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 때에 거기에서(막1:4-11) 20240128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1-31 21:55 조회 2,600 댓글 0
 

                       그 때에 거기에서(막1:4-11)            2024. 1. 28

 

요한복음은 좀 다르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철저히 예수의 생애와 천국 비유 말씀의 역사적인 기록을 담고 있다. 신학교 입학 첫 학기 때에 영국 윌리엄 바클레이의 <예수의 사상과 생애>이란 필독서를 읽은 기록이 새롭다. 예수의 모든 생애가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수는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다녀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의 탄생과 생애와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역사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요단강에서 있었던 세례 요한과 예수의 만남의 장면이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 주변의 광야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그의 소문을 들은 수 많은 무리가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광야의 그에게 몰려들었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광야란 동쪽으로는 요단의 저지대였고 서쪽으로는 유대 산지였다. 남쪽으로 사해가 위치하고 북쪽은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하는 곳이었다. 요단 광야는 기복이 심하고 암벽이 적지 않아서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었다. 세례 요한은 거기서 나서 자랐다. 앙상한 잡목이 눈에 띌 뿐 독사가 우굴 대고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한 곳이 못되었다. 세례 요한은 그 곳에서 죽은 낙타의 가죽과 털로 몸을 가렸다. 그리고 허리에 가죽 띠를 마련하여 맸다. 광야에서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란 메뚜기와 야생 꿀인 석청이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새 시대를 열어 갈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자가 광야에서 나오리라는 소망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그 당시 세례 요한에 대한 관심과 소문은 기대 이상이었다. 죄 사함과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들은 무리는 각 사람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였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라는 말씀을 강조하였다.

 

그런 어느 날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광야의 세례 요한을 찾아가셨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를 마치고 물에서 올라 올 때에 하늘이 열렸다. 우리가 읽은 <개역 개정 성경>에는 ‘하늘이 갈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께 임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오늘 “그 때에 거기에서”라는 제목의 말씀 묵상 중에 은혜가 되길 소망한다. 

 

  

죄(罪) 사(賜)함을 받게 하는 회개(悔改)의 물 세례(洗禮).

마가복음 1장 4절의 세례 요한이 선포한“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라. ‘죄 사함, 회개, 세례’이 세 가지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세례다. 분명히 강조하지만 물세례를 받는 그 행위 자체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물을 사용하면 내 몸이나 신체의 일부를 닦는다든지 어떤 물건을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다. 그러나 물세례 자체가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세례가 우선이 아니라 회개가 우선이다. 회개한 자에게 죄 사함이 임한 증표로 물세례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의식이지 죄를 사하는 수단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을 바꾸는 것 그 이상이다. 회개란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회개는 마음과 행동의 완전한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죄와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새로운 변화가 이어져야 한다.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생각과 습관과 말과 삶 전체에 지속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구약의 선지서에 보면 선지자마다 반복되는 강조가 ‘회개하라’는 것이 아닌가. 민족과 개인을 향하여 시대 앞에 계속되는 선지자의 강조는 회개의 촉구였다. 그러므로 회개란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방편이다. 

 

회개할 때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회개할 때에 악의 심판에서 구원 받게 된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딸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이 가능하다. 죄의 담이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막고 있으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함으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죄가 끼어들면 서로 사이가 서먹해지고 만다. 더군다나 인간의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청산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란 없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나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신지를 깨닫게 된다.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를 마무리하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한결같은 첫 강조는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지난 주일에 미리 묵상한 마가복음 1장 15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말씀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작이다. 회개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회개는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허는 첩경이다.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2장 20절 말씀처럼 내 안에 예수를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회개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이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는 고백이 진정으로 나의 고백이 되는 나날을 살아가는 것이 회개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인 것이다. 

 

288장 찬송가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의 1절 가사룰 보라.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예수 안에서 성령과 피로 거듭나는 길이 곧 회개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과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할 마음이 없으면 회개란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非轉向 長期囚)는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장기간 생활한 국내 빨치산, 남로당, 조선인민군 포로와 남파 간첩을 지칭하는 용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길 원하면 가능할텐데 자신들의 사상적 이념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말이다. 회개와 죄 사함의 길은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조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에도 마찬가지였다.

 

성령 충만을 받은 120성도 가운데서 베드로가 나서서 복음을 전했다. 3000여명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였다. 저들은 베드로의 복음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그렇다. 회개의 과정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천년 교회 역사가 강조해 오는 성경적인 구원의 길이다. 인간은 누구나 구원 받기 위해서는 회개와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한다. 구원이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비둘기 같이 임한 성령(聖靈)의 충만(充滿).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목적은 분명하다.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순응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찾아 오신 예수 앞에서 세례 베풀기를 당황스러워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3장 15절에 보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 자신과 세상 사람을 동일시 하시고 대속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이사야 53장 12절에 보면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라고 하였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구주로 믿는 천한 만민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셨다. 마태복음 3장 11절과 누가복음 3장 16절의 같은 내용에 보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성령 세례는 무엇이고 불 세례는 무엇일까. 성령 세례를 불 세례와 묶어서 설명한 이유는 분명하다. 불이란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식지 않는 열정과 열심을 상징한다.

 

그렇다. 예수께서 물 세례를 받고 요단 강 물에서 뭍으로 올라 오실 때에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께 임했다.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평생 동안 하나님의 아들의 생을 사셨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잉태되고 성령 안에서 태어나고 성령 안에서 성장하고 성령 안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런 예수의 모습을 자세하게 전해 주고 있다. 누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라고 설명해 주었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유대 산골 마을에 사는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 갔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41) 마리아와 복중의 예수를 영접하였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67) 태어날 아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예언하였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기를 고대하던 시므온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령이 그 위에 계셨고,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아가서”(눅2:25 – 26) 아기 예수의 탄생과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축복하고 찬송하였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셨다.(눅4:1)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 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눅4:14) 예수는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았다.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를 드리시던 예수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이사야61장 1절 말씀을 인용하셨다.(눅4:18)

누가복음 24장 끝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서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 48)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시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24:49)라고 분부하셨다. 여기 “내가 내 아버지게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시리니”라는 ‘약속하신 것’이 성령 강림의 약속이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날 오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고 그 밤에 숨어 있는 예루살렘의 11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하신 말씀이다. 

 

세례 요한이 무리 앞에 소개하는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그 날 요단 강에서 그에게 비둘기 같이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셨다. 이 말은 “그러면 예수께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시 전의 예수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느냐”는 식의 질문으로 풀어갈 상황이 아니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잉태되고 성령 안에서 태어나고 성령 안에서 성장하고 성령 안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던 그 시간에 임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의 강림이란 예수의 “순결하고 온유하고 거룩하고 평화로운 구원 사역을 이룩하실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면인 것이다. 

 

요즘 중성자 치료기의 개발과 상용화는 현대 최고의 암치료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암 환자들 중에는 그 혜택을 기다리다가 암이 깊어 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는 동시다발적이다. 성령 세례는 성령의 충만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보혜사이신 성령은 도우시는 영시다. 보혜사란 영어로‘helper’라고 하였다. 성령은 생각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깨우치는 영이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할 자가 없다. 성령은 인도하시는 영이시다. 선한 길, 옳은 길, 유익한 길로 믿음의 사람을 인도하시는 영이 성령이시다. 성령은 각양 은사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갖게 하는 영이시다. 성령은 육체의 욕망과 죄에서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헛된 세상의 영광을 구하게 한다. 그러나 성령은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성령이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령 주도적인 삶을 사모해야 한다. 나 중심 아니라 성령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령 세례, 불 세례를 받은 성령의 사람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증거는 열매로 말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그 날 그 현장에서 그에게 임하시는 비둘기와 같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갈라진 하늘로부터  임하신 성령의 임재와 함께“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왔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그림처럼 설명하는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시편 2편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좋게 여기시는 아들이시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함께 계시던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아니,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땅에 육체로 오신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유의 말씀으로 일관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셨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시작하는 증거로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말씀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렇다. 예수는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려는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는 아주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3)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 각 사람도 하나님의 넘치는 구원의 사랑을 덧입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자녀의 축복이며 양자됨의 영광이다. 예수께서 평생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덧입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각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피난처 예수>의 후렴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모든 것 주께 드려요

아바 아버지 내가 여기 있으니 

주님 영광(교회, 나라) 위하여 써 주세요

 

이런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전하며 살아가는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감싸시고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영원한 왕이신 예수 ..최고관리자
"내 영혼이 은총 입..최고관리자
"에벤에셀 하나님"최고관리자
"영원한 왕이신 예수..최고관리자
"내가 천사의 말을 ..최고관리자
꿈 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