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6년간을 함께 공부해 온 모 명문 의과대학의 졸업반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한 명이 가평의 용추계곡에 있는 한 민박집으로 함께 놀러 갔다. 술에 취해 먼저 잠이 든 여학생을 남학생 세 명이서 속옷까지 벗기고 신체의 부위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추행 장면을 사진 찍거나 동영상으로 남겼다고 한다. 나중에 술에서 깨어난 여학생은 지난밤에 일어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나서 경찰과 여성 가족부 성폭력상담소와 학교 상담 센터에 신고했다. 경찰은 현재 이 남학생 세 명을 특수강간혐의로 입건 수사 중이고 해당 여학생의 옷가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겨서 정밀감식 중이라고 한다. 대학 측은 수사 결과에 따라서 출교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퇴학은 복학이 가능하지만 출교는 영영 학교로 되돌아갈 수 없는 가장 무거운 중징계이다. 또한 강간혐의가 확정되면 최소한 5년에서 무기 징역에 처하게 된다. 가해자 남학생 중 한명인 23살 한 모군은 부모가 의사와 변호사이고 그 동안의 학교 성적도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꽤나 이름 있는 유명 인사나 젊은 인재들 중에서 일순간의 자기 관리에 실패하여 무너지고 주저앉는 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충격적인 일들이 벌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다 보니 매사에 조심(操心)하고 조신(操身)하며 말 한마디라도 삼가며 살아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고 마는 세상이다. 최근의 언론보도 관련 자료(2011. 6. 6 조선일보)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지난 2004년 도쿄의 고쿠시칸(國士舘)대학교 축구부원 15명이 여고생 한 명을 7시간 동안 성폭행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해당 대학 총장이 기자 회견을 열어서 전 국민에게 사죄하고 축구부을 해체하기 까지 했다. 세계 처처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관리의 연속이다. 건강의 관리, 재물의 관리, 재산의 관리, 인간관계의 관리 등 모든 것이 관리에 바탕을 둔다. 잘 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지난날의 나의 이력은 평생을 지울 수 없이 따라 다니는 생의 흔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시작도 중요하고 마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가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아내가 하도 흙을 원하고 채소 가꾸는 것을 원하기에 벼려진 스티로폼 박스 몇 개를 주어다가 거름흙을 담고 베란다에 아홉 그루의 고추 농사를 시작하였다. 몇 주가 지나면서 제법 키도 자라고 하얀 꽃도 피웠다. 그런데 며칠 전에 가까이 들여다보니 진딧물이 잔뜩 뒤 덥혀서 몸살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 가서 농약을 사다가 뿌려 주어야 할 것 같다. 식물을 베란다 안에다가 키워도 온갖 병과 균들이 어떻게 알고 잘도 찾아 든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유혹과 고난과 위험과 위기가 전혀 없는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평소에 늘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기 관리 훈련이 계속되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첫 편지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권면하였다. 사도 바울이 예로 든 것은 우상 숭배와 음행하다가 죽은 이만 삼천 명과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멸망한 이들과 원망의 결과로 임한 멸망에 관한 경고들이다.(고전10:7-11)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도 했다.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는 그의 책,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서 일순간에 밀려드는 걱정의 원인을 제거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생의 원리를 ‘관리’(管理)의 지혜에 기초해서 강조했다. 그렇다. 사람은 그 어떤 환경과 신분의 그 누구이든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일상적인 행복과 축복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법이다. 몇 명이 모여 사는 가정에서도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남편인 아버지의 자기 관리와 아내인 어머니의 자기 관리를 잘 해야만 한다. 꼭 씨족 사회의 옛 생활이 아니더라도 고부간과 동서지간과 형제자매들과 집안 간에 서로가 자기 관리를 잘 해야만 한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학교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사업의 현장이든 자기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도 이와 같은 자기 관리에 성공한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도 자기 관리에 실패하여 넘어지거나 도중하차한 이들의 사례들은 너무나도 많다. 하와는 그 좋은 곳 에덴에서도 자기 관리를 잘 못하여 뱀의 유혹 앞에 남편 아담과 함께 부부가 다 무너지고 말았다.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자기 관리를 잘 못하여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다. 노아는 그 긴긴 세월 동안 방주를 잘 짓고 여덟 가족 모두를 구원한 시대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만 홍수가 끝난 후에 포도 농사 잘 하고 나서 자기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하체를 드러낸 채로 술에 취하여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거창한 언약을 가슴에 품고 출발했지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일과 아내 사라의 권고를 그대로 받아 들여 아내의 몸종 하갈을 침소에 들여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일은 명확히 자기 관리에 실패한 역사적인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에서는 사냥 후에 배고픈 것을 못 참고 동생 야곱의 팥죽 한 그릇 흥정에 장자권을 넘겨 버리는 자기 관리의 실패자가 되었다. 요셉이 종으로 지내던 애굽의 바로 임금 수하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는 잘 생긴 히브리 종 청년 요셉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남편도 속이고 스스로의 양심도 속였던 자기 관리의 실패자였다. 그 녀는 종 요셉에게 누명을 씌어 감옥에 쳐 넣는 것으로 무료한 고관대작의 부인으로서 성적 탐욕에 빠져서 자기관리에 실패한 가정주부의 표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처세는 달랐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도 그의 나중이 점점 돋보였던 것이다. 요셉은 자기 관리의 영적 천재였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가데스의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후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장면에 보면 그도 결국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자기 관리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이란 없다. 아이성 전투의 아간은 시날 산의 외투 한 벌과 금은 덩어리 앞에서 자기 관리에 무너졌다. 사사 삼손은 이방 여인 드릴라의 유혹 앞에서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 사사 시대 말기에 40년간이나 제사장이었던 엘리는 대를 이을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향한 가정교육에 있어서 가장으로서 자기 관리에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임금 사울은 자기 속에서 고개 드는 교만과 거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하나님이 그를 임금 삼으신 것을 후회하게 한 비열한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임금 다윗은 부하 우리아의 아내 앞에서 부름 받은 성군(聖君)의 체통을 버렸다.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는 스승을 은 삼십에 팔아버리는 자기 관리의 실패자였고 제자 베드로는 십자가 처형장으로 끌려가시는 주님 앞에서 자기 관리에 무너졌던 초라한 이름뿐인 제자였다. 이천년 교회 역사에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동서고금에 넘쳐난다. 그러므로 성경 잠언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권면한다. 자기를 잘 관리하는 일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