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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사11:1-10) 202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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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12-04 18:47 조회 3,946 댓글 0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사11:1-10)       2022. 12. 4

 

 

우리는 오늘 아침 매우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내용의 하나님 말씀을 읽었다. ‘줄기에서 난 한 싹’, ‘그 뿌리에서 난 한 가지’, ‘뿌리에서 난 한 싹’이란 표현들이 이어져서 나온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세상,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지내는 세상을 그림처럼 설명하고 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어울려 지낸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한마디로 하면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와 어린 양이나 어린 염소나 송아지와 같은 순한 초식 동물들의 경계가 무너지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전개된다. ‘어린아이, 젓 먹는 아이, 젓 뗀 아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가장 어리고 순진무구한 상태를 말하지 않나. 그런데 그 반대로 어른이나 어린이나 누구나에게 위협이 되는 사탄의 상징인 뱀 그것도 맹독성을 지닌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는 어린 아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어린 아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하게 된다. “과연 그런 세상, 그런 날이 가능할까”라고 말이다. 

 

강림절기는 기다리는 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은 긴긴 세월 이어지고 이어졌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기 700여년 전의 인물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장차 하나님이 이룩하신 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예언하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이룩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역사의 증거로 알고 지낸다. 그러므로 2700여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과 예수께서 이 땅을 다녀 가신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의 기다림이란 그 차원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며 지낸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도께서 이 땅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유실수를 심는 목적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무엇인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서 불에 태워 버린다고 했다. 뿌리와 줄기에 잘 붙어 있는 건강한 가지에서는 풍성한 포도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했다. 이처럼 열매를 얻을 목적으로 심는 나무는 뿌리와 그 줄기에서 싹이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결실이 목적이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11장 1절 끝에 보면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10절에 보면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 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라고 하였다.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이 그런 결실을 맺을 그 날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6절의 ‘그 때에’, 10절의 ‘그 날에’라는 그 때와 그 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하실 구원의 증거가 결실로 드러날 그 날과 그 때를 말씀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이룩하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누구를 통하여 어떻게 이룩하시리라고 예언하고 약속하고 계신가를 보자. 오늘 말씀이 그 내용을 교훈하고 있다. 

 

 

그 위에 강림하신 여호와의 영.

하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한 싹 위에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2절 끝의 ‘강림’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표현한 말씀이다. 새벽에 이슬이 내리듯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듯이 여호와의 영이 임하도록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의 강림을 그냥 단순히 말씀하시지 않고 여섯 가지 단어로 자세하게 약속하셨다. 묶으면 세가지 약속이다. 

 

첫째, “지혜와 총명의 영”이 강림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능력과 사물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계신 동안에 그 모든 자연의 질서와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교훈해 주셨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동물, 식물, 어류, 조류, 광물의 재료 공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우주 공학, 나노 세계의 미세 공학에 대한 연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그냥 사물과 대상을 있는 그 모양이나 형체로 보고 무덤덤한 상태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그 신비 앞에 점점 더 경탄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창조 과학자들의 놀라움이 그것이다.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하시는 그 손길이 놀랍고 경이로울 수 밖에 없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란 육신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하나님이 세상 창조 이전에 스스로 계셨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영원한 존재로 계셨다. 그 분,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나’라는 유한한 존재 안에 강림하여 임재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이 “지혜와 총명의 영”의 임재인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그와 같은 성령 강림의 현장을 보아서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 즉 여호와의 영의 강림이란 이천년 전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절대 아니다. 오늘날 계속하여 지혜와 총명의 영이신 여호와의 영의 강림과 임재를 사모하는 각 사람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재하실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사와 이적이 계속되는 것이다. 

 

교회는 인본적인 그 어떤 행사나 사역에 갇혀 있거나 매여 있어서는 안된다.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여호와의 영이 내 마음에 강림하셔서 지혜와 총명의 영이 나를 주장하고 다스리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맡겨 드리고 겸허하게 의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여호와의 지혜와 총명의 영이 나를 주장하고 다르시기 시작하신다. 

 

둘째는, “모략과 재능의 영”이 강림하신다는 약속이시다.

이는 각각 올바른 판단을 하는 능력과 이를 수행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스리실 온전하고 만족스러운 통치 능력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사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 하신 비유의 말씀과 행하신 각양 기사와 이적들을 안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각색 병자를 고쳐 주셨다.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귀신에 장악되어 불행하게 살던 인생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셨다. 배 고픈 자를 먹이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살려 주셔서 생명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의 신이 강림하신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셋째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의 강림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뜻을 이룩해 가는 사명과 경건이 조화를 이루어 ‘하라’고 하신 명령을 온전히 감당하고 성취하셨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기도하셨다. 

 

지난 이천년의 교회 역사에는 동서양의 선교 역사에 대단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땅에 아무리 위대한 선교의 사람이 있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나. 가롯 유다의 불행한 선택 이후로 맛디아로 보충하여 열 두 사도가 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의 사역이 위대하지만 어떻게 저들의 사역의 결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초대 교회 성령의 강림의 역사를 그 어떤 사역의 현장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는 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라는 약속의 말씀 말이다. 맞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의 은혜를 덧입고 사는 자들이다. 또한 주님이 하신 기사와 이적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일과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는 여호와의 영의 강림을 간절히 사모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자.

3절의 ‘즐거움을 삼을 것’이란 원래의 뜻은 ‘숨을 쉰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날마다 감당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셨다.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쓴 잔의 고뇌 앞에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숨을 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지금 우리 각 사람이 살아 있다는 그 자체를 가만히 생각하여 보라.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이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나. 반대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음이란 것이 손 바닥 뒤집기와 같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지금 살아 있지만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이 순간에 우리 주변의 그 누군가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면 살아 있다는 것과 죽음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이 땅에 와서 살아가는 동안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았다.”날마다 순간마다 숨을 쉬듯이 온전하게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한 삶을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공의와 정직과 성실로 일관하는 생을 사셨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이사야 11장 3-5절을 읽으면 이렇다.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길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외모나 귀에 들리는 소문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옹호하고 세상의 악인들을 쳐서 죽이실 것이며 정의와 성실로 자기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판단과 심판은 공평하고 정의롭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만 듣는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생각과 사상과 마음과 뜻과 의도를 통찰하시는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상의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공의와 정직과 정의와 성실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4절의 ‘입의 막대기, 입술의 기운’이란 묘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은 그 입의 말씀으로 우주와 천지와 삼라만상을 창조하셨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 말씀의 권세, 말씀의 힘이다. 시편 139편 14절에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개역한글>성경은 이를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심이라.”라고 번역하였다. 그렇지 않나. 나를 지으심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묘막측하지 않나. 그러므로 감사할 것 뿐이다. 국어사전에 보니까 ‘신묘막측’이란 “신통하고 묘하여 미리 추측할 수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맞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신묘막측하기 그지 없다. 5절의 ‘허리 띠, 띠’라는 것은 고대근동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 옷을 제대로 차려 입고 허리에 매는 띠를 말한다. 그들의 복장은 허리에 띠를 띠지 않으면 옷 단장이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허리 띠를 띤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시면 허술함이 없이 공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완전하고 온전하게 다스리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시다. 

 

 

평화를 이룰 어린 아이.

이리와 표범과 사자와 곰이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소굴에서 그것도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젖 먹는 어린 아이의 출현은 달리 더 설명할 수 없는 평화의 상징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떻게 그러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전개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런 은혜의 세상을 선물해 주셨다. 원수와의 높은 담을 허시고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권능이다. 온전히 주께서 이룩하신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반목하게 되었다. 죄로 인하여 인간 관계가 무너지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핑계 하게 된 것도 죄의 결과이다. 죄는 사망을 부른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죄 사함과 생명의 능력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 완전한 화해와 화목과 평화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보혈의 은총, 죄 사함의 은덕, 사죄의 은혜, 구원의 선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3-18절 이하에서 선언한 유명한 선언이다. 함께 읽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는 평화>라는 찬양으로 우리가 찬양하지 않나.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리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리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예수, 12제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십자가에 죽임 당하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사신 부활 예수,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를 우리는 기다린다.

 

10절의 말씀처럼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만민의 기치로 우뚝 서셨다.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고 있다. 그가 거하시는 곳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사라지고 영화로운 땅, 영화로운 나라, 영화로운 인생으로 변화하는 일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은혜와 평화가 각 사람과 각 가정과 이 땅 위에 가득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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