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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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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여호와께 감사하라(시136:1-4, 23-26) 20201122 추수감사주일 교회 설립 제 11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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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24 03:10 조회 7,373 댓글 0
 
                 여호와께 감사하라(시136:1-4, 23-26)            2020. 11. 22 추수감사주일 교회 설립 제 11주년


감사는 성숙한 사람의 표현이다. 누구나 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불평과 원망과 탄식 속에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출애굽한 광야 백성들은 불평 가운데 죽어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대방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일은 귀한 것이다. 신세를 진 고마운 일을 기억하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란 말이 있다. 받은 은혜를 잊고 저버리고 등 돌리는 것은 결코 덕스러운 일이 아니다. 부모께 효도하고 공경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감사를 가르치는 일이다. 가정, 가족, 직장, 사업, 나라, 건강, 생명 그 모든 것들이 감사할 이유이다.

지난 해의 추수감사예배 이후 올 한해를 살아 오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하늘 나라로 앞서 보낸 가정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가정도 있다. 수술을 하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과 위기를 겪으며 한 해를 살아 온 가정들도 있다. 자녀를 기르는 일이 힘겨워서 울고불고 눈물 흘리며 한숨 지며 기도해온 가정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서 감염의 두려움에 꼭꼭 갇혀서 지나치리만큼의 염려 가운데 지내다 보니 올 한해 여기까지 온 이들도 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가고 계셨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이었다. 한 마을을 지나시다가 열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셨다. 저들이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쳤다. 예수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저들이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 고침을 받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예수께 다시 돌아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서 감사하였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그에게“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일어나 가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누구나 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물론 감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사하는 생각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주목하고 계시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바탕이다. 절기 신앙은 감사 신앙의 한 부분이다. 출애굽기 2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절기 신앙에 대하여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고 하셨다. 밭의 소출과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비롯한 육축의 소산을 구별하여 절기 때에 하나님 앞에 예물을 가지고 와서 지키라는 말씀이다. 

물론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흉년이 들어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여도 빈 손으로 돌아 올 수 있다. 밭에 아무 먹을 거리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흉년이 들고 빈털터리가 된 것 같아도 여전히 오늘 지붕 있는 공간에서 잠을 잘 수 있고 한 끼 음식을 해결 할 수 있다면 감사하지 않나. 노숙자의 신세를 생각하여 보라. 노숙자일지라도 감사할 조건을 찾아야 할 것이다. 비록 지금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버티고 이겨낼 생명이 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아로 외로움과 씨름하며 편견과 소외감 속에서 자라났을지라도 감사해야 한다. 이 세상에 생명이 주어져 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26절 분량으로 되어 있는 시편 136편에는 구절마다 ‘감사하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그러면 시편 기자는 무엇을 감사하라고 하였는가. 누구에게 감사하라고 하였는가. 왜 감사하라고 하였는가. 언제 감사하라고 하였는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으로.
시편 136편은 26번이나 매구절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여기 인자하심이란 사랑과 자비를 말한다. 영어 성경 NIV에는 ‘love’(His love endures forever.) 라고 했다. KJV에는 ‘mercy’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 사랑, 자비란 무엇을 말씀하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그 크신 위엄에 대하여 찬양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경배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하나님,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이끌어 내신 하나님, 홍해를 육지처럼 가르신 하나님,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의 갈라진 바닥을 딛고 걸어서 건너게 하신 하나님,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신 하나님, 택한 백성들을 광야에서 지키고 인도하신 하나님, 큰왕이라도 치시고 유명한 왕이라도 죽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는 길을 막아서던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죽이신 하나님,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땅이 기업인데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게 하셨다. 광야를 통과해서 요단강 건너가 여리고 성을 함락한 저들에게 가나안 일곱 족속과 싸워 이기게 하셨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우상 숭배의 땅에 여호와의 법궤를 모신 성막을 건설하게 하셨다. 그리고 사사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선민 이스라엘의 새날을 열어 가셨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러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와 사랑과 자비를 송축하며 감사 찬양을 하는 것이다. ‘대(大)할렐(Great Hallel)시(詩)’로 구분하는 시편인 136편은 성가를 지휘하는 아삽 자손이 앞 부분을 선창하면 온 회중이 뒤 부분의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후창하는 예배 찬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과 칠칠절과 수장절에 이 찬양을 부르고는 하였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의 극치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 주신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드러낸 구속 사건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고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 주셨다. 이것이 성탄이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 성탄을 기다리는 강림절기가 시작된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 홀로 큰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이”라고 감사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감사하지 않나. 우리가 돌과 나무를 깎아 만든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은과 금을 녹여 만든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여호와께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기억해 주시고 건져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 주신다. 여기 ‘비천하다’를 <공동번역>은 “우리가 망했을 때”라고 했다. <새번역>은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라고 했다. <현대인의 번역>에서는 “우리가 비참한 처지에 있었을 때”라고 했다. 

그렇지 않나. 좋은 부모 만나고,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라나고,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이들은 잘 모를 것이다. 가족 간에 우애 있고 경제적으로 별로 어려움이 없고 가족들이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살아 온 가정의 사람들은 “비천하다, 비참하다, 낮아졌다, 망했다”이런 용어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에 둘러 보면 참담한 상황에서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출애굽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색을 상상하여 보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노예였다. 노예의 삶을 430년 이어 왔다. 한 마디로 하면 비참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저들을 하나님께서 하룻밤 만에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뒤 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와 마병을 수장시켜 버리셨다. 그리고 광야 40년간 시내산 언약 민족으로 다듬고 또 다듬어 가셨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떤 하나님이신가.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다. 야곱이 총애하던 아들이다. 11년째 노예 생활하던 어느 날 여주인의 성 유혹을 뿌리친 죄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거기서 바로 임금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났다. 저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 술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은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창40:14)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술맡은 관원장은 옥에서 풀려난 후에 요셉을 새카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훗날 왕 바로가 꿈을 꾸고 나라 안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들여서 꿈 해석을 요구하였다. 아무도 왕의 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그 때 술맡은 관원장이 옥중의 요셉을 기억해 내었다. 요셉이 바로 왕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만났던 요셉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술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감옥 안에 있던 요셉을 기억해 내도록 하신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술맡은 관원장으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해 내게 하시자 요셉은 그 날로 왕의 꿈을 해석하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면 비천한 가운데서도 존귀한 존재로 신분이 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존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우리들을 대적자들에게 건져 내시는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감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시므로.
<현대인의 번역>에 보면 “모든 인류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하라.”고 하였다. <새번역>에 보니까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라고 하였다. <공동번역> 보니까“입 가진 모든 것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세계에는 못 먹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이 그러하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가 그러하다. 인도 같은 나라가 그러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고 악한 정권 아래 살기 때문에 굶주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 어디에서 살아가든지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배 부르게 먹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솔로몬이라고 한 끼에 쌀 한 가마니를 다 먹고 송아지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은 것 아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왕이나 왕궁의 문지기나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살기를 원하신다. 물론 전쟁이 계속되거나 홍수나 극심한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가 극심하게 계속되면 임금의 식탁이라고 비천해 질 수 있다. 남 유다가 망할 때에 그런 비참한 지경이 되자 한 밤중에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치다가 여리고 평지에서 갈대아 군대에 붙잡혔다.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 중에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날마다 순간마다 반드시 드려야 하는 감사기도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병들면 그 좋은 음식, 그 많은 먹을거리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내가 수입원이 멈추게 되고 사업이 멈추고 장사가 멈추고 창고가 바닥나게 되면 무얼 먹고 살수 있겠는가. 직장, 직업, 사업, 무역, 상업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런가. 누가 도와 주셔야 하나. 누가 인도해 주셔야 하나. 누가 잘 되게 해 주셔야 하나. 모든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인 26절을 <공동 번역>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 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라고 하였다.

오늘, 수장절인 추수감사절에 교회의 지난 11년을 회상하면서 어른 아이 모두 다 함께 하나님께 마음껏 감사 노래를 부르는 찬양의 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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