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Ⅰ(사43:1-7) 2022. 1. 9
피터 로드 목사가 쓴 <하나님의 음성 듣기>(Hearing God)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우리 집 뒷 마당 정원에서 결혼식 피로연이 열렸는데 피로연의 안내 역할을 맡은 한 청년이 로드 목사에게 말했다. “오, 목사님은 저 덤불 속에 18가지 종류의 귀뚜라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귀뚜라미라고. 나는 이 집에 오래 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를 의식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그러나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곤충학을 전공하는 그 대학원생은 육신의 귀를 사용하여 20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귀뚜라미 소리를 분변(分辯)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피터 로드 목사는 “우리는 듣는 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으며 동시에 수많은 소리가 들리지만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라는 서문을 시작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를 주제로 묵상을 풀어 가고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과거에만 말씀하시고 지금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에게 늘 새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800년 전에 남 유다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우리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못 알아 듣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전화라는 것이 다 유선전화였다. 카폰이라는 무선 전화 시대 초기에는 자동차에 2-3미터짜리 긴 안테나를 달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 카폰이란 것이 가격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선 전화기 시대 이전에 잠시 쓰이던 것이 ‘비퍼’ 즉 ‘삐삐’라는 것이었다. 성냥갑 만한 기계를 혁대에 차고 다녔다. ‘삐삐’소리가 나면 작은 화면에 상대편이 남긴 전화 번호를 보고 길거리에 있는 가까운 공중 전화 박스에 가서 상대방에게 전화 연락을 하고는 하였다.
무선 통신의 시작은 군대가 사용하던 무전기 정도였다. 사과 궤짝만한 무전기를 통신병이 등에 지고 뛰어다녔다. 좀 발전해서 벽돌 만한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오늘날이야 거의 누구나가 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산다. 요즘은 핸드폰도 디자인이나 성능 면에서 점점 그 기능이 발전하고 다양화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무선 통신이 발전하는 때에도 핸드폰 통화 중에 통신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빠르게 지하에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경우에 지하철 달리는 소리와 세찬 바람 소리만 요란할 뿐 상대방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는 전국 강토 처처에 기지국과 안테나가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어서 통신 장애 지역이 거의 없다. 그러나 높은 산꼭대기나 깊은 산 계곡으로 이동 중에 통신이 두절 되는 곳이 더러 있다.
과학적으로 근거 있는 내용들이라면 교훈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나만 너무 바빠서 빨리만 달려가려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너무 주변이 시끄러우면 잡음만 가득하고 대화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세상 잡음이 적어지고 사라져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는 내가 바벨탑 꼭대기에 올라 앉듯이 너무 높이 올라가서 교만이 하늘에 치솟아도 하나님의 음성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반대로 너무 낙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있으면 주님의 세미한 사랑과 격려의 음성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또한 죄악의 깊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면 그 큰 죄에 내가 가려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통신 장애가 생기면 곤란하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예민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민감해야 한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가지의 주제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악으로 인해서 장차 바벨론에 끌려가는 포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뿐만아니라 세월이 흐리고 깨닫고 뉘우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해서 다시 잃어버렸던 이스라엘 땅과 예루살렘 성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격려와 회복의 말씀도 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후대에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리라는 메시아 예언을 담고 있다.
우리는 오늘 이사야 43장의 말씀 일부를 본문으로 읽었다. 다음 주일 까지 두 번에 나누어서 묵상할 것이다. 앞부분인 이사야 42장의 후반부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이사야 42장 18절에서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고 촉구하셨다. 이사야 42장 20절 끝에 보면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라고 경고하셨다. 사람이 어리석어지고 교만해 지면 하나님이 보내시는 각종 경고와 표적으로 인한 교훈들이 깨달아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 하나님의 염려와 경고의 말씀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43장 바로 앞 부분의 마지막 절인 이사야 42장 25절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사방에서 불이 타올라도 깨닫지 못하고 내 몸에 불이 붙어 타들어 와도 하나님의 교훈과 경고의 말씀들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민족과 개인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신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는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 귀를 기울여 보자. 영어 성경 NIV에 보니까 “But now, this is what the LORD says..”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고 되어 있다. 사방에 불이 타오르고 심지어는 내 몸에 불이 붙었는데도 내 몸이 불에 타고 있는데도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두려 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를 지으신 여호와의 말씀.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지으신 이가 지금 말씀하시느니라”고 하였다. 왜 이렇게 두 번씩 똑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일까.
맞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여호와이시다. 여기서 말하는 야곱 혹은 이스라엘이란 상징적이다. 오늘 날로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야곱이며 이스라엘인 것이다.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이 담겨 있는 표현이 이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에 보면 자기 아들 딸을 향해서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아 키웠는데 네가 이 에미 앞에서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하고 울며 탄식하며 애원하며 잘못된 길 가고 있는 아들 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간곡하게 매어 달리는 부모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지금 오죽 답답하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 그렇지 않나.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부모의 눈에 피 눈물이 흐르게 하는 못된 자식으로 자라나기를 바라겠나. 부모를 귀하게 여길 줄 알고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는 아들딸로 자라나기를 원하는 것은 세상 모든 부모의 자식을 향한 기대와 소망이 아니겠는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경배하는 민족과 나라와 개인이 되길 원하시지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민족을 하나님이 원하시겠나. 기뻐하시겠나.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지경이 되어 있단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것이다. 7절까지 분량을 다음 주까기 두 번에 나누어 묵상할텐데 7절을 미리 보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신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왜 이런 말씀을 반복하시는 이유가 뭘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경고하고 계시다. 이사야 41장 마지막 절인 29절을 잠시 보라.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상이란 것이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경배하고 예배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요절로 기억하는 그 유명한 말씀 이사야 43장 21절이 바로 오늘 펼쳐 놓은 이사야 43장에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살아야지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우상 앞에 빌고 금과 은을 녹여 부은 우상 앞에 절하면 되겠나. 그런데 어떤가. 오늘날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서 살아가는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의 유혹 앞에 서게 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라. 돈이 필요하고 돈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쉽게 돈을 잘 벌고 많이 버는 이들이 더러 있지 열이면 열 거의 대개의 중산층 평민들은 돈 몇백만 원을 벌기 위해서 한 달 내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나. 그러하다 보니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늘 돈을 우상처럼 생각하며 산단 말이다. 재물이 우상이고 부동산이 우상이고 돈이 우상이 되어 가고 있단 말이다. 이는 개인 뿐만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마다 국제적으로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이웃 나라에 대해서 점령하려 하거나 통치하려 하는 그 모든 바탕은 경제적인 힘을 키우려는 무한 경쟁심이 아닌가.
이사야 선지자의 이름인 ‘이사야’란 ‘예사야, 예사야후’인데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구원의 힘이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군대의 수나 병거와 말의 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지으신 여호와의 말씀을 지금 들으라는 것이다. 그 첫 내용이 무엇인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얼마나 세상에 두려운 일들이 많나.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착잡하게 하는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 오나.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 하지 말라”
1977년에 신학교에 들어가고 신학교 가까운 곳의 교회 중고등부를 맡아 섬겼다. 70-8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모여서 가을이면 문학제를 열었다. 그 때 부른 합창 중의 하나가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라는 복음 성가였다.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 땅과 하늘에 권세 잡은이
널 찾아 내어 안보하시리니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리다
오직 믿음 오직 믿음 능치 못함 없겠네 오직 믿음
오직 믿음 오직 믿음 능치 못함 없겠네 오직 믿음”
지금 나에게 말씀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음에 엄습하는 온갖 두려움을 다스리고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나를 구속(救贖)하신 여호와의 말씀.
구속하셨다는 뜻은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뜻이다. 감격스럽지 않나. 하나님은 애굽에 팔려 가서 11년 동안 노예 생활하고 억울하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던 요셉을 감옥에서 풀어 내셨다.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다.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셨다. 그 날로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게 하셨다. 왕을 대신하는 애굽의 제 2인자가 되게 하셨다. 요셉의 나이 30살 때의 일이다. 그 후로 하나님은 요셉이 110세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나님은 그를 현직 총리의 자리에 존귀하게 세우셨다.
구속받는 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오늘 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속받은 성도의 삶이 그러하여야 한단 말이다. 3절은 구속 받은 백성들을 항상 보호하시겠다는 선언이다. 4절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우리를 구속하고 나를 구속하는 힘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나. 4절에서 “대저 나는 네 구원자임이니라.” 여기 보면 “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네 구원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애굽이나 구스나 스바 같은 이웃 나라들을 맹수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듯이 너의 속량물로 주고,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고 천하 만국을 통치하시다. 뿐만 아니라 택함 받은 성도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구속 받은 그 은혜와 구원 받은 자의 그 은총을 충분히 누리도록 선물해 주신다.
다시 3절을 보자.
물 가운데 지날 때
강을 건널 때
불 가운데 지날 때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물이 침몰하는 위험과 불에 타는 위험으로부터 건지시고 막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물론 우리는 물과 불의 위험으로부터 목숨을 잃는 이들의 안타까운 소식과 소방관들이 목숨을 잃는 참담한 소식을 접하며 산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약속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건지시고, 막으시고,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임이 분명하다.
사고와 사건과 재난이 끊임이 없는 세상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 붙잡혀 살아가고 출입하는 범사가 되기를 간구하자.
나를 지명(指名)하여 부르신 여호와의 말씀.
하나님 앞에서 나란 존재가 그냥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신명기 32장 15절과 33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여수룬’이란 애칭으로 부르셨다. 가령 신명기 33장 26절에 보면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여수룬이란 ‘야솨르’란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의인, 정직한 자”라는 뜻이다. ‘upright’즉 에덴의 타락 이전이 아담과 하와처럼 부끄러움이 없고 숨김이 없는 모습으로서 하나님이 사랑을 받는 관계를 의미한다. 도덕적으로 옳고 인간적으로 정직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고 좋고 사랑스러운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냐면 ‘여수룬’으로 여기셨단 말이다. 의롭고 정직한 자를 대하고 사랑하시듯이 사랑하셨단 말이다. 호세아 6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교훈하였다. 나를 ‘여수룬’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풍성한 사랑을 받고 누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이사야 44장 2절에도 보면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여수룬’이란 표현이 나온다. 젊은 커플들 중에서 사이가 한창 좋을 때에 ‘자기야’라고 부른다. ‘HONEY’라고 부른다. 그런 비유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 부르시는 정도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표현 중에 이보다 더한 표현이 있겠나. 물론 있다. 골고다 언덕에 높이 달린 십자가의 아들 예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약속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을 향한 ‘여수룬’의 사랑을 쏟아 부어 주고 계신 것이다.
이발소 손님으로 이발 중인 칠십대 초반 남편의 육십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아내가 반려견을 품에 안고 들어 왔다. 강아지는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부인은 애기를 안듯이 품에 마주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손님들을 보고 “멍 멍” 짖기 시작했다. 이발 중인 남편이 “아빠 이발 거의 다 했으니 조금 만 기다려라”하고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부인은 “짖지 말고 엄마 말 잘 듣고 가만히 좀 있어”하며 품 안의 강아지를 아우르는 장면을 보았다.
요즘 우리 나라가 반려 동물 천국이다. 유기견들도 많고 길 고양이도 많지만 주인을 잘 만난 강아지는 고양이들의 팔자는 상 팔자 중의 상 팔자다.
강아지가 주인을 잘 만나면 그런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산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인생에게 진노하여 심판하고 진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지명하여 불러내셔서 ‘너는 내 것이라’(you are mine)이라고 말씀하시고 눈동자처럼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랑 가운데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나의 안에 거하라”찬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