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에브라다야(미5:2-6) 2021. 12. 19
출세한 인물이 배출되고 나면 아무리 시골 마을이라도 유명해진다. 십 수 년 전에 충북 음성 지방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다. 오전 집회 후에 읍내 변두리에 있는 식당에서 지방 목회자들과 점심식사를 하였다. 가는 길에 길가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생가터’라는 갈색 간판을 보았다. 식사 후 돌아오는 길에 그 마을에 들어 가 보았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몇십 가구가 흩어져 사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헛간 같은 초가집 앞에 간판과 초가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태어나고 어려서 몇 해 동안 자라나던 집터는 주인이 바뀌었다. 겨울바람에 비밀 하우스 비닐이 찢어져서 펄럭거리는 초라한 광경만 보았다. 그 자리가 1944년 6월 13일, 장래에 유엔 사무총장이 될 아기 반기문이 태어난 곳이라고 장차 그가 태어나고 성장하던 초가집을 원형 복원할 예정이라고 알리는 초가집 조감도만 그 밭 곁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충북 음성군 원남면 행차길 17번지에 생가도 복원되었고 같은 마을에 반기문 평화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예수께서 태어나던 그 해에는 베들레헴 고을 주민들 중에서 예수께서 자기들의 마을에서 태어날 것을 예견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만삭의 몸으로 남편 될 요셉의 조상들의 마을에 호적 하려고 방문했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몸 속에 뛰어노는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신 것을 알아보는 이들도 아무도 없었다. 단지 멀고 먼 동방에서 이상한 큰 별의 이동을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한 동방 박사들만이 짐승의 우리에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만나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치고 돌아갔다.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 미가서 오늘 본문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예루살렘을 거룩한 곳으로 구별하셨다. 뿐 만 아니라 나사렛 사람이었던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할 곳을 베들레헴으로 미리 정하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35장 19절에 보면 베들레헴의 옛지명이 ‘에브랏’즉 ‘에브라다’였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이고 에브라다는 ‘풍성한 열매’라는 뜻이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거리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2000년 전의 베들레헴은 주민의 수가 1,000명도 넘지 않는 작은 고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75,000여명이 사는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실로 예수는 참으로 보잘것 없는 평범한 시골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명문가, 세도가, 권력자의 집안의 후손으로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사렛의 평범한 가정의 딸인 결혼을 준비하던 어린 소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신 것이다.
자, 그러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고 시작되는 예수 탄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
베들레헴을 향한 선지자 미가의 예언은 주님 오시기 800년 전쯤의 일이다. 그러마 베들레헴은 이미 미가가 활동하기 200여 년 전에 다윗이란 역사적인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인간적은 부족과 흠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존귀하고 역사적인 인물로 붙들어 쓰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것들을 마음에 맞는 다윗을 통해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이룩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에 아브라함이 위대하고 모세가 위대하고 사무엘이 위대하지만 다윗만한 인물이 없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평안을 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시편의 절반에 가까운 그 많은 말씀들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도 다윗을 귀히 여기셨지만 다윗은 실로 하나님을 사랑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왕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절절히 고백하던 견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시편 23편 1절의 고백을 보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시편 18편 1절의 고백을 보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백성들을 잘 다스릴 자가 세워지기를 원한다. 그가 임금이든 대통령이든 총리이든 주석이든 그 어떤 호칭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임기가 정해진 통치자이든 종신토록 권력을 이어가는 통치자이든 다스리는 자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와 요구는 한결같다. 이스라엘 역사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 이전까지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민족으로 이어져 왔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출애굽하게 하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셨다. 모세의 대를 이은 여호수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을 다스렸다.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이 그러했고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과정이 그러하였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의 사사로운 판단이나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면 아이성 전투의 실패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사사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사사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복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백성을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에 평화가 찾아 왔다. 그러나 사사이든 백성이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벗어나고 거역할 때에 고통과 불행이 심판처럼 찾아오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게 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다스리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스리다”라는 표현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보살펴 이끌거나 관리하다 2.일정한 목적에 따라 다루거나 돌보다 3.가다듬거나 다잡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나. “작게는 나 자신이든 아니면 가족의 그 어떤 일이든 나아가서 국가적이고 거국적인 그 어떤 일이라고 할지라도 선한 손길로 보살피고 선한 목적으로 이끌고 선한 마음가짐으로 관리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잘못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잘 다스리길 원하신다. 사사 중에 삼손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질 못했다. 그래서 불행과 화를 부른 것이다. 임금 중에 사울도 마찬가지이다. 사울 왕의 말년은 자신과 백성과 주변 사람을 잘 다스린 왕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자신을 잘 못 다스린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하나님께도 실망을 안겨 드리고 말았다. 사울의 마지막 가는 길은 비참하고 불행하였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불행한 나중을 성경은 자세하게 교훈하고 있다.
세상에 요즘처럼 전염병의 두려움이 점점 더 극심해 가더라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나날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가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성경은 하나님을 목자로 인생들을 양으로 비유한다.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오직 양들만은 사람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생태적으로 그러하다. 스스로 야생할 수 없는 생태 구조를 가진 동물이 양이다. 양은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다.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만 하고 목자의 보호를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 양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판단과 스스로의 결정과 스스로의 힘만 의지하고 살아가다 보면 그 나중은 목자를 잃은 양의 나중처럼 되고 만다. 그러므로 양에게 목자가 반드시 필요하듯이 인간은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고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나는 나 스스로 다 잘 알아서 척척 내 인생을 결정하며 여기까지 잘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수 있다.” 이런 천상천하유아독존 식의 사고 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그런 마음가짐과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 자를 하나님은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신다.
그렇지 않나. 성경의 그 많은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을 보라.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라.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후수아, 갈렙, 기드온, 드보라, 사무엘, 다윗 등등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았던 믿음과 순종의 사람들이었다.
이는 예수의 열두 제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 시대의 바울 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본 받는 믿음으로 살고저 했던 사도 바울을 마음 아프게 하고 사도 바울을 배반하고 바울의 곁을 떠났던 인물 중에서 하나님이 따로 칭찬하신 인물이 있는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 삼고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이란 철저하게 목자와 양의 관계처럼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서 살아가야만 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고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를 여호와의 능력과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우뚝 서서 만백성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만한 준비된 목자로 세우셨다. 예수를 목자로 따르는 인생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목자의 손길 안에 거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나. 복음이 복음 답게 자리잡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은 나라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이는 개인과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갈 때에 주님을 우리 각 사람과 각 가정의 앞날을 복되고 복되게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동서고금에 하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을 잘 믿어서 그 상급을 열매로 증거하는 기독교 명문 가정과 기독교 명문 인생들을 수 없이 보아 잘 알고 있다. 이젠 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참 목자 삼고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서 살아가는 은혜와 평강의 주인공이 되자. 4절 말씀 끝에 보면 “그가 창대하여 땅끝 까지 미치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은혜와 복을 누리고 증거하는 간증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는 평강이 될 것이라.
예수는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는 평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평강 그 자체이시다. <공동번역 성경>에 보면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룩하신 평화와 평강은 세상의 것과 다른 것이다. 예수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돈인가. 명예인가. 권력인가. 인기인가. 높은 지위인가. 운동장 같은 응접실에 사는 대궐 같은 집인가. 세상에 한 대 밖에 없는 자동차를 타는 것인가. 요즘은 자가용 비행기 시대이고 개인 우주 여행시대인데 우리가 자랑하면 얼마나 자랑하고 더 소유하기로 하면 과연 얼마나 더 소유하면 만족하게 될까.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평화, 평강, 평안, 화목’이 아닌가. 물론 위에서 언급하는 그런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마음에 평화와 평강과 기쁨과 만족과 보람과 행복이 끊임이 없는 그런 날마다의 일상을 살 수 있다면 그 곳이 천국 생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주 예수의 평강이 찾아 오면 미움도 멈춘다. 시기, 질투, 다툼도 멈춘다. 전쟁도 멈춘다. 살인도 멈춘다. 평강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시면 내 안에 있는 어둠과 불신과 온갖 죄악들이 사라진다. 예수의 사랑, 예수의 평화, 예수의 인애, 자비, 온유, 겸손, 양선의 영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떠한가. 그런 완전한 평화와 평강과 평안의 주인공이 이 세상에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그런 평강과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370장 찬송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1, 2절에 보면,
1.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2.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라고 찬송하고 있다. 이러한 찬송이 남의 찬송이 아니라 나의 신앙 고백이 담긴 찬송이 되길 축원한다.
우리는,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라고 찬송하지 않나. 이와 같은 평화, 이와 같은 평강, 이와 같은 감사, 이와 같은 만족, 이와 같은 은혜가 흰눈이 내려 천지를 덮듯이 우리 각 사람의 범사에 임하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