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와 바늘귀
며칠 전에 바느질할 기회가 있었다. 새벽에 입으려던 와이셔츠 단추 한 개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대개 아내가 알면 해결 해 주지만 그런 경우는 직접 바늘을 꺼내 들고는 한다. 왜냐하면 잠깐이지만 단추를 고쳐 다는 시간은 잡념이 사라지고 그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 지고 좋다.
단추 다는 일을 하다가 보면 어렸을 적 생각이 난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안마당에 들어서는 순간에 할머니께서 “얘야 여기 와서 이 바늘에 실 좀 뀌어주렴.”하고 부탁하시던 일이 생각나곤 한다. 요즘이야 그런 이부자리가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이불 호청을 따로 세탁해서 일일이 바느질을 해서 다시 씌워 사용하고는 했다. 할머니는 대청마루 한 가득히 이불을 펼쳐 놓고 호청을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시고는 하셨다.
바늘귀에 실을 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실 끝에 침을 발라서 단번에 꿰는 경우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나마 길거리를 지나다가 바늘에 실을 쉽게 꿰는 작은 도구를 1,000원에 팔기에 한 개 사다가 반지 고리에 담아 넣어 놓은 덕을 보고는 한다.
성경에 ‘바늘귀’이야기가 나온다. 바늘에 실을 꿸 때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 대목이 생각난다. 어느 날 어떤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때에 상대방이 예수께 다시 여쭈었다. “어느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해 주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이 말씀을 들은 그 청년이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그러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 젊은이였다. 부모에게서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오늘 날로 하면 벤처 사업으로 성공한 경우였을 것이다. 예수의 설명을 들은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예수의 곁을 떠나갔다. 자기 자신이 의욕을 갖고 예수께 찾아 와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던 젊은이인데 그만 예수의 곁을 머쓱하게 떠나가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그 대화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하게 말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차라리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몹시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이며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백배나 받을 것이고 또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골고루 실려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관리’, ‘큰 부자’라고 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 앞에 ‘달려와서 꿇어 앉아’질문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부자 관리 청년은 ‘영생’에 관한 관심이 적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예수와의 대화 중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아마도 그 유대 청년의 반응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인간적이고 경색된 율법주의자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부자 관리 청년이 나름대로 철저한 율법실행의 삶을 살면서 예수께 질문했던“영생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일화 중에서 낙타 이야기와 바늘 귀 이야기로 인해서 예수께서 설명해 주신 핵심적인 내용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청년의 첫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였다. 예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마19:26, 막10:27, 눅18:27)
자, 그렇다면 “영생은 무엇이며 구원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고 그 대답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보내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없다. 그 부자 관리 청년의 고민이 그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잘 지키며 살아 왔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였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9\”는 예수의 말씀은 그 어떤 인간도 선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시다. 예수께서는 나름대로 계명을 준수하는 생활을 잘 해 왔기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싶었던 그 청년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셨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준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청년의 잘못된 영생관, 그릇된 구원관은 무엇인가. 이 청년이 왜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는가. 그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이 그것을 말한다. 그가 떠나간 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교훈해 주셨다. 구원과 영생은 인간의 노력(努力)이나 공로(功勞)나 업적(業績)이나 선행(善行)이나 수련(修練)이나 수양(修養)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恩惠)의 선물(膳物)이다. 영생과 구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영생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主權) 안에 있는 것이란 강조이다.(눅18:27)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