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뿌리
결혼 생활 내내 남편에게 폭력에 시달리다가 3년 전에 이혼한 아내가 그 동안 집요하게 자기를 찾아다니던 전 남편에 의해서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의 친딸은 “아빠를 사형시켜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겪는 심신의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그렇게 요구했을까 싶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혼 후에도 늘 불안에 쫓기며 여섯 차례나 거처를 옮겨 다니며 숨어 지내던 중에 결국은 전 남편에 의해서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요즘 학교, 기업, 병원, 군대 심지어는 유치원에서까지도 폭력에 관한 기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일 보도되고 있다. 매우 어린 나이의 영유아를 학대하고 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교사들의 CCTV영상이 공개되는 것을 보면 마치도 꾸며진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아서 좀처럼 믿어지질 않는다.
이는 교사나 교수가 학생에게 혹은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행하는 폭력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즉 학생이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패륜한 경우이다. 이는 회사의 간부와 직원,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혹은 의사와 직원, 군대의 선후배 등등 그 관계가 복잡하다.
분명한 것은 한 쪽은 가해자이고 다른 한 쪽은 피해자라는 점이다. 사건이 뒤얽히고 나면 서로 가해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대할 수 있고 평안과 안식과 쉼을 제공하고 제공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 가정에서조차 가족들 간에 폭력이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다.
그 폭력의 정도가 심해지면 상대방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 살인사건 중에서 41.4%가 친족에 의한 사건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이 부부간의 살인이다. 그 다음이 애인, 지인(知人), 친구, 타인, 기타 등이다. 우리나라는 서구사회에 비해 친족살인율이 4배 정도가 많다고 한다. 또한 특이한 점은 미국이나 호주는 남성 피해율이 70%인 반면에 우리나라는 여성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우리나라 가정폭력의 피해자 중에서 75%가 여성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살인 사건 5건 중의 1건이 남편에 의한 아내 살해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비율이 낮지 않다.
가해의 유형은 상대방에 대한 심리적인 학대, 사사 건건 말로 하는 폭언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폭행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이란 작게는 개인과 개인 간의 폭력이지만 크게는 국가간의 폭력인 전쟁으로 혹은 민족간의 폭력인 민족 말살정책으로 번져 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역사의 사건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사건이다. 그 희생자의 수는 600만 명 이상이다. 그 당시 지구상에 살아가던 유대인의 수가 900여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 참혹함은 필설로 설명하기에는 불가능할 정도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슬라보에 지젝은 개인이 겪는 주관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폭력의 뿌리는 구조적인 폭력에 대하여 지적한다.
저자는 그의 책에서 이런 예를 든다. 피카소의 미술 작품 <게르니카> 앞에 서 있던 나치독일 장교가 피카소에게 물었다. “이걸 당신이 그린거요.” 피카소는 대답하기를 “아뇨 당신이 그렸잖소.”이러한 대화는 폭력 자체보다는 그러한 폭력을 낳는 사회구조적인 요인과 구조적인 악의 뿌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종교적인 폭력은 어떠한가. 이슬람과 IS의 실상은 어떤가. 종교와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살인의 참상은 어떠한가. 정의의 회복과 혁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두려움은 얼마나 심각한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5-1973)의 <게르니카>(Guernica)는 350X776cm의 대작이다. 이 작품에서는 나치의 폭격이나 내전의 구체적인 참상과 그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비정형적인 인물과 대상의 표현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작품을 이루는 각 요소들의 조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의 흑백 색만으로 표현하여 작가의 의도를 더욱 잘 전달하고 있다. 작품의 왼쪽부터 보면 불이 난 집, 죽은 아이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멍한 황소의 머리, 부러진 칼을 쥐고 쓰러진 병사, 광기에 울부짖는 말, 상처 입은 말, 램프를 들고 쳐다보는 여인, 여자들의 절규, 분해된 시신 등등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뒤엉켜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살던 바스크 족의 수도이다. 나치에 폭격당하면서 군인이 아닌 15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스페인 출신인 그는 이 소식을 뉴스로 접한 후 곧장 작품 제작을 시작하였다. 오늘 날 이 작품은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흙으로 만든 인간의 코에 하나님의 영인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 즉 ‘아담’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이란 곧 하나님 자신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인간다움이란 진과 선과 의의 근본이신 하나님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인간이 뱀을 만나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로부터 시작된 불순종과 타락은 남편인 아담에게까지 이어졌다.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가정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저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줄 알던 형제였다. 그런데 제사 후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서 만나 쳐죽였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기 전에 가인은 이미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동생과 함께 거의 같은 시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였다. 저들의 제사 중에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 그 일 후에 가인은 몹시 분해하였고 안색이 변해 있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분하여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과 죄에 대한 내용을 교훈해 주셨다. 사람이 의지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 말씀이 무슨 내용인가. 죄란 것은 다스리지 아니하면 사람의 마음 문 앞에 와서 호시탐탐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결국은 죄를 짓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새마을 보일러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워서 잠자는 시간에 구들의 틈새로 새어 들어온 연탄가스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듯이 죄와 악이 자라나서 걷잡지 못할 폭력과 되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악을 부른다. 그렇다. 사람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 마음 속에서의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과 죄의 유혹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은 가인과 같은 불행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에 의해 행해지는 악과 폭력이든 혹은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폭동과 전쟁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마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