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어느 주한 외교관이 겨우 배운 한글로 쓴 ‘열심히’라는 손 글씨가 일간 신문에 사진으로 실렸다. 그의 글씨체는 서툴렀지만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배워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은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 날의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구한말 일본과 청나라와 러시아의 전쟁의 발판이 되었던 불안정한 시대를 끝으로 일제의 식민지, 6.25 전쟁, 군사 독재 등을 거치면서 열심히 살아온 결과로 오늘날 가난을 극복하는 경제 강국이 되었다. 잘살게 된 것은 복이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을 덮고 있는 어두운 그늘이 적지 않다. 가령 젊은이들에 대하여 말하는‘이태백’ 혹은 ‘삼포족’이란 표현이 그러하다. ‘이태백’이란 “이십 대의 태반이 백수다.”, ‘삼포족’이란 “시대적인 경제 불안정으로 인하여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를 일컫는 은어인데 이제는 우리말 사전에까지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분야와 업종에서 기발한 아이디어와 연구의 결과를 가지고 벤처 사업과 스타트 업 사업에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공헌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라는 책처럼 생각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다. 4차원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인류 역사상 요즘처럼 최첨단의 과학 발전을 이룬 때가 없었다. 인공 지능인 AI(Artificial Intelligence)로부터 로봇의 상용화와 3D 프링팅 기술의 발전과 우주 공학, 군사 무기의 첨단화, 의학 기기 발전의 속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열심히만 무얼 한다고 다 되는 세상도 아니다. 효율적인 접근과 효과적인 경영이 아니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 무한 경쟁 시대를 맞이한 지 벌써 오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을 대하는 태도 중에‘열심’을 빼어 놓을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열심’(熱心)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열왕기하 19장 31절에 보면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다. 생각하여 보라. ‘열심’이란 “지혜, 성실, 인내, 의지, 고난극복, 충성, 헌신” 등의 그 모든 덕목을 아우르는 내용이 아닌가. 하나님의 속성을 ‘열심’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성품을 나타낸 말이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영원히 유효하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 오셨고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구원의 완성이며 언약의 영원성이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속성은 이사야 9장의 메시아 예언 가운데도 언급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고 하였다. 하나님의 열심은 구원의 빛으로 비추었다. 그 빛이 비추일 때에 고통받던 자들에게서 흑암이 사라졌다. 멸시를 당하던 백성들이 영화롭게 되었다. 주께서 한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고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면 그 즐거움이란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고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과 같게 하신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그가 택한 백성들의 어깨에서 멍에와 채찍과 막대기를 꺾으신다. 하나님의 열심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한 아기로 탄생하는 성탄의 방법을 통하여 이룩하셨다. 이것을 이사야 9장 6-7절에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있는 사랑을 한 몸에 담고 태어나신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다. 그분은 고단한 나날을 사시다가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진리를 향한 구원의 열심을 막을 수 있는 악의 세력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는 마치도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말씀으로 천지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열심은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셔서 영생하는 존재로 새롭게 하셨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중생이며 구원이며 하나님의 자녀 됨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이다.
미국보다 더 좋은 나라도 많지만 여전히 세계 열방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불법으로라도 미국 땅에 발을 밟기를 원한다. 어떤 길을 택해서라도 미국이 제공하는 영주권을 받길 원하고 시민권을 취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미국 시민이 된다고 해도 미국이 발전시켜온 문명국가 국민으로서의 인권을 누리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시민 의식을 갖고 의무와 막중한 책임도 다해야만 한다.
미국에도 절대 빈곤층이 있고, 가정 해체, 총기 남용, 마약, 성 범죄, 동성애 등등 국가가 나서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상 그 어디에 문제없는 나라, 문제없는 민족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고 피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이루신다. 이사야 37장 32절에 보면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이는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의 고민이기도 하였다. 인간은 양 무릎이 피범벅이 되도록 계단을 기어오르며 고행을 계속한다고 해도 스스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 죄 사함과 구원은 절대자이신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일방적인 혜택이며 선물이다. 아침이 와야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떠올라야 밤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어둠을 물리칠 힘이 있는가. 이것은 창조의 원리이며 자연계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악을 이기려면 선이 찾아와야 하고 불의를 극복하려면 정의가 다스려야 한다. 거짓을 이기는 길은 정직뿐이며 불안과 염려를 잠재우는 것은 평화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거는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다. 물론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답하고 반응하여야 하는 것은 맞지만 구원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며 선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이처럼 열심을 통해서 인간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 열심의 끝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그 누가 그런 처참한 죽으심을 선택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극단적인 고난과 죽으심과 장사 지낸 지 삼일이 지난 절망의 끝에 ‘부활’(復活)이란 대답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열심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의 열심의 완성은 부활이니 말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부활은 모든 것의 대답이다. 밝아온 새해 2020년 하나님 안에서 당신의 열심의 몫을 당신이 감당해 나갈 때에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