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Ⅱ(사43:1-7) 2022. 1. 16
1977년 3월, 신학교에 입학해서 기독교 교육 과목의 필독서로 가장 먼저 읽고 독후감을 써서 숙제로 낸 책이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의 책이다. 저자인 빅터 플랭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은 유대인이다. 그는 정신 의학자이며 사상가이다. 1905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빈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학 박사가 되었다. 빈 의과대학의 교수로 지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부모, 형제, 아내를 모두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잃었다. 그 자신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추위와 굶주림, 폭행 그리고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의 의지를 되새기며 마침내 살아남았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정신 치료 기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한 20세기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악을 목격했으면서도 인간에 대해 따스한 마음과 희망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다. 온갖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으로 대처하려 하였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붙들려고 애썼다. 어떤 존재에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앙몽과 같은 경험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 치료법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가 합쳐진 단어이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기울이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주창했다. 따라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우는 것 즉 인간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대면하고 알아내도록 도와주는 정신 기법이 로고테라피이다. 그는 극심한 불안과 고통 중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양면성으로부터 오는 유한함과 한계를 체험했다. 그는 그 불안과 고통이‘지금 그리고 여기'(Here and Now)에서 우리 인류 개개인이 저마다의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수용소 생활의 경험을 담담히 써 내려 갔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결국 그곳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세계 제 2차 대전으로 죽은 이들의 수는 5,646만명이다. 코로나로 사망한 이들의 수가 550만명을 넘어 섰다. 전쟁과 같은 수준의 이 두려움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미국은 오미크론 확진자가 하루에 80만 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내가 오늘 이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 있다는 것이 신비에 가깝다.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사야 39장에 보면 임금 히스가야의 태도가 그랬다. 병에서 나은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으로부터 편지와 축하 예물을 받았다. 적국 바벨론의 사절단의 방문을 받고 친서와 함께 선물을 받아 든 히스기야는 흥분했다. 왕궁의 보물 창고를 일일이 열어 보이며 자랑하였다.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을 보여 주었다. 무기고에는 무기가 가득 가득하였다. 저들이 다녀 간 후에 이사야가 물었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히스기야는 자랑을 하듯이 말했다. 보여 줄 수 있는 왕궁의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노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몹시 안일하게 행동하던 히스기야 임금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열어서 경고하셨다.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사39:5-7)
이 말을 들은 임금 히스기야는 태평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사39:8) 이게 무슨 대답인가. “장차 그런 일이 일어나든 말든 지금 내 때에 평안하고 나라가 견고하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남유다는 망하고 말았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다. 심지어바벨론 군대는 임금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왕자들을 죽였다. 남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놋사슬에 채였고 두 눈이 뽑혔다. 그런 불행한 모습으로 결박 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열왕기하 25장 앞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버리고 떠나서 우상 숭배한 벌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죄의 값의 사망이다. 죄 사함을 받지 않고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보혈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이 속량의 은혜이다. 대속의 은총이다. 거듭남이며 중생의 복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원리다. 양자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지내던 고아였던 내가 어느 넉넉하고 풍요로운 가정의 양자로 입적되고 나면 그 새 부모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이것이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시작이다.
지난 주에 이어서 다시 대하는 이사야 43장의 말씀은 회복과 용서의 말씀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앗수르나 바벨론을 막대기와 가시채처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하는 언약 백성이 할례를 모르는 이방 백성들에게 고난 당하도록 내 버려 두시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정신 차리고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민족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저들을 두려움에서 건지시고 복을 주신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다. 나는 너희의 구원자다. 나는 너희를 물과 불의 위험에서 건지고 막아 줄 것이다. 너희는 내가 창조했고 내가 지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아라.”이런 말씀을 자세하게 강조하신 하나님이 계속하여 말씀하신다.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심이 절절이 느껴지는 말씀이 이사야 43장 4절에 담겨 있다.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여호와.
7절을 먼저 보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대단한 표현인가. 이쯤 되면 그 어떤 더 다른 무슨 표현이 필요한가.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부르실 때에 이사야 43장 1절 말씀처럼“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고 하셨다. “너는 내것이라”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소유로 삼으셨다는 말이다. 다윗은 시편 17편 8절에서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고백하였다. 맞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냐면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하나님이 나를 보배롭게 여기신다. 존귀하게 여기신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라고 말씀하셨다.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강조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이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인 우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신다. 송혜희 자매는 17살이던 1999년 2월 13일 밤 10시에 실종되었다. 그의 아버지 송길용 씨는 69살이다. 6년 전 통계로 72만㎞로 지구 18바퀴를 돌았다. 그는 전단 300만 장, 현수막 2,500개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내걸고 딸을 애타게 찾고 있다. 23년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마음에서 내려 놓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도 잃어 버린 딸을 찾고 있다. 오늘도 찾고 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끔찍이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존귀하게 여기신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예수 믿고 싶어서 믿게 된 것도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주로 영접했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니다. 내가 태어나고 보니 누군가의 아들딸로 태어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다.
성북 초등학교 곁에 있는 간송 미술관에 가 본 적이 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림들의 원본이 가득하다. 역사적인 미술품들과 고려청자들이 보관되어 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운영난에 봉착해서 국보급 문화재 두 점을 판매한다고 한다. 한 작품의 가격이 40억 상당이다. 미술품 한 점에도 그렇게 한다. 우리의 가치는 가격으로 매길수 없는 것이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그는 증조 때부터 지금의 종로4가인 배우개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상의 재산을 탕진한다는 오해를 받았으나 그의 판단은 현명했고 옳았다. 일제 시대인 1934년, 그는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 석탑, 석불, 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데 힘썼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정선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다.
역사와 유물이 누군가에 의해서 이렇게 보존되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언약 자손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끔찍이 아끼시고 소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오늘 지금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아무개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단다”
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표현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고 사랑을 고백하신다. 신앙생활이 뭔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77억명의 그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나만 사랑하신다. 이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예수의 천국 비유를 보라.
목자가 99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들판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 찾아서 기뻐하며 어깨에 양을 메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 안에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온 집안을 뒤지고 청소한다. 찾고 나면 기뻐하고 잔치한다. 집안에 큰 아들이 있지만 아버지는 집 나가 타국에 가 버린 작은 아들을 잊은 적이 없다. 일찍 아버지 유산을 받아 가지고 남의 나라에 간 둘째 아들이 주색잡기를 즐기며 지내다 거지가 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돼지를 치는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신세가 처량해졌다. 그는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나보다는 나은데”라고 신세타령을 했다. 용기를 내서 집으로 돌아 왔다. 마을 입구에 나타난 거지 행색의 아들을 먼저 알아본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얼싸안았다. 목욕을 시켜라. 새 옷을 입혀라. 새 신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준비해라.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인데 큰 잔치를 벌였다. 왜 그랬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해 보라. 사랑을 받아 보라. 사랑처럼 좋은 것이 있나. 사랑처럼 귀한 것이 있나. 사랑처럼 값진 것이 있나. 사랑처럼 만족한 것이 있나. 사랑이 최고다. 사랑이 제일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고 하였다. 아가서 8장 6절에 보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고 하였다. 이미 말했다. 미국 브라운 대학교의 기념탑에 이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그 앞에 보면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고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에 보면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라고 했다. 그렇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있는가.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다. 사람처럼 힘 센 것도 없다.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사랑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듯 나도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해 보자.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네게 축복 더 하노라
나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택한 민족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택한 인생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함께 하시는 증거로 보내 주신 분이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5절에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무엇인가. 10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왜 사랑하는 백성을 바벨론에 붙여서 고통 당하게 하셨는가. 8절에“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흩어 버리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사랑하셔서 불러 모으시고 남은 자를 이끌어 땅 끝에서라도 정한 곳으로 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5-7절에‘오게 하며’라는 강조를 세 번이나 반복하신다. 열방에 흩어 심판해 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심판의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돌아 오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11-12절을 보라.“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정해 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예수’ 그리고 또 하나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매 순간마다 체험하며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이다.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남기신 약속이 무엇인가.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임마누엘의 은총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