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은Ⅱ(시19:7-10) 2022. 1. 30
3,000년 전인 다윗 당시에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윗은 그런 저들을 의식이라도 한 듯이“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는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과 같은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천명하고 있다.
4세기에는 동방교회 대부분이 점차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12월 25일 대신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했다. 동방교회는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지키게 된 후 1월 6일은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로 지켰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 축제와 같은 날에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예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는‘그리스도’(christ)와 미사 즉 예배를 의미하는‘마스’(mass)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어로는 성탄절(聖誕節), 프랑스어로는 노엘(Noel), 독일어로는 바이나흐텐(Weihnachten)이라고 한다.
이 이교 축제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冬至)를 기념한 것이었다.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함으로서 더 이상 태양 숭배를 멈추고 이 땅에 구세주로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자는 선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세계 처처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신처럼 여기며 숭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있으면서 이 시편 19편의 고백을 통해서 전 우주적으로, 전 민족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가져야 함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다.
시편 19편의 마지막 절인 14절에 보면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라고 높이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의 반석이시다. 그를 믿는 자의 구속자이시다. 다윗은 이처럼 반석이요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오늘 8-9절을 주로 묵상 할 것이지만 11-13절까지의 내용을 미리 살펴 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죄의 문제를 갖고 씨름하고 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그 내용이 구구절절이 훨씬 더 마음에 다가온다.
“11.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
12.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잘못을 낱낱이 알겠습니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주십시오.
13.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고 순결하고 정결한 신앙을 지켜 살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고 잘 지켜서 푸짐한 상을 받게 해 주세요. 미처 깨닫지 못한 죄까지라도 깨끗하게 씻어 주세요.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막아 주세요.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해 주세요.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버리게 해 주세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온전한 자로 살아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하늘과 땅과 낮과 밤과 공중의 해와 달과 별들과 이 땅의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율법, 증거, 교훈, 계명, 도, 법도”라고 각기 달리 표현하고 있는 다윗의 고백 중에서 오늘은 그 남은 분량을 묵상하려고 한다.
영혼의 눈을 밝게 하신다.
다윗은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고 있다. 여기서 ‘순결하다’는 것은 “거짓된 것이나 그릇된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영이셔서 거짓이나 그릇됨이 전혀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계명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영의 눈을 밝히신다.영의 분별력을 갖게 하셔서 선과 악을 분별하며 참과 거짓을 구분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눈을 밝히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신자의 마음에 진리로 인한 분별력을 갖게 하시는 영이시다. 생각하여 보라. 왜 에덴 동산의 아암과 하와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뱀의 하는 말은 여호와의 말씀처럼 순결한 말이 아니다. 거짓된 논리로 하와를 유혹하였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왜곡되게 하였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면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서 가장 간교하다고 하였다. 뱀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왜곡하였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라. 하나님은“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탄의 상징인 뱀은 하와와 아담을 차례대로 타락시키고 말았다.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다. 하나님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뱀이 여자를 만나자 그 문제를 먼저 거론하였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하와는 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였다. 이는 이미 하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잘 못 되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잘못 전달하였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먹지 말라”였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고 하셨다고 잘못 전달한 것이다. 이 허점을 파고든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와의 생각의 허점에 비수를 꽂듯이 파고들었다. 결국 뱀의 이 한 마디에 하와는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여호와의 계명”으로 자신을 지켜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순결이란 “거짓과 그릇됨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그릇되다’는 것은 사전에 찾아보면“옳바르지 않거나 나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즈음에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가감하며 생활하는가. 거짓과 악이 바이러스 균처럼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거짓의 위험과 악의 두려움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권력 지향으로 살아가기를 탐하고 그러다가 잘못되면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지낸 후에도 감옥에도 가기도 한다.
하와와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눈이 밝아졌고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여기 ‘눈이 밝아졌다’는 상태는 결코 하나님의 원하시는 창조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 눈이 밝아진 상태가 범죄의 결과요, 불순종의 결과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타락의 시작이다.
다시 오늘 본문 8절로 돌아오자.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눈을 밝히시는 영적 분별력과 영적 지혜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나안의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 행을 택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외모의 화려함으로 인해서 애굽 남자들이 자기는 죽이고 사라의 목숨을 살려 둘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창세기 12장 14절에 보면 사라는 심히 아리따웠다. 65세가 넘은 나이의 사라인데 그의 화려한 외모는 금방 애굽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바로왕의 고관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 바로는 자기 곁에서 사라의 외모를 칭찬하는 고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왕은 사라를 왕궁으로 이끌어 들이게 하였다. 이 상황을 상상하여 보라. 지금 사라는 왕궁 안으로 이끌려 들어 갔고 남편 아브라함은 왕궁 밖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애굽에 내려간 목적은 여행이 아니다. 가나안에 심한 기근이 들어서 먹고 살려고 애굽으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왕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왕궁 안으로 이끌어서 들어오게 하고 왕궁 밖에 있는 아브라함에게는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와 나귀와 낙타를 풍성하게 주었다.
그런데 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 보시던 하나님이 이 사건에 개입하셨다. 그래서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두려움의 휩싸인 바로 왕은 왕궁 밖의 아브라함을 왕궁 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그에게“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라고 말하였다. 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기근의 때에 분별력을 잃고 애굽으로 내려갈 결정을 한 것은 누구인가.
애굽에 도착한 후에 빼어난 아내 사라의 외모로 인해서 부부 관계를 속이고 사라와 자신의 관계를 오라버니와 누이 동생의 관계로 말하고 다는 것은 누구인가. 그런 대화 중에 아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과 어떤 대화를 이어 나갔으리라고 상상되는가.
바로 왕의 곁에 있던 고관들에 의해서 소문을 들은 왕 바로가 가나안 여인 사라를 왕궁으로 불러 들이는 소행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며 하루 하루 지내던 중에 아내 사라는 왕궁에서 명찰을 단 신분이 분명한 고관들과 그의 보냄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왕궁 안으로 이끌려 들어 갔다. 이끌려 들어 갈때의 아내 사라의 심경과 아내를 왕궁에서 보냄 받은 자들에게 빼앗기고 왕궁 밖에 남아 있던 아브라함의 심경은 어떠하였겠는가 상상하여 보라.
어떤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별의 별 사건들을 다 겪으며 지낸다. 아침에 평온하던 가정에 저녘 나절에 큰 근심거리가 생기기도 한다. 밤새도록 뒤숭숭하던 인생사가 다음 날 아침나절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평온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결코 세월이 약이 될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나. 아내 사라를 왕궁 안으로 빼앗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를 되 찾아 올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이나 힘이 있었나. 아마도 4000년 전에 입국 절차도 없이 이웃 나라 애굽에 기근을 피하여 먹고 살아 보려고 내려 갔던 애굽 땅에서 이런 꼴을 당하였으니 나이 75세가 넘은 아브라함의 심경이 어떠하였겠는가.
창세기 12장 17절의 내용을 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겪는 당황스러운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장차 큰 민족을 이루거나 그의 이름이 창대해지기는커녕 역사 속에 잊혀진 갈대아인 중의 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창세기 12장 4절을 보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는 이 말씀의 축약적인 의미는 매우 큰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자기에게 어느 날 찾아 오셔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출발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났다. 사람이든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나귀와 약대든 다 물이 없어 죽어갈 형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늙은 나이에 애굽 행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애굽에서 부부를 남매 관계로 속이는 이상한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는 만만치 않았고 아내를 애굽의 바로 왕에게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별처럼 많은 자손을 낳아서 큰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평생 의지하고 살던 아내 사라마저 애굽 왕에게 빼앗겨야 하는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나약하고 거짓되고 판단이 흐리고 결정이 올바르지 못했던 아브라함을 구출하고 그의 아내 사라를 구출하 것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순결하신 계명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실행하라. 그리하다 보면 때로 넘어지고, 때로 실수하고, 때로 범죄하고, 때로 주저앉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 각 사람을 포기 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때로 분별력을 잃고 방황하는 갈대와 같이 나약한 인생일지라도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수렁에서 건지시고 위기에서 막으실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각 사람의 삶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거짓되고 그릇된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 오는 세상에서 분별력을 잃을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눈을 밝게 하시도다”라는 말씀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도우심과 힘을 의지하다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순결한 계명의 유익과 혜택을 덧입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영원까지 이르게 하신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는가. 우리가 지난 봄과 여름과 가을을 지내며 보았던 그 아름다운 꽃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하늘을 가리우던 한 여름의 푸르름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렇게 형형 색색으로 화려하고 아름답던 가을 단풍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이 말씀이 의미가 무엇인가. ‘정결하다’는 것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금으로 하면 100% 순금이다. 앞의 묵상처럼 이 세상의 그 어떤 거짓도 오래 가지 못한다. 때가 되면 거짓과 거짓말은 진리와 진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거짓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오직 영원한 것은 진리 뿐이다. 영원한 것은 진실 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섬기는 신자의 생활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잘못된 것이나 거짓 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도’(道)를 하나님 섬기듯이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윗은 정결한 하나님의 말씀을‘도’(道)라고 하였다. 도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을 깨우쳐 주신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시다.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외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분명하게 교훈하셨다. 큰 소리로 외쳐서 말하라고 하셨다.“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6-8)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곧 복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다 의롭게 하신다.
인간은 결코 의롭지 못하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지정의(知情意)를 덧입은 의로운 존재였다. 그런데 하와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에서 멀어진 자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9절의 다윗의 고백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신 “여호와의 법도 만이 진실하고 다 의롭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진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의가 없었다. 거짓되고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심약하고 허물 투성이인 아브라함을 포기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와 맺은 언약을 성취해 나가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룩하시기 위해서 자주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불신과 의심이 더욱 컸다. 생각하여 보라. 그렇지 않나. 75세 된 노인을 만나신 하나님이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룩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세월이 흐르고 또 흐르도록 큰 민족은커녕 아들 하나도 주시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쳐서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고 하셨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25년 세월이 흐른 후에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90살 된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 과정에 의심의 안개가 걷히고 하나님이 늘 하시던 언약의 말씀이 마음속에 믿어지는 그 순간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
평소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 종이었던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자식이 한명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늘을 우러러 뭇별늘 셀 수 있나 보아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이 말씀을 듣고 있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그 밤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가 생겼다. 하나님이 장차 하실 일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창세기 15장 6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의 장면 말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말씀 운동을 벌이는 이유와 근거가 여기에 있다. 말씀을 떠나서는 영생할수도 없고 의로워질수도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입고 영생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예수 자신에 대한 말씀을 듣고 주께서 기도하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혀져서 그 분이 부활 주님이신 것을 알아 보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달려 가서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 예수 부활의 사실을 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12)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안에서 복과 평화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