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은Ⅰ(시19:7-10) 2022. 1. 23
지혜시로 구분되는 시편 19편의 표제어에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도자는 성가대 지휘자이다. 그러니까 시편 19편은 곡조가 붙어 있는 찬송가이다. 1-6절까지에는 우주와 만물 즉 자연의 장엄함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반 계시(general reveration)을 찬양한 것이다. 그리고 7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한 가치와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의 특별 계시(special reveration)를 노래한 것이다. 그 중에 마지막 절인 14절의 일부에는 곡이 붙여져 찬양으로 오래도록 불려 오고 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내용 말이다. 다윗은 하늘, 궁창, 낮과 밤 그리고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는 해를 노래하고 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궁창이란 창세기 1장 7-8절에 나오는 궁창이다. 성경은 하늘을 궁창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하였다. 첫째 궁창이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다. 둘째 궁창은 대기권 밖의 또 하나의 궁창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셋째 궁창 즉 셋째 하늘에 계신다고 믿었다. 지구 위에는 강과 바다의 물이 있지만 3,000미터 이상 씩 되는 높은 산에는 어떻게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높은 산 꼭대기에 강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각종 나무와 식물과 각양 꽃들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다. 신비에 가깝다. 하나님이 높은 하늘의 구름 가운데 비와 안개와 더불어 이슬이 내리게 하셔서 산천초목이 무성하게 하신다. 구름에 덮힌 높고 높은 비경의 아름다운 산악 중에 나무와 풀이 자라고 새와 벌과 나비가 날아 다니고 그렇게 높은 산악 지대에도 각양 산 짐승들이 살아간다. 뭘 먹고 살아갈까 하고 궁금해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미국과 칠레 연구팀들은 남미 칠레의 유야이야코 화산 꼭대기에서 서생하는 ‘노랑엉덩이입귀쥐’의 생태계를 관찰하였다. 자그마치 해발 6,739미터의 높이에서 살아간다. 겨울에는 영하 51도까지 내려가고 년 평균 기온이 영하 15도이다. 낮에 햇볕을 받는 곳은 지표면이 32도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일교차가 무려 69도에 이르는데 생명체가 살아간다. 신비하지 않나. 태양의 영향이다. 다윗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라고 시적으로 묘사하였다. 4절에서는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하였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낮의 해와 밤의 달과 별들로 아름답게 낮과 밤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섭리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가득차 있다.
히말라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다. 장장 3,000km 길이로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티베트 고원과 인도의 경계를 이룬다. 이 산맥이 형성된 것은 약 4천만 년 전이다. 인도 대륙이 아시아 대륙을 밀어 올리며 형성됐다. 두 대륙이 충돌하자 땅은 8km 이상 솟구쳤고, 히말라야에는 아직 접근이 어려워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곳이 많다. 해발 7,000미터 이상인 산 봉우리만도 100개가 넘는다. 그 중턱 3000-4000고지에 사람도 살고 온갖 동물과 새들이 산다. 겨울이 길지만 봄과 여름에는 꽃도 피고 온 천지에 푸르름이 가득하다.
예로부터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 여러 왕과 왕비들이 사향을 구하려 애썼다. 사향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사는 야생 수컷 노루 뱃속의 작은 분비샘에서 만들어진다. 유명한 향수의 기본 향은 모두 이 사향노루의 천연 향이라고 한다. 이 향을 천국의 향기라고 여겼던 이슬람교도들은 사향을 회반죽에 섞어 낙원의 향기가 가득한 저들의 사원인 모스크를 완성했다. 하지만 수컷 노루는 그저 사향으로 암컷을 유혹하길 바랄 뿐인데 인간이 그 향기를 알고 채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19편 7절부터 10절까지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여섯 번 나온다. 14절까지를 포함하면 일곱 차례‘여호와’의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 증거, 교훈, 계명, 도, 법도’라는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그 소중함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앞 부분의 세 가지 내용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새번역 성경>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라고 하였다.
영혼을 소성(蘇醒)시킨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소성시켜 주시는 능력이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따르며 살아가고자 힘쓰면 그 완전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 각 사람의 영혼을 소성시켜 주시는 능력이 공급되게 되어 있다. 어려서 할머니나 할아버지께서 다리 좀 주물러 달라고 하시면 열심히 주물러 드린 적이 있다. 그러면 “아이쿠 시원해라. 우리 손자 안마도 잘하네.........”그러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면 칭찬받는 맛에 힘이 들어도 더 열심히 꾹꾹 눌러서 안마를 해 드린 기억이 난다. 그래요. 우리 몸을 안마하거나 마사지하면 상쾌하고 잠시나마 새 힘이 생긴다. 요즘은 몇 백만원짜리 안마 의자에 앉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팔다리를 골고루 구석구석 뼈마디가 쏙쏙 거릴 정도로 시원하게 안마해 준다. 피곤하고 고단하던 몸에 피곤이 풀리고 편안해지며 새 힘이 생긴다. 천원짜리 지폐 두 장을 넣으면 15분 동안 체험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하면 힘이 생기고 소성하게 될까.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을 가까이하고 친근히 하면 그 말씀의 힘이 우리의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새 힘을 얻도록 소성시켜 주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날마다 꾸준히 계속해서 점점 더 체험해 나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 앞에서 잠이 들어 버리면 안된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어찌된 일인지 제사를 드리다가 말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해 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 보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고 했다. 제사 드리다가 깊은 잠이 들어 버렸는데 하나님은 그 벌로 자손들이 사백 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괴로운 날들을 지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처럼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물론 너무 고단하면 육신의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예수님도 생의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셨던 제자들을 향해서 깨어 기도할 것을 강조하시지 않았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22:46)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역사하면 에스겔이 보았던 에스겔서 37장의 환상처럼 마른 뼈라도 살아나서 군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요 소성케 하는 능력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 공동체가 지난 13년 동안 14곳을 옮겨 다니며 새벽 예배, 주일 예배, 금요 기도회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공동체성을 견고히 해 왔다. 교회 학교 예배 공간, 청소년 예배 공간이 없어서 주말 오전에 학원의 빈방으로 양로원의 한 귀퉁이 방으로 옮겨 다니며 예배드리기도 하였다. 어른과 청년과 청소년과 어린이 할 것 없이 전 세대가 계속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대하며 오늘까지 나아왔다.
다윗은 시편 23편에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3)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을 목자 삼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능력의 주님으로 우리 각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사울왕의 미움을 받고 광야와 동굴로 피신하며 십년 이상을 지내야 했던 다윗을 붙든 힘은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자신과 같은 베들레헴 변방 마을의 연세 많은 아버지 이새의 막내아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수 있었나”하고 나중에 다윗이 생각해 보니 자신을 붙들어 주신 힘은 하나님의 말씀인 여호와의 율법이었다.
다윗은 깨달아 알고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신다”는 것을. 2009년 11월 29일에 첫 주일 예배를 감리교 신학대학 백주년 기념과 지하 예배처에서 드렸다. 그 몇 주 후에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예수사랑교회의 이름을 교인 투표로 정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꿈의 공동체 예수사랑교회”의 이름을 주신 큰 현수막을 지하 예배처 난간에 내어 건 적이 있다. 그 선포식 현수막의 맨 위에 보면 “Revive Us Again!”이라적었었다. 여기 ‘Revive'란 단어가‘소성한다. 부흥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영혼이 가뭄이 지나고 풍성하게 내린 비로 산천초목이 생기를 얻듯이 소생하기를 원하신다.
우둔한 자를 지혜(知慧)롭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살아가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가 변해서 지혜롭게 되는 능력의 역사가 임하게 된다. 설명이 필요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잠언 말씀에 보면 구구절절이 그런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잠1:1-2)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한다고 했다.(잠1:3)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라고 했다.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고도 했다.(잠1:5) 잠언 3장 18절에 보면,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고 했다.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3:35)고도 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7)라고 경고해 주시기도 했다. 이처럼 잠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보면 지혜에 대하여 교훈하는 내용이 무궁무진하다.
잠언과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자의 모습으로 쓰임 받았던 임금 솔로몬은“지혜자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12:11)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받아드리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채찍처럼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잘 박힌 못처럼 견고하게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가르쳐 주셨다. 또한 악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에게서 교훈을 받으라고도 하셨다. 지혜를 배우라는 강조이다.
무엇이 성경의 지혜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혜의 깊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법인가. 요즘 우리는 새벽마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일정한 분량씩 나누어서 묵상하고 있다. 어제 토요일 말씀 분량이 무엇이었나. 누가복음 6장 27절부터 38절까지의 긴 분량 안에는 예수께서 직접 교훈하신 ‘이렇게 살아가라’는 교훈이 내용이 가득하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그 내용 이해가 훨씬 쉽다. 문제는 생활 속에 실천하는 일이 숙제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들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돌려달라고 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그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에게만 친절을 베푼다면 너희가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너희가 다시 받을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빌려준다면 무슨 칭찬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되돌려 받을 줄 알면 빌려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큰 상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죄인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니 너희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부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것만큼 되돌려 받을 것이다.”
새해를 맞아 어른과 아이 누구나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리라고 여긴다. 날마다 계속하여 꾸준히 말씀을 대하며 그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하고 회개하고 깨우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마음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친근하게 하면서 살아가면 얻는 또 하나의 유익과 축복은 마음이 기뻐진다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는 기쁨의 문화이다. 신앙생활은 기뻐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에 늘 기쁘고 늘 즐거워야 한다. 늘 힘이 넘치고 늘 활력이 가득해야 한다. 언제나 희망을 말하고 언제나 잘 될 것이라는 꿈을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목사님 누가 기쁘고 즐겁게 살 줄 몰라서 이러고 사는 줄 아세요”하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25-34)라고 교훈해 주셨다.
빌립보 성의 귀신 들려 점치는 여자 아이를 고쳐 준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 매 맞고 옥에 갇혔다. 그러나 저들은 기쁘고 힘찬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밤에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교훈의 말씀을 정직하게 믿고 묵상하며 자신에게 적용하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처럼 날마다의 매 순간에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조카 롯이 먼저 우편 땅을 선택했어도 여전히 기쁜 마음을 좌편 땅을 향해서 기쁜 마음으로 양 떼를 몰고 갈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삭처럼 파 놓은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겨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처럼 루스 광야에 돌을 베개 삼고 들판에 누웠어도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의 임재와 하나님을 친히 뵙는 기쁨과 감격을 사모하여야 한다. 모세는 나이 사십에 애굽 사람을 죽였다. 더 이상 왕궁에서 살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고 말았다. 거기서 장가들고 거기서 두 아들 낳고 살아간 세월이 사십 년이다. 나중 나이 팔십에 하나님이 호렙 산의 떨기나무가 불에 붙는 환상 가운데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는 그 날 이후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명자의 삶을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120살에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까지 죽는 순간까지 모세는 기쁨으로 출애굽의 사명과 광야 40년의 중심에 서서 쓰임 받는 계명의 사람이요 언약의 사람이었다.
오늘 시편 19편의 주인공인 다윗은 앞날을 예견할 수 없던 십 수년의 광야의 청년기가 있었다. 그 초라한 광야 시절에 그를 따르던 사회 부적응자 사백여명 속에서 다윗은 장차 자신을 통해 이룩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꿈 꾸었다. 소년의 나이에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장차 왕이 되리라는 기름 부음을 받았던 다윗이었다. 그러나 그 기름 부으심을 받은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십 수년 긴긴 광야에서의 시련의 날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래도 다윗은 기쁨을 잃지 않았다.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정직하신 교훈의 말씀을 약속으로 붙들었다. 그리고 희망을 품고 광야에서도 기뻐하고 동굴 속에서도 기뻐할 줄 알았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쓰시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세움받는 40년 간의 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셔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신뢰하였다. 다윗은 매 순간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체험과 확신 가운데 살아갔다.
다윗은 마음이 넓고 큰 사람이었다. 사무엘 상 24장 17절에 보면 임금 사울이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녀도 다윗은 여러 차례 죽음을 피했다. 임금 사울은 삼천 명의 선택한 군사들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겠다고 추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오히려 다윗의 손에 임금 사울이 죽을 위기를 겪어야 했다. 사울 왕은 하길리 산길에 있는 동굴 속에서 용변을 보았다. 다윗은 왕의 옷자락만 베어 냈을 뿐 왕의 목숨을 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 임금은 오히려 입을 열어서 다윗을 축복하는 말을 했다.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삼상24:19-20)사울 임금의 이 말은 예언처럼 이루어졌고 나중에 다윗은 점점 존귀한 자가 되어 갔다.
사무엘하 8장 6절에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점점 존귀하게 하실줄로 믿으라. 여호와의 말씀이 나의 삶을 점점 즐겁고 유쾌하고 기쁘게 해 주실 줄로 믿으라.
산상수훈의 팔복 설교 말씀 중에도 그 여덟 가지 교훈의 말씀 끝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2)
고 했다. 이제 순결한 주의 계명의 말씀 앞에서 눈을 밝혀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자.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호와의 말씀 안에서 이런 은혜와 평강이 늘 샘솟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