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
하루가 멀다 하고 나라 안팎의 처처에서 테러, 살인, 간음, 도둑질, 가짜 뉴스인 거짓말, 보이스 피싱과 같은 사기, 횡령, 밀수 등 악한 사건의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동서고금 언제 어디에서나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거나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끔직한 경우도 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패역한 사건도 있다. 또한 전해지는 치정(癡情) 사건을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사람의 마음 바탕에 악(惡)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학(儒學)에서는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구분한다. 맹자(孟子, BC 371-289)는 인간이 선하려고 노력하면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다는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신념이 있었다. 공자(孔子, BC 551-479)나 맹자와 같이 순자(荀子, BC 300-230)도 이처럼 자기 수양(修養)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순자는 맹자와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本性)이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수양에 의한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본성은 자기욕구의 충족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순자는 사회적 제제와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순자에 따르면 유가의 학문은 '사회화‘(社會化)이다. 사회화란 지위고하,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서로 행복한 세상을 추구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화의 과정에는 고대성인(聖人)의 권위, 관습, 스승, 군주, 법, 관리 등이 모두 필요하다고 여겼다. 법과 질서와 권위와 예(禮)에 대한 순자의 강조는 이후 법가(法家)와 연결되었다.
순자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수양철학이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무질서하며 반사회적이어서 본능적 충동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사회는 인간이 도덕의식을 가진 성숙한 인간이 될 때까지 점차적으로 이끌고 도야(陶冶)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행동 규범인 ‘예’(禮)와 플라톤(Platon, BC 428-348) 처럼 음악에 심오한 도덕적 의미가 있다고 여긴‘악'(樂)에 비중을 두었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마가복음 7장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을 주제로 교훈하신 말씀이 실려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수의 강조는 성악설에 가깝다. 맞다. 인간은 선하지 않다. 에덴에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 가 버린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 앞에 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 버렸고 불순종과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동서고금에 계속되어 온 악이다. 그러나 그 뿌리가 어디서부터인가.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이 그의 아내를 통해 낳은 두 형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저지른 범죄가 아닌가.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이렇게 풀어 가다 보면 인간처럼 악한 존재가 없다. 차라리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세계도 그렇지는 않다. 사람의 마음속에 금수(禽獸)만도 못한 어리석은 악이 가득 차 있다. 예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고 지적하였다.
예수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고 하였다. 이러한 교훈의 바탕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에 바탕을 둔 교훈임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변화 받기 전에는 젊은 율법학자였다. 그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철저한 바리새파 유대인이요 모세의 율법으로 무장된 인물이었다. 그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그런 죽음은 마땅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생각하여 보라. 사람이 율법을 어겼다고 돌 탕에 맞아 죽어 가는데 그 정도의 죽음은 괜찮다고 여길 정도이면 대단한 냉혈인간이 아닌가.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고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 장 서던 자였다. 유대교의 보존을 위하여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색출해서 없애 버려야 한다는 신앙과 신념에 붙잡혀 있었다.
그런 그가 변화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에 붙잡힌 사도의 길을 걸어갔다. 오늘 날의 기독교가 구라파를 거쳐서 북미와 세계로 번져간 과정에서 이방 선교의 사람으로 택함 받았던 사도 바울을 빼어 놓을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가는 일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쯤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붙잡혀 있던 강경한 율법학자였다. 그런 그가 로마교회에 쓴 편지 가운데 보면 인간의 악에 대한 고발을 소상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이 모든 것의 뿌리는 죄와 악이다. 악한 생각은 우매함에 근거한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으면 악한 생각에 붙잡혀 악을 행하고 스스로 멸망의 구렁텅이를 항하겠는가.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은 우매함이라”고 하셨다. 우매(愚昧)함이 무엇인가 영어 성경에 보면 ‘foolishness’라고 했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바보스러운 상태’이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 생의 나중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내용을 보라. 이 세상에서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았느냐 혹은 병든 거지로 고생하며 살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우매함 곧 어리석음은 나중을 모르는 무지(無智)이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에 의하여 의(義)로워질 수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말씀은 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속량(贖良)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는 영생할 자란 단 한 사람도 없다.(롬3:24)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고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롬8:32) 진리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나면 사람은 달라진다. 복음을 알고 나면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음! 사람의 그 마음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