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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열매(엡5:8-14) 202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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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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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3-19 12:18 조회 3,355 댓글 0
 

                                빛의 열매(엡5:8-14)                  2023. 3. 19

 

 

세상은 빛과 어두움으로 나뉘어 있다. 낮은 빛에 속하고 밤은 어둠에 속한다. 물론 밤 중에 달빛과 별빛을 볼 수 있지만 햇빛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만약에 이 땅에 빛이 없다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빛을 싫어하는 생명체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빛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시작이 빛이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매 빛이 창조되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나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장 8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니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보면 예수는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8절의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는 말씀은 “빛으로 오신 예수 안에서 빛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를 때의 이전에는 어둠의 자식이었지만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된 것이다. 

 

에베소 도시는 아데미(Artemis) 여신 숭배가 극심하던 우상 숭배의 도시였다. 아데미의 신상은 여성의 가슴을 십여 개 이상을 조형해서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에베소는 무역과 상업이 발전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중해의 항구도시다. 각국의 여러 민족이 돈을 벌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타락한 세속 문화가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말이 거칠고 삶이 무질서하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장 3-4절에 지적한 대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누추하고 어리석은 말과 희롱하는 말”이 일상이었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부터 보면 “거짓말하고, 분을 내고, 도둑질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악독과 화내고 떠들고 비방하고 헛된 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러한 생활상을 너무나도 잘 알던 사도 바울은 영적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권면하고 있다. 지금 이 편지를 쓸 당시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형편이었다. 에베소서 3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슨 권면을 하고 있나. 5장 1절에 보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권면은 에베소서 5장 2절에 보니까“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라고 하였다. 거짓되고 더럽고 어리석은 말을 버리고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도 교훈하였다. 우상 숭배자로서 음행을 일삼고 영적으로 더럽게 살고 탐심에 빠져 살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라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면서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듯 권면한 것이다. 본문 9절에 보니까 빛의 열매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세 가지로 교훈하였다. 

 

 

모든 착함.

착함이란 갈라디아 5장 22-23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인 ‘양선’을 말씀하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 보면 ‘goodness’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착함이란 ‘도덕적인 선’을 의미한다. 도대체가 인간의 기본 윤리나 도덕의 수준에서 거리가 먼 악행을 일삼는 에베소 도시의 시민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예수를 믿기 시작한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권면의 말씀을 한 것이다. 에베소서에는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보다 훨씬 많은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ϖ)라는 표현을 반복한다. 무려 35번이나 같은 표현을 계속하여 사용하고 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는 ‘주 안에서’라고 하였다. 모든 일에 있어서 착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빛 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씀한다. 10절의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그래야만 주 안에서 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착한 열매를 맺으려면 11절의 권면에 의하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둠의 일이란 12절에 보면 “은밀히 행하는 것들로서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이라”라고 했다. 13절에 보면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을 빛으로 말미암이 드러난다”라고 했다. 그렇지 않나. 요즘 JMS 정명석 사건처럼 사이비 교주들의 만행이 때가 되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보라.

 

모든 일에 착하게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기대하시는 바이다. 착하게 살면 착한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예수의 산상 수훈 중에서 마태복음 7장 15- 20절 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떼와 같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을 보고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따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과일나무는 열매로 말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거짓을 심으면 거짓을 거두고 진실을 심으면 진실을 열매로 거두는 법이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오셔서 사시는 동안에 항상 모든 일을 착한 열매를 맺으셨다. 착하다는 상태는 부족함이나 결핍이 없이 좋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착한 어린이 상’이란 것이 있었다. 어린이만 착해서는 안된다. 청년도 착해야 하고 어른도 착해야 하고 연세가 들면 들수록 더욱더 주 안에서 착해야 한다. ‘착함’이란 것은 상태이며 결과이며 열매이다. 예수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은 ‘착함’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착한 분이시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악을 ‘화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착한 열매를 추구하는 삶이란 불의 앞에 항거하고 거짓 앞에서 진리를 파수하고 악 앞에서 선한 증거를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착한 사람이 성도는 아니지만 성도는 착해야 한다. 주 안에서 성도는 착한 삶을 살아서 착한 행실로 착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추구하는 빛의 열매는 모든 것이 착한 것이어야 한다. 갈라디아 5장 22-23절의 ‘자비와 양선’의 열매 중에‘자비’가‘이웃을 인자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라면 ‘양선’은 ‘이웃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행하는 선한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에베소란 도시는 아데미 우상 숭배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하고 술취하고 음란하고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상대방을 악독하게 대하고 화를 내고 떠들고 상대방을 비방하는 일도 흔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라고 까지 권면한 것이다. 5장 7절에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거리를 두고 살아가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그 반대로 “선한 일을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올 한해 그리고 평생토록 선한 열매, 착한 열매를 주 안에서 풍성하게 맺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의(義)로움.

여기서 말씀하는 의(義, righteousness)란 도덕적인 악을 버린 ‘정직과 성실’을 뜻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불의를 떠나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稱義)의 단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불의한 일이 너무나도 많고 너무나도 흔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선 도덕적인 잣대 앞에서라도 모자라지 않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권면을 하고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에베소란 도시가 불의와 거짓과 악이 판을 치는 우상 숭배자들의 소굴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서울은 어떤가. 이 시대의 우리나라와 지구촌의 이웃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 “너희는 이방인처럼 허망하게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 4장 18절에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고 했다. 4장 19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니까 “그들은 감각이 무뎌져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한없는 욕심으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므로 의의 열매를 맺으려 하는 자들에게 권면하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분명하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보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세상에는 불의한 일이 많다. 불의한 일이 계속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다. 가인과 아벨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류의 첫 가정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난 형제가 아닌가. 그런데 형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에 동생 아벨을 죽였다.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한 분풀이와 화풀이로 동생 아벨을 죽였다. 이런 불의한 악행이 인류 역사의 동서고금에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역사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서로가 의롭게 화목하게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이 없이 의를 버리고 불의한 일을 도모하며 불의한 일을 벌인다. 그 결과로 벌어지는 악과 불의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요즘 우리가 날마다 일정하게 묵상해 가고 있는 사무엘 상의 사울왕과 다윗의 모습을 보라. 사울은 불의의 화신이요 악의 화신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 사울은 신분은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악령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처럼 사람이 불의에 사로잡히면 불의한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예수께서는 빛과 어둠에 대하여 명확하게 교훈하셨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였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6)라는 교훈도 말씀해 주셨다.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곧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나. 이 땅에 햇볕이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과일나무는 없다.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으므로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가롯 유다에게는 사탄이 그 속에 들어 갔다”고 했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판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들어간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이제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위협이 잦아들고 있다. 2023년 3월 5일 기준으로 코로나19 확진자는 7억 5,926만 9,904명이다. 사망자는 686만 5,624명이다. 우리나라에는 3,057만명이 확진되고 34,034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코로나19에 1억 200만명이 감염되었고 죽은 사람만도 111만명이 넘는다. 사탄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면 그렇게 된다. 불의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을 기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만다. 예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고 말씀하셨다. 

‘해바라기’를 영어로도 ‘sunflower’라고 한다. 성도들은 ‘주바라기’(Lordflower)의 일상을 살아서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빛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범사를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때에 우리 각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은 미국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 185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그의 소설 중에 잘 알려진 또 하나의 작품은 <주홍글씨>이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인 어니스트는 어릴 적부터 고향 마을 저편에 위치한 얼굴 모양의 큰 바위를 바라보며 자라왔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언젠가 이 마을 출신 중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등장할 것이란 전설을 들었다.

 

어니스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라고 여겼던 첫번째 인물은‘개더골드'(Gathergold: 금을 긁어모으는 사람)였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 구걸하는 거지에게 겨우 동전 몇 잎을 던져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어니스트는 그에게 ‘스캐터 코퍼'(scatter copper: 동전을 뿌리는 자)라는 별명이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영악하고 탐욕이 가득해 어니스트는 낙심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이 추앙한 두 번째 인물은‘올드 블러드 앤 선더'(Old Blood-and-Thunder: 피와 폭력의 노인)라는 별명의 장군이었다. 어니스트는 그에게서 강한 의지와 힘은 느꼈지만 자애로움과 지혜를 찾아볼 수 없음을 깨닫고 예언의 인물이 아니란 생각에 실망한다.

 

세 번째로 주목받은 인물은‘올드 스토니 피즈'(Old Stony Phiz: 돌처럼 차가운 얼굴의 노인)라는 정치가였다. 그는 부자의 재산과 무사의 칼 대신에 오직 한 개의 혀를 가졌을 뿐이지만 대통령감으로 거론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어니스트는‘올드 스토니 피즈'가 대담하고 힘찬 외모를 갖고 있지만 큰 바위 얼굴의 장엄함이나 위풍이 있는 신과 같은 위대한 사랑의 표정은 없다는 사실에 또 다시 실망하고 만다.

 

어니스트는 설교가(preacher)가 된다. 노년의 그는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접하고 그를 만나보고 싶어한다. 시인은 큰 바위 얼굴의 웅대한 입으로 읊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장엄한 송가로 그 바위를 찬양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그 시인조차도 기다리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다.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시에 담긴 사상과 일치되어 있지 못하다며 자신은 큰 바위 얼굴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깨닫고 스스로 실망한다. 

 

그러던 시인은 어니스트의 설교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어니스트의 말이 자신의 사상과 일치되어 있어서 힘이 있고 그의 사상 또한 일상생활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현실성과 깊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시인이 보기에는 어니스트의 말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생명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때 저 멀리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황금빛 속에 큰 바위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주위를 둘러싼 흰 구름은 어니스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백발처럼 보였다. 그 광대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온 세상을 감싸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니스트의 얼굴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생각에 일치되어 자비심이 섞인 장엄한 표정을 지었다.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 같습니다.”사람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말을 다 한 어니스트는 시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그들의 외모가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아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어니스트가 실망한 것은 그들의 내면이었다. 부자에게선 탐욕을 보았다. 장군에겐 지혜와 자비가 결여되어 있었다. 정치인에게선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인의 경우는 시의 사상을 일상생활로 살아내지 못했다. 이 단편소설을 쓴 청교도 신앙인이었던 나다니엘 호돈은 이 작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3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교훈하셨다.

 

의로움이란 주께서 기뻐하시는 빛의 열매이다. 이런 열매가 풍성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사모하자. 

 

 

진실(眞實)함.

여기서 말씀하는 빛의 열매 중의 또 하나인 ‘진실함’이란 ‘허위와 거짓과 외식에서 벗어난 상태의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truth’라고 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진리’가 여기서 인용된 ‘진실함’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서 빛의 열매로 맺어야 하는 진실함이란 에베소서 4장 31절의 모든 악의와 함께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비방하는 것을 버린 상태로서의 진실함을 일컫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면 여당과 야당이 당을 지키고 다가오는 2024년 4월 10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어느 당이 의석수를 더 차지하느냐에 혈안이 되어서 정의와 진실의 문제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당 지키기에만 급급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동서고금의 한결 같은 문제이다. 언제나 그랬고 어디서나 그랬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실상이다. 

 

노아 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준행하며 방주를 건설하는 노아를 좋게 본 이들은 없었다. 너나 나나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깔보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시집가고 장가갔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남자들이 사람의 딸들인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만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셨다.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고 근심하셨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도 노아는 달랐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명령대로 다 준행하였다. 노아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였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편지하며 강조하고 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그리고 14절에서“그래서 성경에는 ‘잠자는 자여, 잠에서 깨어나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권면한 것이다. 

 

악한 영의 지배 속에 있는 어둠인 불의와 거짓과 악과 사망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승리하는 빛의 자녀가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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