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거기에서는
아주 여러 해 만에 남산에 갔었다. 어디나 그러하지만 서울의 남산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구한말, 그리고 근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지난 목요일 ‘한국목회와 상담 연구소’가 주관하는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서 참석하였다. 오후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 남산유스호스텔 주변의 산자락을 잠시 산책하였다. 마당 왼쪽 맞은편에는 지하로 연결된 차량 이동 통로 곁에 역사의 현장을 알리는 시뻘겋게 녹슨 쇠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옛 중앙정보부 제 6별관’이란 간판 아래 작은 글씨의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지상 구조물이 전혀 없는 그 곳은 언덕을 이용해 지하 3층 구조물로 되어 있으며 ‘지하 벙커’, ‘지하 고문실’로 불렸다는 해설도 쓰여 있었다. 한 시대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끌려가서 취조와 고문을 받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일일이 거명할 수조차 없는 그 시대의 양심을 품고 살던 지식인들이 ‘이건 아니다’라고 항거하며 잠잠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곳이 바로 거기였다. 그 곳은 ‘중앙정보부’의 본관 건물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곳은 우리나라가 민주화되기 이전의 어두운 그늘이 깃든 곳 중의 한 군데였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잘 사는 경제 강국의 기반을 닦아가던 시절의 명암(明暗)이 교차되던 현장 입구에서 잠시 서성거리는 시간을 가졌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하늘의 가을빛을 가리고 있는 언덕 자락을 내려서다 보니 왼편에 큰 원반의 돌덩이와 그 주변에 삼십여 개의 조금 작은 바위들을 둘러 배치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 왔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History is not remembered is repeated)는 문구가 한글 ,영어, 한문, 일어로 병기된 대형 원형 돌판은 그 밑에 스프링을 설치해서 사방으로 흔들거리게 했다. 한 순간도 안정을 지켜 가기 어려운 역사의 소용돌이를 의미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문구는 원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적혀 있는 문장이다. 이 말을 남긴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2-1952)이다. 그는 소설가, 시인, 작가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이기심과 탐욕과 자국 중심의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히고 말면 그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세계 인류의 지나온 날들이 처처에서 교훈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씨름하며 한 많은 세월을 지내야 했던 그 36년의 식민 통치 기간을 상징화 한 현장이었다.
바로 그 곁에는 일본 통관관저 표시판과 함께 거꾸로 세워 놓은 비석이 있었다. 이 표석은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섰던 하야시 곤스케(1860-1939)의 동상의 돌 조각 3점을 이용해 제작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2015년부터 서울시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들을 없애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의 옛 통감관저 터에 ‘거꾸로 세운 동상’이라고 이름 붙인 표석 설치 작업이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외교관이 되어 인천 주재 부영사와 영사, 본부 통상국장, 주한공사를 지냈다. 그는 한국에서 재직하는 기간 동안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 일본의 세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였다. 그는 1904년의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섰던 자이다. 그 곳에 세워져 있던 그의 동상은 광복과 더불어 파괴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인 2006년 ‘남작(男爵) 하야시곤스케군상’이라고 적힌 동상 판석 3점이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그 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서 ‘거꾸로 세운 동상’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나라를 빼앗겼던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고 다시는 그와 같은 치욕을 겪지 않겠다는 민족적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 표석의 바닥에는 거울처럼 글자가 거꾸로 돌 판에 반사돼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이라는 내용을 읽을 수 있게 설치되었다.
통감관저는 원래 일본공사관의 용도로 1890년대 후반에 지어졌다. 일본공사관은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관저가 되었고 그곳에서 한일병합 체결의 음모를 꾸미던 곳이다. 한일병합 후에는 총독관저로 쓰이기도 했다. 뼈아프고 부끄러웠던 식민지 시대의 통한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하루도 역사(歷史)이고 순간(瞬間)도 역사(歷史)이다. 매 순간의 우여곡절이 쌓여서 문명을 이룩하고 새로운 역사 발전의 빗장을 열어 가는 것이다. 구약 성경을 폄하하려는 이들은 그것이 유대인의 역사책이지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질문은 앞 못 보는 이들이 거대한 코끼리 몸의 한 부분만을 더듬어 보고 그 생김새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은 무지와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로 부터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담의 창조로부터 인류의 역사를 전개하셨다.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그 분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섭리’(攝理)라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분의 손길 안에서 통섭(通攝)되어 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역사를 함부로 해석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내 놓고 보면 ‘정반합’(正反合)의 역사 해석의 저변에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의 섬세한 손길이 처처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 홍수 시대의 노아, 75세 노년기에 여호와의 임재와 부르심 앞에 응답했던 아브람과 그의 후손, 80세에 호렙산 떨기나무 숲 앞에서 불이 타는 듯한 환상 앞에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따라 나섰던 모세를 통한 출애굽, 모세도 이루지 못한 가나안 정복의 꿈을 성취한 여호수아의 요단 강 도하 사건과 여리고 성 점령, 300명의 적은 군대를 이끌고 메뚜기 떼처럼 많던 미디안의 적군을 섬멸한 사사 기드온, 사울 왕과 이스라엘의 전쟁 경험이 많던 백전노장들이 온 힘과 지혜와 전략을 모아도 해결하지 못하던 블레셋의 위협 앞에서 거인 적장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해결했던 소년 다윗, 150년 세월이 흘러가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곽의 돌 위에 단 한 개의 돌도 다시 얹지 못하던 암울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3만리 길을 가서 단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곽 복원 공사를 마무리했던 느헤미야 등등 그 모든 인물들과 역사 현장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 분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전능자이시다. 그 분은 장차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 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이시며 국가와 민족과 가정과 개인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오늘 날도 세계 75억 인류 중에는 피조물을 신격화 하고 우상 숭배에 젖어 살며 여호와가 창조주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넘쳐 난다. 이 글을 마무리 하는 토요일 아침 북한산의 불광동 쪽 산자락에서는 굿판을 벌여 놓고 징을 치는 요란한 굉음이 이른 아침의 평온한 분위기를 심란하게 하고 있다. 생각보다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미신(迷信)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연약함이 적지 않다.
성경, 욥기 23장 10절은 말씀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