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대통령의 기도행위에 대하여 여전히 언론의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결국은 무릎을 꿇고 통성으로 기도할 것을 제안했던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의 회장이 해명을 겸한 사과성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동기에서의 제안이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인간의 가장 엄숙한 경배와 감사와 기원 행위이므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상황과 분위기가 문제인 것이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전시 행위가 아니다. 기도의 내용 또한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찬양이 그러한 것처럼 기도를 듣는 대상은 철저히 전능자이신 하나님일 뿐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 대통령보다도 기도의 골방에서 무릎 꿇고 자주 기도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같은 그런 모습의 대통령이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인류학적인 연구와 통계 자료에 따르면 세계의 크고 작은 모든 민족들에게 다 나름대로의 종교 행위와 주술적인 기도행위가 있다. 최근에 선교 목적으로 방문했던 네팔이란 나라에는 삼억 삼천 개 이상의 신이 있다고 한다. 그 숫자에도 의심이 가지만 결국 모든 피조물과 현상에 신적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다신(多神) 신앙과 잡신(雜神) 신앙을 가진 나라와 민족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특히 힌두교가 그러하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유일신(唯一神) 신앙을 강조한다.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유대교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호렙 산에 올라가 사십일을 금식하는 중에 받은 것으로 알려진 십계명의 제 일조가 바로 그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즉 유일신 신앙의 선언인 것이다. 신명기 6장 4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것을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하여 알려 주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은 민족을 대하시는 선민(選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인격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개인을 부르셔서 교제하신 이야기로 넘쳐 난다. 노아가 그러하였고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와 같은 개인적인 신(神) 체험을 통하여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는 정령(精靈) 숭배나 물신(物神) 숭배나 조상 숭배나 샤머니즘의 긴긴 역사 중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으며 고려 시대와 조선 왕조 오백여년을 지내 왔다. 그리고 구한말에 서양의 상선들이 조선 땅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구라파와 서구의 문물들이 유입되기 시작되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국가적인 대안으로 쇄국 정책을 펴 보려고도 하였으나 서구 문명의 쓰나미 현상은 시대적인 변화의 시작인지라 막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유입된 것이 서양 종교라고 말하는 기독교의 전파였다. 그리고 백년이 훨씬 넘는 한 세기가 지나갔다. 역사적으로는 수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서양 문물의 영향과 기독교 선교의 혜택으로 시작된 작은 시작이 이제는 국가적인 발전을 이룬 흔적들이 수도 없이 많다. 기독교 복음 전파의 근본과 바탕 말고도 교육, 의료,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국방, 복지, 사회 제도, 윤리의 분야에 이르기 까지 그 영향은 가히 짧게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와 제도와 교육과 모든 분야에 독창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한국 근대 역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 바탕에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의식의 변화를 최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에 기도행위가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바탕이 기도 생활에 근거한다. 그 기도(祈禱)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에 기도란 단어가 가장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20장 7절이다. 물론 그 앞부분에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의 예배 행위인 제사(祭祀) 즉 단(壇)을 쌓는 모습을 여러 차례 소개하긴 한다. 그러나 용어 자체로 기도란 표현이 소개되기는 그 곳이 처음이다. 배경은 이렇다. 아브라함이 네게브 지역의 그랄 땅으로 옮겨 가서 살 때의 일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연세가 구십여 세가 되었어도 미모의 여인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내의 빼어난 외모는 늘 불안한 기도 제목이었다. 그래서인지 위기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내 사라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종들을 보내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 가 버린 것이다. 더 다급해 진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사라는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아야 할 언약의 어머니 될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급해지신 하나님이 꿈에 왕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오늘 밤 당장 그녀를 그의 남편 아브라함에 돌려보내지 않으면 네가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창20:7)라고 아브라함의 실체를 소개해 주셨다. 아브라함은 선지자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선지자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기도하니 태의 문이 닫혔던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의 태문이 열려서 출산의 기쁨이 이어지게 하셨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이요 능력이다. 아합 임금의 때에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는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멈추게도 하였고 다시 비가 내리게도 하였다. 이것이 기도의 신비인 것이다. 예수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고 교훈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남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 대통령이 아니라 청와대의 기도 골방에서 시시 때때로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런 대통령이 계속하여 탄생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의 청년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 생활을 통하여 역사적인 총리의 사역을 오래도록 잘 감당 할 수 있었다. 그 배후에는 기도의 신비가 있다. “다니엘이......자기 집에 돌아가서는......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하나님은 이런 다니엘을 오래도록 존귀하게 들어 쓰셨다.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의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책에 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기도에 전무하여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라.”고 도전한다. 새롭게 맞이한 사순절(四旬節)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기도를 체험하는 절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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