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토끼해라고 한다. 누구나가 잘 되는 해가 되길 소망하며 한해를 맞았을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과 일 년이라는 세월은 임금에게나 평민에게나 똑 같이 주어진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은 연습도 없고 반복도 없다고 하여 ‘일생’(一生)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소년 시절이 있었다. 청년기가 꿈처럼 다 지나갔고 이제는 젊다는 이야기를 듣기에는 좀 어색해져 가는 나이가 되어 가고 있다. 연말에 받아 본 일간 신문 기사에 의하면 영국 사람들은 여섯 사람들 중의 한명 꼴인 일천 만 명이 100세 이상 장수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실로 장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어려운 병도 많고 위험한 사고도 끊이지 않지만 장수 인구가 적지 않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 이전 시대에 장수하던 조상들의 나이와 이름이 나온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은 에녹의 아들이었던 무드셀라는 31년 부족한 천수 세를 할 정도였으니 참으로 오래도록 살던 장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장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살고 보람되게 살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참으로 멋있었던 사람이 다윗이다.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그를 좋아한다. 그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하나님께 총애를 받았던 인생의 대표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변방에 위치한 매우 평범한 마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여덟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가 막내였다. 그런 그가 양떼를 치던 소년기에 전쟁에 불려 나간 형들을 위문 갔다가 임금 사울도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장수들도 어찌하지 못하던 불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때려눕히면서 일약 전국적이고 역사적인 소년이 되었다. 평소에 들판에서 양떼를 칠 때에 반복 훈련했던 물맷돌 던지는 기술이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불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은 다윗이 던지는 물맷돌 한 개에 맞아 죽고 말았다. 머리와 얼굴과 온 몸을 가리는 투구와 갑옷을 입었건만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이마를 명중시키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날 이후로 다윗은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사무엘하 8장 6절에 보면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온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The LORD gave David victory wherever he went.)고 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축복의 선언인지 모른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나의 마음속에 이런 간절한 기도가 있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이런 기도를 조용히 드리곤 한다. 사랑하는 교우들을 한 분 한 분 기억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이런 기도를 주께 올려 드리고는 한다. 떠오르는 얼굴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이런 축복을 비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사무엘하 5장 10절에는 다윗에 대하여 눈길을 끄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씀이 또 있다. 그렇다. 사람이 잘 되려면 자기 노력도 중요하고 성실함이나 근면함이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남다른 축복이 임해야 한다. 어디로 가든지 잘되는 복이 임해야 한다. 나라 안에 있든지 나라 밖에 있든지 이런 복이 함께 하는 인생으로 가꾸어 가야 한다. 올 2011년 1월 1일부로 은퇴한 브라질의 신화적인 대통령을 지낸 룰라 다 실바((Luiz Inacio Lula da Silva, 1945-) 대통령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던 위기의 브라질을 지난 8년 만에 세계 경제 8대 강국으로 부흥시킨 주인공이다. 가난한 농부의 팔남매 중에 끼어서 굶주리며 자라난 시골 소년이 그의 조국 브라질을 역사적인 나라로 발전시켜 온 것이다. 13살에 초등학교조차 못다 마치고 길거리의 구두닦이로 출발한 그는 14살에 철강회사의 노동자 시절을 거치고 서른 살이 되던 해에는 10만 명 브라질 철강 노조의 위원장에 올랐다. 그 5년 후에 노동당을 창건한 그는 1989년부터 세 번 연속 대선에 실패했고 2003년에는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8년 후인 오늘 날 그는 대통령 퇴임 시에까지도 국민 지지율 87%를 유지하는 신화적인 인물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이 어찌 그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 가능한 일일까 싶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그를 사용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지도자의 영욕이 아니겠는가. 어찌 그라고 해서 정적(政敵)이 없겠으며 대적하는 자가 없었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조차도 아버지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반역을 일으킬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덕목에 집중하면 인생은 존귀해져 가기 시작한다. 물론 세상사가 그리 간단하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미가서 6장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정의와 인자와 겸손’이라고 했다. 딱딱한 인문학 도서이지만 지난해에 한국 출판 역사상 가장 많은 독자층을 불러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 보면 ‘행복과 자유와 미덕’을 정의를 구현해 가는 세 가지 시금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분 편에서 생각해 보아야 대답이 나온다. 어디로 가든지 잘 되고 형통하려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 류시화의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에 보면 땅을 팔라고 요구하는 대통령을 향하여 연설한 수콰미쉬족의 추장인 시애틀의 글이 실려 있다. “......이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대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가 우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을 우리는 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묶여 있고 모두가 한 식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 어떻게 우리가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대지의 따뜻함을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팔수 있는가” 그렇다. 이런 마음을 갖고 살면 이기고 지는 것이 그분의 손 안에 있을 뿐이다. 점령했으니 이긴 것도 아니고 빼앗겼으니 진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은 그 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 분에게로 돌아가서 내 안에서 그 분이 살아가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고 나면 비로소 진정으로 어디로 가든지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 밝아온 새해에는 이전과 좀 더 다른 모습으로 살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어디로 가든지 말이다. 그래야 사도행전 13장22절에 나오는 다윗이 들었던 하나님의 이런 칭찬이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