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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Ⅱ(시19:7-14) 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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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2-13 21:18 조회 5,995 댓글 0
 

                      여호와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Ⅱ(시19:7-14)          2022. 2. 13

 

 

지난 주일에“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는 명제를 말씀 묵상의 서두에 가장 먼저 언급하였다. 맞다. 태도라는 것은 마치도 배의 돛과 같은 것이다. 같은 바람을 맞고도 배가 동쪽으로 갈 수도 있고 반대로 서쪽으로 갈 수도 있다. 또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사람의 태도와 부정적인 사람의 태도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적극적인 태도와 소극적인 태도의 결과도 서로 전혀 다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 가족을 대하는 태도, 교회를 대하는 태도, 성도 간에 서로를 대하는 태도, 성도로서 목회자를 대하는 태도, 목회자로서 성도를 대하는 태도,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등 이 모든 것은 어떤 행위의 결과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연속으로 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그 말씀에 대한 태도란 우리 각 사람의 믿음에 관한 것이다. 엊그제 금요일 새벽 말씀 분량으로 묵상한 누가복음 11장 37-45절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에 대하여 ‘화있을진저’라는 여섯 가지 내용으로 책망하셨다. 주님은 저들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과 거짓을 지적하셨다. 저들의 구체적인 악에 대하여 신랄하게 언급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지난 주일에 나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중의 세 가지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송이꿀보다 더 달게 여겨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고 그 말씀을 지켜서 큰 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허물을 깨닫고 자기 허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오늘은 그 남은 분량 세 가지를 더 묵상할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해야 한다.

다윗의 기도는 구체적이다.

 

주의 종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해 주세요.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 주세요.

내가 정직하게 살아서 큰 죄과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다윗은 고의로 짓는 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고의로 짓는 죄’라고 했는데 예전에 보던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고범죄’(故犯罪, presumptuous sin)라고 했다. 고범죄란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짓는 죄를 말한다.  지난 주일에 허물과 죄의 차이에 대하여 그 구분과 차이를 설명 나누었다. “허물(愆, 허물 건)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365가지의 계명이 있다. 이것을 범하는 것이 허물이다. 즉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허물이다.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 10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고범죄란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짓는 뻔뻔스러운 죄이다. 

 

그렇다. 인생은 누구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찾아서 행하는 허물투성이다. 그 허물이 곧 고범죄이다. 즉 고의로 짓는 죄가 허물인 것이다. 죄인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이 고범죄이다. 고의로 짓는 죄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극악한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모습 중에 성령 훼방죄를 언급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라고 했다. 예전 성경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했고 지금 성경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나.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훼방하거나 모독하면 되겠나.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거나 모독하는 말과 행위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거역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서 얼마나 크고 작은 죄들을 지으며 살아가는가. 생각이 죄이고, 느낌이 죄이고, 판단이 죄이다. 스쳐 지나가는 죄는 또 얼머나 많은가.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죄와 상관이 없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던 다윗의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최근에 어느 신경 정신과 의사가 쓴 글을 보았다. “건강하게 살려면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나쁜 음식을 멀리해야 한다.”고 정의하였다. 그렇지 않나. 에덴 동산에 좋은 것이 없어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나. 아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그 한 가지를 한 것이 더 이상 에덴에서 살 수 없는 신세로 전략하는 심판이었다. 

 

그렇지 않나.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이들이 몇 달이든 혹은 몇십 년이든 왜 갇혀 지내게 되나. 한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이 죄의 값이 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지 않나. 

 

마찬가지 원리이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그 미움이란 감정에 나 자신이 걷혀 지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은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다. 의심이란 것도 그렇다. 의처증 혹은 의부증이란 것이 있지 않나. 사실이 아닌데 매사에 사사건건 의심하게 되면 그 의심에 갇혀서 내가 불행해지고 오히려 내가 병들어 가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신학자였다. 그의 책 <나와 너>(Ich und Du, 1923)는 신학교 필독서였다. 독일은 그의 초상화를 우표에 선정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비중있는 인물이다. 

 

그는 악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악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과

둘째는, 이미 미끄러져 들어가 ‘본질적인 악’에 먹혀 버려 ‘추락한 피해자들’이다. 

 

분명히 죄인 줄 알면서도 한 번 죄를 짓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같은 죄를 짓는 일이 처음보다 훨씬 수월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일단 죄를 짓고 나면 그 죄가 나를 올가미로 엮듯이 나를 붙들고 있게 된다. 죄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속성이다. 죄는 죄를 낳는다. 한 가지 죄가 또 다른 죄를 연속적으로 낳게 한다. 죄의 연결 고리가 있다. 

 

다윗이 그랬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여서 범하였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전쟁 중에 일선에 있던 부하 장군 우리아에게 휴가를 제공하려고 했다. 우리아는 충직한 장군이었다. 그는 온 나라가 전쟁 중인데 자신만이 전쟁 중의 휴가를 즐길 수 없다도 판단했다. 다윗 왕은 자신이 부하 장군과 그의 아내에게 지은 죄가 쉽게 은폐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는 우리아 장군을 전쟁의 최일선에 배치해서 전사하게 했다. 다윗은 큰 죄를 지었다. 시편 19편 13절의 ‘큰 죄과’라는 말은 ‘반역죄’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어긴 죄를 말한다. 다윗이 의도한 완전 범죄를 밝혀낸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나단이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범죄한 다윗 왕에게 보내셨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말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런 내용이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양과 소를 아주 많이 가진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사서 기르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암양은 온 가족의 애완 동물이 되어 식구들과 함께 같은 상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은 마치 자기 딸처럼 그 양을 부둥켜안고 귀여워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부자집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자기의 양과 소는 아까와서 잡지 못하고 한 마리밖에 없는 그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아다가 그것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크게 격분하며 말하였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지만 누구든지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런 짓을 했으니 그 새끼 양의 네 배를 그에게 배상해 주어야 한다.”바로 그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출해 내었으며 사울의 궁전과 그의 처들을 너에게 주었고 또 이스라엘과 유다를 너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였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다면 내가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나 여호와의 법을 무시하고 이어 끔찍한 일을 하였느냐? 너는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처로 삼았으니 칼이 네 집에서 영영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네 집안에서 너에게 미칠 화를 불러일으키고 또 네가 보는 앞에서 네 처들을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겠다. 그가 밝은 대낮에 네 처들을 욕보일 것이다. 너는 그 일을 몰래 해치웠으나 나는 이 일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낮에 행할 것이다.”

 

그러자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하고 나단에게 자기 잘못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나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왕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원수들에게 여호와를 경멸하고 모독할 기회를 주었으므로 왕의 아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나단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 여호와께서는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심한 병에 걸리게 하셨다. 결국 그 아기는 죽었다. 나중에 하나님은 밧세바를 통해서 다윗이 낳은 아들 솔로몬을 다윗의 대를 잇는 이스라엘이 왕이 되게 하셨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고범죄 즉‘고의로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회개하는 성도의 삶이다. 

 

스캇 펙(M. Scott Peck, 1936-2005)의 <거짓의 사람들>(people of the lie)이란 책이 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상담심리학과 의사이다. 그는 책에서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예수는 더 풍성한 삶을 위하여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무롤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 잔치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들 앞에서 스스로 죽임을 당하도록 내 버려두셨던 이상한 분이셨다. 예수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인생의 길이에는 하등 관심이 없으셨고 오직 인생의 생명력에만 관심이 있으셨다. 예수는 생명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관심이 없으셨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스캇 펙은 강조한다. “예수께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생명성이었다.”예수는 악의 영 그 자체인 사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요10:10)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그 풍성한 생명의 복음의 말씀을 만방에 증거하는 것이다. 죄를 멀리하고 주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친근히 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반석과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반석이란 ‘힘’과 ‘피난처’를 상징한다. 반석이 무엇인가. 결코 변하지 않는 든든하고 거대한 바위를 말하지 않나.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반석이시고 구속자이시라는 고백이다. 구속자란 무엇인가. “댓가를 대신 지불해 주는 자” 혹은 “기업 무를 자”를 말한다. 늘 말하지만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그 값이 ‘구속금’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죄와 허물에서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자이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말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끌려 나온 여인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 여인을 끌고 나온 것이다. 저들은 “모세의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질문하였다.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고 계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무슨 글씨를 쓰셨다. 그 때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노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그 현장을 떠나갔다. 나중에는 오직 예수와 그 여자만 남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나의 죄를 씻기는>이라는 252장 찬송의 가사를 보라.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개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죄를 고발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반석이신 여호와,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말과 묵상이 주께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해야 한다.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구약시대로 하면 희생 제사가 열납된다는 의미이다. 즉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의 모든 것 즉 우리의 전부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기를 소원한다는 고백이다. 

 

이는 마치도 사도 바울이 고백한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과도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행위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다. 코로나는 우리의 현장 예배를 위축시켜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예배하는 현장 예배 생활을 회복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가 되면 자신이 사는 마을을 떠나 멀고 먼 길을 예루살렘에까지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주일날이면 TV를 켜도 예배가 있고, 핸드폰 안에서도 유튜브를 통한 수많은 교회의 예배가 실시간으로 홍수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예배할 곳에까지 나와서 예배하는 현장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루살렘에까지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수레를 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중에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고 있었다. 성령은 빌립 집사에게 가까이 다가가라고 명하셨다. 빌립은 그 수레 가까이 가서 에디오피아 관리인 내시에게 말을 걸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그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빌립을 수레 위로 청하여 올라 타게 하였다. 그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그 내용은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 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 빌립 집사는 그에게 이사야서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길을 가던 중에 물을 발견한 내시는 세례 받기를 청하였다. 두 사람은 수레를 멈추고 물로 내려 갔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관리인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에디오피아 관리인 내시는 예루살렘까지 먼길을 가서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그런 예배자의 열정이 있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하여 성경을 펼쳐서 읽는 열의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빌립 집사를 감동하시고 광야 길인 가사까지 찾아가서 만나게 하셨다. 이것이 예배자가 누리는 삶의 체험이요 증거요 간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친근히 할 때에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받아 들여지게 될 것이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현대인의 성경> 에 보면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주가 보시기에도 기뻐할 만한 것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인 사울 왕은 40년씩이나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의 나중은 선지자 사무엘과 하나님 앞에서 열납되는 삶이 되지 못하였다. 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 가문이었지만 아버지와 두 아들 모두 하나님께 열납되는 인생이 못되었다. 선지자 발람은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의 사명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께 열납될만한 선지자의 고귀한 자리에서 멀어져 가고 말았다. 늘 예를 들지만 예수의 제자 가롯 유다는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 버린 어리석은 길을 가고 말았다.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는 삶일까.

 

옛날에 어느 농부가 소를 잃어버렸다. 여러 날을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 헤매다가 먼 마을의 어느 집 마당 섶에 매여 있는 자기 소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 낯 설은 사람은 그 소가 자기 소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결국 소 임자는 관가에 이 억울함을 호소하게 되었다. 원님 앞에서 소의 주인을 구별하기 위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소 도둑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졌다. 원님은 “소를 몰아 보아라”하고 명했다. 그 소 도둑은 아무리 “이랴 이랴”하며 큰 소리를 치고 채찍으로 엉덩이를 때려도 소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차례로 주인이 소를 몰게 되었다. 소의 주인은 소에게“앞으로 가시지요. 왼쪽으로 가시지요. 오른 쪽으로 가시지요. 그만 멈추시지요.”하고 존대말을 하였다. 그런데 소가 순순히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이었다. 나리가 물었다. “어째서 소에게 존댓말을 하는가”그 때에 소 주인이 말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이 소를 길들이기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너무 제가 어려서 저의 아버지가 소 앞에서 코뚜레를 잡고 길을 드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소를 이끄시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드리다 보니 소도 존댓말에 익숙하게 길 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저는 늘 생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소를 몰 때마다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서, 그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거짓되고 어둠의 권세가 가득하다고 하여도 우리는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는 여호와의 율법과 증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자의 영혼의 눈을 밝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면 그의 삶이 의로워지며 영원에 이르게 하신다. 

 

점점 혼탁하고 노아의 시대처럼 악과 거짓이 가득해져만 가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말씀 그대로를 믿고 하나님을 영원한 반석 삼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수시로 점검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현대 첨단 과학의 요긴한 발명품 중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내비게이션’(navigation)이다. 내비게이션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덕분이다. GPS는 미군이 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만든 시스템이다. 1970년대부터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스물네 개의 위성(GPS 위성)이 보내는 전파로 목표물이나 자신의 위치를 표시한다. 이 시스템 덕분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바다 위나 사막에서도 목표물을 찾아 군사 행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시스템은 순항 미사일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도 이용된다.

 

내비게이션 장치는 이런 미군의 GPS 위성 세 곳으로부터 전파를 받아 수신 시간의 차이를 따져 각 GPS까지의 거리를 계산한다. 그리고 삼각측량 원리를 이용해 현재 위치를 산출해내는 것이다. 삼각측량이란 지도 작성에 이용되는 것으로삼각함수가 사용된다. 산출된 현재 위치는 영상으로 변환되어 액정 모니터상의 지도에 표시된다. 그 지도는 본체 내부의 메모리에 기록된 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주 업데이트해두지 않으면 잘못된 이전 정보 때문에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새롭게 은혜의 말씀으로 업데이트하지 아니하면 않되는 원리와도 같다. 내 말씀 생활의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거나 노화되지 않도록 말씀 앞에 밝고 맑은 영으로 마음 깃을 여미고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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