνος)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크로노스’의 시간이라 하루 하루 물이 흘러가듯이 지나가는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이란 “ 기회 혹은 적절한 때”를 의미하는 특별한 시간 개념이다. 그러므로 카이로스의 시간은 “종말론적 시간이요 특정한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오늘이 76년 전에 일본이 압제에서 해방된 기념일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36년간의 일제로부터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이처럼 1919년 3. 1 독립운동, 1945년 8. 15 광복절, 1950년 6.25 전쟁, 1960년 4. 19 의거, 1961년 5. 16 혁명, 1980년 5. 18 광주 항쟁 이런 날들과 시간들은 웬만한 대한민국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건의 내용을 잘 안다. 우리는 이런 날들과 이런 역사적인 순간들을 떠 올리면 그 날의 사건이 교훈하는 바를 깨달아 알게 된다. 이처럼 그 날의 그 사건의 교훈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하고 역사의식을 새롭게 하게 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명감에 불타 오르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내용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물처럼 빨리 흘러가니 시간과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라.”하는 정도의 간단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 본문을“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라고 번역하였다. 영어 성경인 NIV에 보니까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KJV에 보니까“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라고 하였다.
그렇다. 마치도 이 땅에서 살다가 간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인류 구원의 역사 그 이상의 업적을 이룩한 인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그 희생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대속(代贖)의 역사를 이룩하였다. 그 하신 일이 ‘속량’(贖良)이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4장 5절에 보면 ‘속량’(贖良)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영어, 불어, 독일어, 한자, 한글과 같은 문자의 발명, 전기의 발명, 전화기의 발명, 자동차의 발명, 비행기의 발명, 컴퓨터의 발명, 핸드폰의 발명, AI 인공지능의 발명 등 이 모든 것들이 흘러 가는 세월 중에 이룩한 놀라운 업적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죄 사함의 은혜, 속량의 은총, 대속의 사랑, 속죄의 감격이란 그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 아닌가. 인류가 역사 중에 불을 사용하게 된 일이나 중세에 신 대륙을 발견하였거나 달나라에 사람이 다녀온 일이 대단한 일 중의 하나이다. 그 어떤 신약을 발명하거나 그 어떤 뛰어난 의술을 발명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요즘처럼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온 지구촌의 인류가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데 그나마 백신이 개발되어 백신 투약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감사할 일이며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여 보라. 한 두 사람의 며칠 동안 쉽게 연구한 결과로 코로나 백신 개발이 이룩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들과 연구진들이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연구를 계속하던 중에 얻어낸 값진 결과가 아닌가. 그렇지 않나. 인류 역사에 14세기에 창궐했던 흑사병이나 100년 전에 전 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던 스페인 독감 같은 경우에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발 빠른 백신 연구를 통해서 대처할만한 의학 연구의 업적이 없던 때이다.
사도 바울이 교훈하는 “세월을 아끼라”는 교훈은 “때가 악하니라”는 말씀과 함께 묵상해야 맞다. 세상이 악하다. 그렇지 않나. 세상은 언제나 악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던 그 순간부터 그랬다.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일 때부터 악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닮아 살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더 이상 악을 행하려 하거나 죄를 가까이 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의 비유 말씀처럼 “올 해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었으니 창고를 늘리자. 쌓아 두고 즐기자. 앞으로 몇 해 동안 농사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지낼 수 있겠다.” 하는 것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된다. 누가복음 12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의 내용이다. 그 시작은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질문으로부터였다. 예수는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라는 말씀과 더불어 이러한 비유로 교훈해 주셨다. 예수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는 말씀으로 이 비유의 내용을 마무리 하셨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자는 시간과 재물과 경험과 능력과 여건과 관심과 실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올해도 벌써 8월 중순이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찾아 올 것이다. 어린이나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은 어서 시간이 좀 가고, 어서 세월이 좀 갔으면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좀 들고 연세가 좀 든 이들은 “참으로 세월이 빠르게 흘러가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나는 나에게 남아 있는 이 세상의 기대 수명이 얼마쯤 남아 있으면 좋겠는가”라고 말이다. “10년인가, 30년인가, 50년인가, 70년인가,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인가”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참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과 세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시고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하며 살다가 주께서 나를 오라 하시면 당황해 하지 말고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 천국 백성다운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전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15절의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라”는 교훈보다 훨씬 더 강조하는 말씀이다. 즉 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고 미련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둔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터넷 뉴스를 접한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미담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소식들이 훨씬 더 많다.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속이 상하게 하고, 화가 나게 하고, 실망스럽게 하고, 더불어 민망하고 부끄럽게 하고, 죄스럽게 하는 사고와 사건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지 않나. 부부간에 혹은 부모 자식 사이에, 친척 간에,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또래 사이에 등등 차마 입에 담거나 말로 설명하기에도 안타깝고 너무나 충격적인 사고와 사건에 관한 소식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더군다나 유명인사나 고위직이나 세상적으로 어느 분야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 어떤 누군가가 “무슨 일로 어떻게 되었다더라”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 각 사람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얻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되지 않나.
17절의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교훈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강조한 사도 바울의 권면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 말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고, 내게 남아 있는 생명이라고 내 마음대로 함부로 살아가지 말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의 시간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주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해하라’는 교훈의 원 뜻은 “깨달으라, 같이 놓으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을 같은 상태에 놓을 줄 알아야 그것이 진정으로 상대방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지 않나.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 보지 않고는 그 상대방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서양 속담처럼 말이다. 우리는 나를 지으신 분, 나를 이 세상에 보내 신 분, 나로 하여금 지금 이 세상에서 이렇게 생명을 갖고 살아가게 하시는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 보면 이런 묵상도 있다. “칭찬과 아첨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한쪽은 진지하고, 다른 한쪽은 무성의한 것이다. 한쪽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치아(齒牙)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다. 한쪽은 이기적이지 않고 다른 한쪽은 이기적이며, 한쪽은 환영받고 다른 한쪽은 누구에게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라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교훈 앞에 자기 자신을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비추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함으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세월을 아끼며 나를 향하신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여여 할까. 18절에“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자동차는 연료의 힘으로 간다. 요즘은 전기 자동차도 눈에 띈다. 앞으로는 휴발유나 경유 차의 수는 점점 줄어 들고 전기 자동차는 수소 자동차의 수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동차를 움직이는 힘이다. 에너지이다. 연료인 에너지가 없으면 자동차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휴발유이든 경유이든 혹은 LPG 가스이든 전기이든 수소 가스이든 에너지가 없이 달려 갈 수 있는 자동차란 없다. 성도를 성도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에너지는 성령이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성령을 가득하게 공급받는 것이다.
철저히 수동형이며 진행형이다. 성령의 인치심이 일회적인 것이라면 성령의 충만함이란 연속적인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다는 것은 나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능동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나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성령을 간구하고 성령을 갈망하여야 한다.
목이 마른 사슴이 타들어 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물을 찾아 헤매듯이 간절한 심령으로 성령을 갈망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술에 취해 사는 이들의 방탕한 모습과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 이들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모습을 비교하여 교훈하였다. 혹시 과거에 술을 즐겨 마셨던 이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술 취함’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비교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성령 충만을 위한 권면은 구체적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和答)하라.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贊頌)하라.
범사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感謝)하라.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
그리스도를 경외(敬畏)하라.
피차에 복종(服從)하라.
여기서 ‘화답’하라는 말은 ‘교창’ 혹은 돌려 가면서 부르는‘윤창’을 말한다. 술 먹은 이들이 서로 떠들어 대듯이 성령 충만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답게 서로 서로 화답하는 찬양을 계속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찬양하고 마지 못해 따라하는 정도의 찬양으로 하지 말고 진심으로 주께 경배하고 찬송하라는 말씀이다.
그 바탕은 감사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경외하듯이 서로 간에 복종하라고 하였다. 여기 복종하라는 교훈은 그 뒤에 이어지는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하여 교훈한다.
악한 세상에서 시간과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자. 나를 향하신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성령 충만한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자. 그리하다 보면 나 자신과 내 가정과 나의 주변의 범사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 땅에서부터 천국처럼 이루어져 갈 것이다. 고난 많은 세상에서 죄와 악을 멀리하며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자.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살아가자. 그렇게 생활해 가는 가운데 주께서 찬송과 감사와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경외하며 서로서로 피차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로 믿는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