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푸는 곳
불교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한다. 그 뜻은 “근심을 해결하는 곳”이란 의미이다. 주중에 교회의 일 층 사무실에서 지내거나 주차장 주변의 볼일로 들락거리다 보면 화장실 사용을 원하는 이동객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들 중에는 등산객들이 대다수이다. “화장실 좀 사용할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교회는 인생의 다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세상에 근심이 없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인들 있을까. 고대의 왕이라고 해서 근심이 없었을까. 우리나라 현대사의 통치자를 역임한 인물이 고향 뒷산의 높은 바위 위에서 투신한 사건을 보라.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무한 존재인가를 말이다. 만석을 농사하는 거부라고 근심이 없을까. 우리 속담에 “천석군은 천 가지 걱정 만석군은 만 가지 걱정”이란 표현이 있지 않나. 인기 절정을 달리던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다가 불행한 길을 선택하는 뉴스를 접할 때가 있다. 연예인들은 인기를 먹고 사는 이들일텐데 그 마음 속에 일어나는 근심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모양이다.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찬송가 중에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근심 걱정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지 않는 인생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인생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짐이 있고 걱정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 동안 근심이란 단어가 한자인줄 알고 있었으나 순 한글이었다. 사전에 보면 근심이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고민하고 긴장하는 그 모든 것이 근심의 일종이다. 중국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걱정을 하였다. 급기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 그래서 생긴 표현이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란 뜻의 기우(杞憂)라는 말이다.
사실 염려와 걱정 근심이 전혀 없이 살 수 있는 길이란 없다. 사람은 걱정 거리가 생기면 걱정하고 불안한 일이 생기면 불안해하고 근심거리가 생기면 근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근심이 되는 것이 대개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와 초조와 두려움 가운데서도 매 순간마다 평화를 회복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은혜의 힘을 의지하게 된다.
우리가 겪는 고난의 정도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겪었던 고난과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 시대적으로 나라마다 민족마다 어려운 때에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서, 종교와 신앙을 위해서 혹은 신념을 위해서 죽기를 각오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우면서 극심한 고난과 핍박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도 있다. 독일의 히틀러의 학정이 그러하였고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일본의 주변 국가를 향한 식민지 시대의 잔악한 횡포가 그러하였다.
그런 시대에 고난 받던 이들과 죽음으로 내 몰리던 불운한 시대 현장에서 근심하지 않았던 이들이 그 누가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라고 하신 사명 앞에서 묵묵히 긴긴 세월 동안 방주를 건설하던 노아의 근심은 무엇이었을까. 노아는 장차 하나님이 물로 이 땅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리라는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고 제 멋대로 타락된 생활을 일 삼던 그 시대 사람들의 불신과 방탕한 삶에 대하여 근심하였을 것이다. 성경은 노아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근심은 자신을 위한 근심이 아니라 포악하고 부패한 채로 살아가던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한 근심이 컸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근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나섰고 벧엘 동쪽의 산자락으로 옮겨서 지냈다. 얼마 후에 그곳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 왔다. 먹고 살길이 묘연해진 아브라함은 아내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하마터면 아내를 애굽의 임금에게 빼앗길 뻔하였다. 육십 오 세가 훨씬 넘었던 사래의 외모가 얼마나 출중하였기에 그런 일이 생겼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나약하고 비겁하게 처세하던 아브라함은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그 마음에 얼마나 큰 근심이 짓누르는 날들을 보내야 했을까. 하나님은 그처럼 심약하고 담대하게 처신하지 못하던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그의 아내 사래를 애굽 왕의 손길로부터 건져 내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를 건져 내시려고 바로 왕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기근을 피해 애굽에 갔던 아브라함 내외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까지 챙겨 주었다.
장성해 가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얼마나 큰 근심이 자리잡았었을까.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단에 결박하고 칼을 뽑아 들기까지의 장면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언약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지만 이게 어찌 쉽사리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이삭의 근심은 어떠했고 야곱의 근심은 어떠했을까. 이삭은 사십에 장가들고 이십년 만에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어서 아들이 태어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무릎에 앉혀 드려야 할텐데 세월만 가고 리브가에게 잉태의 조심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런 긴긴 세월이 흐르고 결혼 이십년 만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은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염려나 걱정이나 근심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가지나 있는가.
이삭과 리브가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처신하지 못하고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던 큰 아들 에서로 인해서 엄청나게 많은 마음 고생을 했을 것이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족속의 두 딸을 연이어 아내로 맞아들였다. 일련의 이런 일상들이 그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큰 근심이 되었다.
이런 눈으로 성경을 보면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등을 비롯하여 그 많은 신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근심 없이 살았던 이들은 단 한 명도 없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심각한 근심에 빠져 기도하신 적이 있었다. 그 절정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의 모습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 26장 37절에 보면 그 날 밤 예수는 몹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었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다. 예수의 근심에 찬 심정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일 것이다. 이 세상에 근심이 없는 생을 평생토록 순탄하게 살다가 죽는 인생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수조차도 피할 수 없는 그런 근심과 고민을 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중은 부활의 영광이었다. 아니 주님은 영원한 영광의 주인공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이처럼 교훈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