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본받는 자(엡4:25-5:2) 2021. 8. 8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0 라는 매우 긴 제목의 책이 있다. 로버트 풀검이 저자이다. 지금부터 33년 전인 1988년에 첫 출간 된 이후로 미국 서점가에서 2년 가까이 베스트 셀러였다. 34주간 동안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제 1위였다. 그 동안 103개 나라에서 31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 1937-)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청년기에는 IBM세일즈맨, 카우보이, 아마추어 로데오선수, 화가, 조각가, 음악가, 카운슬러, 바텐더 등등 거의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의 만능 재주꾼이었다. 나중에는 대학원에서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20여 년간 퍼시픽 노스웨스트 교회에서 목사로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다. 글 쓰기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이 한권의 책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저자인 로버트 풀검이 처음부터 이런 책을 쓸 생각은 없었다. 목사인 그는 유치원 입학식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 날 거기서 평소의 생각과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학부형들에게 진솔하게 이야기 한 것인데 그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심지어는 미국 의회에서 의원들이 그의 유치원 입학식에서 한 이야기 내용을 인용해서 낭독할 정도의 열풍이 일어났다. 그 후에 로버트 풀검은 평소의 생각과 자신이 살아온 남다른 다양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진솔한 책 한 권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가 세일즈맨, 카우보이, 아마추어 로데오선수, 화가, 조각가, 음악가, 카운슬러, 바텐더 등의 별의 별 인생 여정을 거치며 살아 온 무궁 무진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 것이다. 그는 책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을 계속 다시 배우게 된다. 강의, 법, 사회규범, 책 쓰기, 설교 등 훨씬 복잡한 모습으로 삶은 우리가 배운 것들을 제대로 아는지, 실천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복잡하고 어렵다 느껴질 때 어린 시절에 배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시작하는 단순한 지침 앞에 문제를 놓아보라. ‘삶의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가 아니라 바로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맞다. 요즘은 초등학교라고 하지만 과거에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그 시절 교훈이나 급훈은 어느 학교나 어느 학년의 어느 학급이나 거의 같았다. ‘정직, 성실, 근면, 봉사, 협동, 사랑’등이었다. 좀 풀어 사용하는 경우에는
착한 어린이
씩씩한 어린이
정직한 어린이
부지런한 어린이
예의 바른 어린이
마음씨 고운 어린이
사랑스런 어린이
정도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보면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 교훈이나 급훈으로 정했던 그것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평생을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교훈하는 매우 소중한 가르침들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에베소서의 말씀을 좀 더 묵상하려고 한다. 오늘 이어서 읽은 에베소서 4장 25절의 시작은 ‘그런즉’이란 접속사이다. 앞에서 무슨 내용의 말을 했기에 이런 표현으로 이어가는 것일까. 그 앞 부분에 보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 담겨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 말이다.
여기에 보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새 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무엇을 떨쳐 버리고 무엇을 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벗어 버려야 할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이라고 했다. 그 더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허망한 행실을 따라 살면 안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살아가는 모습이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의 모습을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9절에 보면 그런 이들은
감각 없는 자이며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는 자이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자들이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에베소서 4장 19절을 읽어 보면, “그들은 감각이 무뎌져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한없는 욕심으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바울이 그 당시의 에베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들 중에서 교회에 들어와서 교인 행세하면서 여전히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깨우침을 갖게 하고 회개와 변화의 삶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런 편지를 쓴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그런즉’ 어떻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더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과연 그런 삶을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할까.
마귀에게 틈을 두지 말라.
왜 마귀에게 틈을 두지 말라는 것인가. 마귀가 무엇인가. 우리는 신앙 생활 하면서 성령의 임재와 더불어 마귀의 존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영적 세계는 천사도 실존하고 마귀도 실존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 중에 비말로 섞여 있다가 누군가에게 감염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사람의 목숨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처럼 천사의 실존과 마귀의 실존을 분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니까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옛날에 새마을 보일러가 개발되기 전에는 구들 밑에 아궁이에 직접 연탄을 화덕 채로 밀어 넣어서 구들을 덥히는 방식의 온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때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하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방바닥의 아주 작은 빈틈으로 연탄가스가 스미어들어 와서 그 방에서 잠자던 주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2018년 12월 18일 오후 1시 12분쯤 강원 강릉시 저동의 한 펜션에서 수험생 3명이 숨지고 7명이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됐다. 이들 10명은 수능 시험 후 학교에서 ‘개인체험학습’ 명목으로 학교의 허락을 받고 부모 동의하에 친구들끼리 강릉으로 떠난 서울 은평구 대성고 3학년 남학생들이었다. 출동한 소방청의 현장 검사 결과 보일러 가스 누출로 인한 사망 사고로 밝혀졌다. 일산화탄소 과다 호흡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스가 빈틈으로 생활 공간에 스며들어 와서 사람을 죽게 한다. 이처럼 마귀는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망하게 하고, 죽게 하는 영이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경계할 것에 대하여 “도둑이 오는 거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요10:10)고 비유로 교훈하셨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소개 하면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내요을 교훈하였다.
거짓을 버려라.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서로가 지체이니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되게 대하여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라.
해가 지도록 그 분을 품지 말고 풀어라.
도둑질 하지 말아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라.
모든 악독가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려라.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교훈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가롯 유다의 마음 속에 ‘사탄’이 들어갔다고 하였다. 가롯 유다는 예수께 직접 배운 제자였다. 그런데도 잘못되었다. 예수와 그의 동료 제자들과 삼년을 예수의 곁에서 함께 지냈다. 그런데도 가롯 유다의 마음에 사탄 즉 마귀가 들어가니까 예수를 팔아 버렸다. 예수를 배반하고 떠나 버렸다. 여기서 언급한 ‘사탄’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언급하는 ‘마귀’다.
<성경에 나타난 천국, 천사, 지옥, 마귀>라는 책이 있다. 저자인 로버트 찰스 스프롤(Robert. C. Sproul) 목사는 미국 플로리다 주의 세인트 앤드류 채플의 담임 목사이다. RBC(Reformation Bible College) 학장이기도 하다. 요즘과 같은 온라인 방송 매체와 유튜브가 보편화 되기 전부터 그의 라디오 설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는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그는 1994년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미국인과 세계인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오늘날의 세 명의 기독교 변증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영국 교회에 로이드 존스 목사가 있다면 미국 교회에 로버트 스프롤 목사가 있다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다.
그는 책에서 “사탄은 우리가 상상한 할로윈 분장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듯 광명의 천사(고후11:14)로 자신을 가장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탄은 무서운 얼굴보다 오히려 매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하는 기술입니다.죄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즐거움을 혼동합니다. 죄는 즐거움을 가져오지만 행복은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 사실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행복이 있음을 깨달을 때 이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즐거움을 담보로 우리에게 죄가 좋은 것인양 그 유혹에 빠져들게 할 것입니다.”
그는 책에서 이런 글도 남겼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지옥에 관해 설교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옥에 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오늘날 신약성경에서 거의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거야.’”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신다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안에서 축복뿐 아니라 저주도 있고 상급뿐 아니라 형벌도 있다.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과 그에게 가담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옥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치셨다. 예수의 그 수 많은 천국 비유가 교훈하는 바가 그러하지 않나.
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하나. 마귀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보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고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방탕함’이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마귀가 좋아하는 것은 해가 떨어진 밤 시간에 술에 취하고 흥청대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 틈에 마귀가 끼어들어 와서 음행하게 하고 더러운 짓 하게 하고 싸우게 하고 거짓 음모를 꾸미게 하고 후회해도 소용 없는 악의 구덩이로 인생을 끌고 들어간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여름 방학, 겨울 방학 숙제 중에 포스터를 그려 가는 것이 있었다. 반공 포스터 혹은 불조심 포스터 그런 것이 주로였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자나 깨나 불 조심”그리고 성냥 개피의 작은 불이 집을 불태우고 산을 불태우는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불 조심 포스터를 그리고는 하였다.
그렇지 않나.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불 조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 한 일이다. 십계명의 말씀 중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심”이런 것을 경계하라는 계명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교훈이 아닌가.
요즘 여당과 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 서로 공방을 계속하는 것들의 대개가 무엇인가. ‘진실, 공평, 선공후사, 성실, 정의’ 등이 잣대를 가지고 서로의 부족이나 허물이나 지난날의 범과에 대하여 흔들기를 하지 않는가.
은혜로운 자기 신앙 관리가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선한 일을 하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면 적극적인 생활 태도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도둑질을 멈추는 것은 소극적인 태도이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열심히 일하고 벌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구제의 생활에 앞장 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을 하여야 한다.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여야 한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여야 한다.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서로를 용서하여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이 용서를 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본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향기로운 제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런 은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 받는 자의 선한 행실이다.
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어떻게 살아가라는 교훈인가. 28절 끝의 말씀대로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여전히 친미 혹은 친중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 중에 중국의 모택동이 보내 준 구호 물자를 먹고 입고 생명을 부지한 누군가가 있는가. 6. 25 전쟁 중에 사망자가 137만 4195명에 달한다. 참전했던 유엔군 사망자는 3만 7,902명에 달했다. 이들 중 3만 3,686명이 미군 사망자다. 그 당시 유엔군과 미국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오늘 날과 같은 발전과 번영이 가능했겠는가. 6. 25는 20만명 이상의 고아를 남겼다. 30만명 이상이 남편을 잃은 전쟁 미망인이 되었다. 가족과 헤어진 이산 가족이 1000만명이 넘는다. 나이가 좀 든 이들은 패티 김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1983년 6월 30일 시작된 KBS 남북이산가족 찾기 특별생방송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 졌다.
우리가 어렸을 적 1960년대 중엽에 시골 초등학교에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보내온 옥수수 가루와 우유 분말이 창고에 가득하였다. 그 걸로 옥수수 빵을 만들고 돌덩이 같은 우유 분말을 끓여서 쌀뜨물 같은 색의 뜨끈한 우유를 한 대접씩 마시며 컸다. 수업 마치고 청소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사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선생님 청소 다 했어요. 검사 해 주세요” 그리고는 교무실 문 안에 한 편에 옥수수 빵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띠면 “선생님 이 빵 더 가져 가면 않되요”하고 수북히 남아 있는 강냉이 빵에 눈길이 가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때 배가 몹시 고프던 보릿고개 있던 시절에 그나마 미국에서 보내온 그 구호 식량들 덕분에 뼈가 튼튼해지고 키가 이 정도라도 자랄 수 있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되 할 수 있으면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웃과 열방을 향하여 끊임이 없는 선행을 계속하여야만 할 것이다.
지난 기독교 선교 초기에 처처마다 세워진 그 많은 기독교 학교, 기독교 병원, 기독교 복지 시설들을 보라. 얼마 전에도 성북동 심방 다녀 오며 보니까 경신학교 정문에 언더우드 선교사 기념관을 커다랗게 건축하는 것을 보았다. 언더우드 한 사람, 아펜젤러 한 사람 저들이 가정을 이루고 선교 현장에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려 뿌린 씨앗들이 이제는 커다른 겨자 나무로 울창하게 자라나지 않았는가. 계속하여 선을 행하는 천국 백성이 모두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신앙생활은 성령과 함께 하는 생활이다.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교훈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가르침을 반대로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라”는 교훈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을까. 이는 사도 바울의 탁월한 강조법이다.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근심’이란 “괴롭히다, 슬프게 하다, 고통을 주다”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나. 성령은 나의 마음과 생각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근심한다면 되겠나. ‘하나님의 성령’이란 말을 주목하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사사기 묵상을 시작하였다.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었다. 광야 생활 사십년을 뒤로 하고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앞장 세우셔서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점령 시대를 여셨다. 그 첫 전투가 여리고 성 전투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수 많은 전쟁을 거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이 살던 땅을 점령하고 새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사 시대 35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을 버렸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셔서 민족을 하나님 신앙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이 근심하신 사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맞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근심하시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로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근심하시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가정으로 하면 아내가 근심하지 않게 살아가는 남편이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아내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사실 그 반대로 교훈한다. 신랑이신 주님이 신부이신 그의 아내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게 하여여 한다. 그것이 호세아 서의 남편 호세아와 불량한 아내 고멜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성도의 말과 행실이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고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근심하신다. 우리 몸이 병들면 우리는 몸이 아픈 것으로 자각 증상을 느낀다. 몸이 아픈 통증을 느끼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그래야 그 통증으로 인해서 병의 원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루 하루 날마다 밤과 낮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근심하게 해 드리면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해 드리면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여금 나를 인하여 기뻐하시게 해 드려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 안에서 저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나 주님이 기쁨 되기 원하네”의 찬양 가사 그대로이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