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행운의 차이
몇 주 전에 주일 예배를 마친 교우들이 어른 아이 함께 나들이를 했다. 가까운 곳의 공원에서 서너 시간 머물며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식사 후에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인데 육십 대 중반의 남자 권사의 손에 네 잎 클로버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만 널려 있는 클로버 풀숲에서 네 잎을 가진 것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클로버의 세 잎은 ‘행복’(幸福)이고 네 잎은 ‘행운’(幸運)을 상징한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백과사전에 보면 그 흔한 세 잎 클로버 풀숲에서 유전적 변종인 네 잎을 가진 것을 찾아 낼 확률은 일만 분의 일 정도라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이라도 그 일상생활에 행복이 없고 불안과 두려움과 번민 속에서 살아간다면 왕의 그 높은 지위와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행복이란 무엇일까. 보람, 만족 혹은 마음이 평화롭고 평안한 상태가 아닐까. 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보니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일상적인 행복으로부터 만족과 보람을 추구하기 보다는 뭔가 새로운 행운을 찾아 나서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결과는 그 후유증이 적지 않다. 행운을 쫓는 이들의 특징은 대개가 과음, 마약, 놀음, 투기, 성적 일탈 행위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 중에는 사회적인 각 분야의 저명인사가 거론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왜일까. 사람들은 누구나가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속성이 있다. 그러하다 보니 건전한 취미활동이나 여가 활동 그리고 스포츠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뭔가 다른 차원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결과는 냉혹하고 참담하다. 최근에 몇 달 동안 언론에 자주 거론된 유명 연예인들과 결탁된 권력형 불륜과 비리 사건을 보면 그런 사회적인 실상을 엄연한 사례로 접할 수 있다.
사람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소한 행복을 가치 있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뭔가 새로운 행운을 좇게 되는 날에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높다.
아일랜드의 전설에 의하면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처음으로 가졌던 사람들은 영국 제도(British Isles)와 갈리아(Gaul) 지방의 드루이드(Druid)교 사제(司祭)들이라고 한다. 드루이드교의 사제는 성스런 참나무 숲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켈트족의 성직자들이었다.
켈트족은 다신교를 신봉하면서 영혼불멸 신앙 외에 점성술, 의학, 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켈트족인 드루이드 사제들은 신전을 특별히 따로 세우지 않고 영험하다고 믿는 숲 속이나 호수 부근에서 제사를 지냈다. ‘참나무 숲 의식’에는 짐승 외에 절단된 인간의 머리나 산 사람의 피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칼로 사람을 찔러 죽여 그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로 미래를 점쳤다고도 한다. 이런 야만적인 종교행위는 주전 300년경부터 유럽정벌을 시도했던 고대 로마가 드루이드교를 배척한 요인 중 하나였다. 기독교인들은 드루이드교 사제들을 마술과 마법을 행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하며 단죄하였다. 주후 5-6세기에 이르러서는 켈트족의 고유한 종교가 기독교화 되면서 마침내 드루이드교는 사라지고 말았다.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살아있는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를 통해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네잎클로버의 십자가의 모양을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였다. 저들은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전에도 십자가를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는 마법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저들은 네잎클로버의 십자가를 통해 마녀나 악마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고 이를 통해 마녀나 악마를 피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저들은 네잎클로버와 함께 또 다른 행운의 마력을 가진 식물이라고 여기던 겨우살이(mistletoe)를 채집하길 원했다. 켈트족의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프랑스인들은 정월 초하루가 되면 겨우살이를 따기 위해 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하지(夏至) 성 요한 축일에는 광장에 화톳불을 피우기도 한다. 이처럼 특정 종교의식 행위가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는 것을 보면 인류의 종교적 관행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행운(幸運)과 요행(僥倖)을 바라는 심성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있다. 그러면 행복과 행운의 차이가 무엇일까. 성경은 행운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고 행복한 삶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정의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들이며 하나님이 친히 저들을 ‘돕는 방패’가 되어 주시고 ‘영광의 칼’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대적을 만나면 대적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 복종하게 해 주실 것이며 대적들의 높은 곳이라도 점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의 팔복 말씀을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일상이 행복한 자의 삶이라고 교훈해 주셨다. 이런 삶을 기쁘고 즐겁게 가꾸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늘의 상이 클 것이라고 하셨다. 일상의 행복을 귀하게 여기는 나날 가운데 천국이 경험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당신이 찾고 있는 행복은 어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