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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주신 징조(사7:10-16) 20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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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12-18 20:59 조회 3,647 댓글 0
 

                       주께서 주신 징조(사7:10-16)         2022. 12. 18

 

 

오늘 읽은 본문에는 징조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나온다.  11절과 14절이다. 징조(徵兆)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sign’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징조’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여러 가지 이적과 다양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 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의 진실성이 어떻게 확증되는지 등을 보여 주는 증거”가 징조이다. 

 

예수께서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났다. 아기 예수의 수태 과정과 출산 과정과 성장 과정과 나중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이미 언약하신 말씀의 성취 과정이었다. 이처럼 예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징조의 연속이었다. 

 

물론 오늘 말씀의 시작은 하나님이 남 유다의 제 12대 임금이었던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역사에 악한 왕으로 기억되게 된 아하스의 어리석은 모습을 통해서 장차 하나님이 이룩하신 인류 구원의 큰 징조를 미리 보여 주셨다. 남 유다에 16년 동안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그 기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했다. 열왕기하 16장과 역대하 28장 전체의 분량이 남유다의 제 12대 왕 아하스에 대한 내용이다. 아하스는 23살에 왕이 된 후에 16년간 남 유다를 다스렸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르말랴가 남 유다를 침공하였다. 아하사는 앗수르 왕 디들랏 빌레셀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여호와의 성전과 왕국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았수르 왕에게 바쳤다. 앗수르 왕의 군대는 다메섹을 점령하고 아람 왕 르신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의 왕 아하스는 다메섹에까지 찾아 가서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셋을 만났다. 유다의 왕 아하스는 그 곳에 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이단의 신전과 제단을 보고 반했다. 그 우상의 제단 구조와 제도와 양식을 그림 그리게 한 아하스 왕은 유다의 제사장 우리야에게 전달했다. 제사장 우리야는 앞장 서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우상의 제단을 그대로 만들었다. 아하스 왕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놋 제단을 옮겨다가 우상의 제단에 설치하였다. 아하스 왕은 물두멍도 옮겨 갔다. 열왕기하 16장을 읽다가 보면 18절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다윗의 후손인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은 만군의 주 여호와 한나님을 두려워 하는 대신에 강성한 이웃 나라인 앗수르의 왕 디들랏 빌레셀을 두려워한 나머지 여호와의 성전도 제 마음대로 뜯어 고쳤다. 열왕기하 16장 2절에 보면 성경은 “아하스는....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평가하였다.

 

그 때나 오늘날이나 우리들은 지나치게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은 하나님 우선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할까를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분명하게 선포해 주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먼저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모든 필요를 주께서 해결하시고 채우시고 풍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 때 해 주신 그 유명한 비유의 말씀이 “공중의 새를 보라....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생각하여 보라”로 시작하신 내용이 아닌가.

 

불신앙과 우상 숭배와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떠난 아하스 왕에서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올 2022년 강림절 마지막 주일에 묵상하는 말씀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졌고 이웃 나라 앗수르의 왕을 두려워 하며 지내던 아하스 왕에게 무슨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셨는가.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장차 징조를 통해서 이룩하신 일을 말씀하신 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더 자세한 징조를 언약하셨다. 

 

 

다윗의 집에 보이신 징조.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다윗의 집’이여 라고 부르셨다. 아하스 왕은 남 유다의 제 12대 왕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 왕의 제 14대 후손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이스라엘은 솔로몬을 끝으로 남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남 왕국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초대 왕으로 제 20대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 까지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연이어 계승하였다. 주전 931년에 시작해서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남 유다가 멸망하기 까지 남 유다의 왕위는 다윗의 후손이 그 대를 이어갔다. 저들 남 유다의 왕들이 모두 다 유능해서도 아니고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 왕의 때에 왕의 곁에서 시대를 예언하던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 왕조의 장래를 예언하게 하셨다. 다윗 왕이 나단 선지자를 만나 대화하던 때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을 무찌르셔서 왕과 백성들이 평안하게 지내고 있던 때였다. 다윗 왕은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2) 이런 말을 선지자 나단에게 하였다. 나단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내가 출애굽한 이후로 오늘날까지 장막과 성막에서 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그 어느 지파의 그 누구에게도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7) 그리고 이어서 사무엘 하 7장 8절부터 16절까지에 하신 다윗과 그의 집을 향하여 예언하신 축복의 말씀이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언급되는 “다윗의 집”이야기이다. 이 내용은 역대상 17장에도 담겨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

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다.

셋,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넷,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다섯,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여섯,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할 것이다. 

일곱,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다. 

여덟,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할 것이다. 

아홉,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것이다. 

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될 것이다. 

열하나,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다. 

열둘,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할 것이다.

열셋,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할 것이다.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들은 후에 여호와의 성막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하였다. 사무엘하 7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기도의 끝 부분에 보면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

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7: 26-29)

 

이스라엘의 역사에 다윗은 존귀한 자이다.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하셨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나보다 높은 사람의 마음에만 들어도 그 권세가 대단해진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고 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그렇지 않나.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내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못 마땅하게 여기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맞이할 새해 2023년과 앞으로 평생토록 그리고 자자 손손 하나님이 마음에 맞아 하시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장 1절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아브라함의 집, 다윗의 집 혈통을 통해 오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징조인가.

 

 

임마누엘로 오실 징조.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하였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이룩하시는 징조란 말씀이다. 임마누엘이란“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장차 아내가 될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편 될 요셉은 착잡하고 두려운 생각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천사가 그에게 꿈에 나타났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천사가 한 말이 이것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그리고 또 이어서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한 말씀이 이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렇다. 성탄절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증거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념하는 날이다. 

 

다음 주일은 성탄절이다. 우리는 오늘까지 지난 사주 동안 성탄을 기다리는 강림절기를 지내 왔다. 우리는 강림절 기간 동안에 104장 찬송가 <곧 오소서 임마누엘>이란 강림절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 가사 내용이 무엇인가.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

 

그렇다. 강림절기와 성탄절기는 기뻐하는 절기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시고 우리 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 곁에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계시고 영원히 떠나가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 사람의 구주로 영접하는 절기가 바로 강림절기이며 성탄절기이다.  

 

그러므로 성탄절기는 에수 그리스도를 주변의 누군가에게 소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절기이다. 성탄의 가장 큰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빨강색 양말 속에 넣고 떠나는 그 정도의 선물이 결코 아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성탄의 가장 큰 선물이시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하였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시작이며 끝이다.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마태복음이 끝나는 28장 20절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렇다. 성탄절기는 이와 같은 임마누엘의 분명하고 영원한 약속을 다시 확증하는 절기이다. 임마누엘의 약속 이것보다  더 분명한 징조란 없다. 하나님이 그를 믿는 각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시리라는 이 분명한 약속, 임마누엘의 약속보다 더 좋고, 더 기쁘고, 더 감사하고, 더 복된 징조와 약속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다가오는 성탄절과 새해와 앞날에 평생토록 그리고 자자손손 다윗의 집 후손들처럼 임마누엘의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징조.

15절과 16절의 “악을 버리고 선을 알 때가 되면”이라는 징조와 언약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악과 거짓과 불의와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선과 진리와 공의를 선포하실 때가 다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말씀이시다.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자라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누가복음 1장부터 읽어 보면 예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전해진 대로 동정녀 마리에게 잉태되는 순간부터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누가복음 2장 41절 이하에는 마태, 마가, 요한 복음에 없는 예수의 12살 때의 유일한 기록이 담겨 있다. 12살 된 아들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에 방문하였다. 유월절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하룻길 후에 아들 예수가 일행 중에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 예수를 찾아 헤메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후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랍비들 사이에 끼어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화의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누가복음 2장 47절에 보면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하였다. 사흘간 걱정과 근심 중에 아들 예수를 찾아 헤메던 마리아와 요셉이 반갑게 아들 예수를 만났다. 아들 예수는 근심 중에 그를 만난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고 대답하였다.

 

고향 나사렛에 내려간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예수에게서 자라난 지혜란 엉긴 젖과 꿀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에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에덴 동산에도 선과 악은 있었다. 그런데 아담은 선을 버리고 악을 택했다. 그래서 인간에게 불행과 저주가 찾아 들어 왔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고있는 마귀를 멸하셨다. 히브리서 2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죽음에 종노릇 하는 자들을 죽음에서 풀어 놓아 주셨다. 맞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贖良)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2-1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신 속량의 사건이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후대에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악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히 선한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인자이며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죄가 없이 태어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려서부터 악을 멀리하고 선을 택하신 분이셨다. 그는 흠과 티가 없으시다. 

 

엘리베이터를 10여년 쓰니까 여기 저기 고장이 났다. 전문기사 두 명이 어제도 밤을 새워 가며 이틀간 수리하느라 고생했다. 누군가가 수고하고 희생해서 우리에게 편리함이 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공회원들은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 당하게 하였다. 저들은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더렵고 추한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다. 사망이 생명을 이길 수는 없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다. 절망이 소망을 이길 수는 없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이길 수는 없다. 거짓이 진실과 진리를 이길 수는 없다. 

 

달라스 윌라드의 책,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에 보면 잠언 4장 23절을 가장 첫 성경구절로 인용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삶을 직속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이 없이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영혼을 파괴시키는 악을 버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받은 자녀의 형상으로 회복하는 선을 철저히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서 교훈하는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는 영적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해 나가는 은혜의 생활을 말씀하는 것이다. 선(善) 그 자체로 이 땅에 오셔서 평생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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