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일어나라 함께 가자 0221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2-23 08:09 조회 5,205 댓글 0
 

일어나라 함께 가자

 

 

예수께서는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음식을 잡수시다가 말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셨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다. 그리고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고 교훈해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고 말씀하셨다.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에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기도하셨다. 그 밤에 예수의 심정은 매우 고민스러웠고 죽을 지경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26:38) 그리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제자들은 졸며 잠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여 드리고 또 드리셨다. 성경에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는 표현은 강조이다. 어찌 세 번만 기도하셨겠는가. 밤새도록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신 것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깊게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는 독백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일어나서 어디로 함께 가자는 초청이실까. 함께 가서 무슨 일을 하자는 권면이실까. 함께 가서 그 어떤 일을 성취하자는 제안이실까.

 

 

고난(苦難)을 넘어 영광(榮光)스러운 자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요한복음 316절은 말씀한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成肉身)하셔야 했는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사함을 받고 영생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 주신 구세주이시다. 우리는 그를 메시아혹은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의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受難)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맞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의 처절한 고난을 다 당하셨다. 마태복음 2667절에 보면, 대 제사장 가야바의 뜰로 예수를 끌고 간 무리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군병들은 예수를 끌고 관정 안으로 들어갔다. 예수의 옷을 벗겼다. 홍포를 갈아 입혔다. 가시관을 엮어서 예수의 머리에 씌웠다. 갈대를 예수의 오른손에 들게 하였다.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삐죽거리며 희롱하였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갈대를 빼앗아서 그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한참 동안 예수를 희롱하던 로마의 병정들은 다시 예수의 홍포를 벗겨내고 예수의 원래 옷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끌고 나갔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서 이처럼 부끄러움과 온갖 고난을 다 당하셔야만 했는가.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고난 너머에 영광이 찾아오는 것이다. 고통 뒤에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해산의 수고에 비교하였다. 해산의 수고와 고통은 아들딸의 생명을 낳아 양육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하여 잊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다. 이것이 고난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삶의 신비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좌우편에 강도가 같이 메어 달렸다. 좌편 강도가 예수를 조롱하고 비방하였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나와 우리를 구원하라”(23:39) 그러나 예수는 좌편 강도의 말에 반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의 신앙의 길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 나만의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이란 없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영광의 면류관의 가치도 알게 되는 법이다. (KNOW CROSS KNOW CROWN)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분야의 정상에 우뚝 선 이들의 나중 영광이 아름답지만 그 길을 거기까지 가도록 긴긴 고난의 여정을 건너뛴 이들이란 없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안일과 평안과 번영만을 구하지 말고 고난 뒤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성도의 삶을 가꾸어 가야만 할 것이다.

 

화가는 작품으로, 연주자는 연주로, 성악가는 노래로, 소설가는 남긴 소설로 말한다. 운동선수는 신기록으로 자신의 지내온 날을 말한다. 예수는 한 몸에 짊어지신 육체의 고난 즉 당하신 수난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주님이시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5:7-9)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을 넘어 부활(復活)의 자리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고 예수의 죽음을 상징한다. 십자가 처형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흉악범이나 극악범을 처형할 때 쓰던 사형법이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들의 손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하셨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의 병정들로 하여금 예수의 시체를 장례한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묘실 문을 큰 돌로 막고 인봉하게 하였다. 병정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지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 하셨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부활의 종교이다. 이 땅에 부활 종교는 기독교 뿐이다.

왜 예수인가. 왜 십자가인가. 왜 예수 부활의 소식이 참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福音)이어야 하는가.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다시 사신 예수, 부활 승천하신 예수가 우리 신앙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고 권면하며 교훈하고 있다.

 

영생(永生)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생은 칠십이다. 강건하면 팔십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4:1-4)

 

천국도 실재하고 지옥도 실재한다. 교도소에 가 보면 참담한 감옥 생활을 실감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천국의 상급이 있듯이 지옥의 심판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죽으셨다. 그것도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영광스럽고 영원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부활이란 무엇이고 영생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고 장례를 마친 후에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해 주신 말씀이시다.

 

당신은 어떤가. 그 어느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죽음 앞에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글을 읽는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영광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영생의 천국 복음이 믿어지는 신자(信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위 글은 2021. 2. 14.. 주일 설교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설교문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2024 추수감사예배..최고관리자
2024 추수감사주일..최고관리자
2024 추수감사주일..최고관리자
2024 추수감사주일..최고관리자
2024 추수감사주일..최고관리자
영원한 왕이신 예수 ..최고관리자
"내 영혼이 은총 입..최고관리자
"에벤에셀 하나님"최고관리자
"영원한 왕이신 예수..최고관리자
"내가 천사의 말을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