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어머니께서 왼쪽 무릎 수술을 받으셨다. 최근 들어 심한 통증을 호소하셔서 해당 검사 후에 다 닳아 없어진 무릎 연골과 인대 부분의 상처를 치료하고 시술하는 레이저치료를 받으신 것이다. 며칠 지내면 차도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팔십년 이상을 사용하여 퇴행된 무릎이 얼마나 괜찮아지실지 의문이다. 더 이상 큰 통증이나 느끼지 않고 가만 가만 한 걸음씩 걷고 지내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는 기대뿐이다.
동물들은 네 발로 걷지만 인간은 두 다리로 걷는다. 학자들은 인간이 걷기 시작한 역사를 600만 년 전 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마도 진화론을 믿는 이들의 의견일 것이다. 동물들 중에서도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에 속하는 것들은 네 발로 걷기도 하지만 앞의 두 발로 인간의 손과 비슷한 기능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한 걸음씩 걷는 이동 능력에 의해서 그 영역을 넓혀 왔다. 사람에게 있어서 두 팔과 양손의 기능이 소중하지만 두 다리가 없는 인간의 문명을 상상해 보라. 걸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답답함이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물론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다선인 4선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12년의 통치 기간(1933-1945)내내 후천성 소아마비와 씨름하며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장애의 상태로 지낸 것은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주변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보행의 장애를 가진 이웃들이 적지 않다. <걷기, 인간과 세상의 소통>(On Foot)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인 조지프 A. 아마토 박사는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역사학과 문화 인류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는 그의 책에서 인간의 걸어온 걷기의 역사를 꼼꼼하게 추적하고 있다. 인간의 걷는 걸음은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와 목적과 마음의 현 상태와 성격과 취향과 의도까지를 담고 있는 말 없는 말이다. 텃밭에 농사하던 농부의 걸음과 이 마을과 저 도시를 이동하거나 국경을 넘어 다니며 장사하는 상인의 발걸음은 다르다. 같은 곳이라도 여행객의 걸음과 문화탐구나 자연탐사를 위해서 걷는 이의 걸음이 다르고 그 곳을 점령해 들어가는 군대의 걸음걸이가 또 다르다.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가는 발걸음과 누군가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발걸음은 전혀 걸음걸이도 다르고 그 걷는 속도도 다르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이의 발걸음과 슬프거나 우울하고 속상한 일을 겪는 이의 발걸음도 다르다.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과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은 그 걸음걸이만 보아도 차이를 느끼게 된다. 수도생활을 하던 중세의 수도자들의 발걸음이나 신앙 순례자들의 발걸음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 날은 각종 교통수단이 발전해서 육로와 상공과 해로의 이동 수단이 얼마나 편리하고 다양해 졌는가. 인간이 걷는 것을 대신해서 말과 약대등과 같은 동물들을 이동 수단으로 이용하고 마차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걷는 것을 주로 하던 그 이전과의 생활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제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수단에 의하여 이동을 받는 식이 되어 가고 있다. 건물 안에서조차도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의 기계에 의한 이동을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에게 있어서 걷는다는 수단처럼 소중한 축복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각종 다양한 신발과 구두의 발명은 맨발로 걷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를 가져 왔다. 최근에 대구에서 끝난 세계육상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신던 운동화룰 보았는가. 보통 사람들이 신는 신발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조지프 A. 아마토 교수는 춤이나 발레와 같은 것도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고 변천해 오면서 걷기가 다양한 품격으로 표현되어온 예술 중의 하나라고 언급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족과 같은 가진 자와 누리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걷는 것 하나도 신분과 품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하다 보니 신는 신발도 점점 고급화 되고 화려해 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거기에 걸맞게 화려한 의상과 이동 수단들이 동시에 겸하여 발전해 왔다. 아무데서나 닥치는 대로 먹고 자며 이리 이동하고 저리 방황하는 집시들의 발걸음과 그 도시의 귀족들의 걸음걸이는 전혀 다르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의 엄청난 속도의 발전과 번영을 구가하던 당시의 백마를 타던 로마 장군들의 걸음걸이와 노예들의 걸음걸이는 달랐다.
인간은 끝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걷고 또 걷는 변화와 이동을 통해서 역사를 발전시키고 문명의 변화를 이루어 왔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대서양을 건넜던 청교도들은 북미주의 동부에서 시작하여 인디언들의 위협과 풍토병과 싸우며 험난한 산과 들과 강을 넘고 건너서 서부 개척 시대의 신기원을 이루어 나갔다. 그 배후에는 물론 말을 타고 마차를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수많은 청교도들과 서부 개척자들이 한 걸음씩 걷고 또 걷는 수고와 도전에 의해서 오늘 날의 미연합국을 건설해 온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동서남북을 모세혈관처럼 연결한 잘 닦인 도로망의 건설 배후에는 구비 구비 산과 계곡을 넘고 또 넘어 한양에 과거를 보러 올라 다니던 선비들의 그 걸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의 엄청난 문명의 변화를 이루어 온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걸음도 한 걸음씩이다. 오대양 육대주를 향한 탐험대의 걸음도 한 걸음씩이었다. 남극과 북극을 탐험해 가는 탐험대의 외로운 발걸음도 한 걸음씩이다.
성경의 역사로 하면 뱀의 곁으로 다가가던 아담의 아내 하와의 그 걸음도 한 걸음에서 시작해서 범죄와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에녹은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걸음을 걸었던 주인공이다.(창5:24) 노아는 방주를 건설하고 홍수 시대를 뛰어 넘도록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행하는 걸음을 걸었던 신앙의 성자였다.(창6;22) 성경은 그런 그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창6:9)라고 극찬했다. 아브라함과 조차 롯의 차이도 바로 이것이다. 아브라함은 더뎌도 이스마엘 낳는 실수와 부끄러움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언약의 세계를 향하여 한 걸음씩 걸어갔던 의로운 믿음의 선조가 되었다.(창15:6)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을 쌓으므로 주께서 가라하시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걸음을 걸으려고 씨름한 여호와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
위대한 일도 한 걸음씩 시작하는 것이다. 거창한 일도 한 걸음씩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역사적인 일일수록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제대로 걸어가야 한다. 바른 길 즉,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지치지도 않고 목적지에도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과 인생관과 믿음을 갖고 살았던 임금 다윗은 평생 미지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이런 겸허한 고백을 남겼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계속되는 다윗의 고백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하나님은 양과 같은 인생의 나가는 길을 한 걸음씩 인도하시고 함께하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분이시라고 찬양한다.
성도들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시작하여 애굽을 거치고 나사렛에서 걷고 뛰는 어린 시절을 거쳐서 요단 강가의 세례 요한 앞에까지 스스로 걸어 가셨다. 그리고 광야 길을 걸어 사십 일간 금식하며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긴 자의 걸음으로 성령 안에서 이 마을과 저 회당을 걷고 걸어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까지 가신 것이다. 벳바게 마을의 새끼 나귀를 빌려 타고 호산나 찬양을 받으신 것 말고는 늘 걷고 걸으셨다.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려지시면서 영문 밖의 골고다 언덕까지 기진맥진하게 걷고 또 걸으셨다. 산을 넘으며 강을 건너 그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의 걸음은 얼마나 아름다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