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조용한 환경과 공간이라도 아무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 곳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청각 장애인이 아닌 이상에는 무슨 소리인가는 들려지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누구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은 공간을 마련하여 살고 싶어 하지만 도심지의 생활 중에 그런 곳이란 더욱 쉽지 않다. 최근에 이사하여 살게 된 은평구 진관동의 북한산 자락은 이른 새벽에 가까이에 있는 사찰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는 곳이다. 목사인 나도 찬송 소리가 아닌 목탁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야 하는 불편을 어찌하랴. 이처럼 현대 사회는 서로 다른 환경 가운데 서로 다른 차이를 감내하고 인정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격변의 시대이다.
소리 중에는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도 있고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도 있을 수 있다. 소리 중에 ‘소음’(騷音)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사전적인 의미로 하면 “불규칙하게 뒤섞여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라는 뜻이다. 물론 한자어로 휘파람을 소음(疏音)이라고도 한다. 이는 발음은 같고 뜻은 다른 소음이다. 최근에 교회를 건축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다양한 민원 앞에 부딪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건축 과정의 소음 문제이다. 내 집 짓는 소리와 남의 집 짓는 소음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들려질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평범하고 가난하던 우리나라가 이처럼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반만년동안 전혀 들려지지 않던 건설의 소리가 지난 오십여 년 동안 팔도강산 이 곳 저 곳에 울려 퍼져서 오늘 날의 대한민국이 건설된 것이 아닌가. 길을 내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다리를 놓고 터널을 꿇고 저수지를 쌓고 댐을 건설하고 간척 사업을 하여 바다를 육지로 만들고 없던 새로운 항구를 만드는 등의 피땀 어린 건설의 노력이 오늘 날의 위대한 나라 발전의 초석이 된 것이 아닌가.
종교의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바다와 큰 나무와 큰 바위 등을 숭배하는 자연 숭배와 우상 숭배의 샤머니즘 문화였다. 동네마다 밤낮 요란하게 징을 울리어 가며 굿이나 하고 우상 앞에 빌던 문화가 바뀌고 깨우쳐 온 것이다. 지난 천년동안 우리나라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왔고, 조선 오백년 동안 유교의 힘을 의지해 왔다. 구한말에 우리나라를 찾아 온 서양 사람들의 영향으로 문호가 개방되고 북미주와 구라파와 호주 등에서 찾아 온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의 건축과 사역으로 교육과 보건과 복지 분야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복음’(福音)이란 ‘good news' 즉 ‘복된 소리’라는 뜻이다. 이처럼 소리 중에는 그 소리를 따라가면 인생을 망치고 가정이 무너지는 소리도 있고, 기독교의 복음처럼 복된 소리라서 듣고 따라 나서면 인생이 변하고 가문이 일어서고 나라와 민족이 발전하고 흥왕해져 가게 하는 소리도 있다. 요즘 같은 21세기에도 어리석은 종교나 사이비 신앙에 빠져 들어서 가정을 망치고 인생이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소리를 잘 못 듣고 귀가 얇아져서 어리석게 따라 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복음인 이 소리에 일찍이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인 이들이 개화기의 선각자 역할을 한 분들이 한 둘이 아니다. 윤치호,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이승훈, 이준, 김구, 서재필, 이승만, 백낙준, 조병옥, 유관순, 김활란, 임영신, 박인덕 등이 모두 다 복음을 받아들인 민족 지도자들이었다. 1919년 3. 1 독립운동 당시에 33인의 대표들 중에서 신석구 목사를 비롯한 16명이 복음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던 점을 주목해보라. 기독교의 복음이 이 땅에 들어 온지 30여년 만에 그와 같은 영향력 있는 복음의 사람들이 자라 잡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도 늦지 않다. 집집마다 복음이 들어가야 한다. 세상 소음만 듣지 말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세미한 복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시끄럽다 하고 소음으로 지역 주민들의 반응이 예민하여도 그 배후의 저 만치에서 들려오는 그 분의 다가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서대문 밖 은평 벌의 북한산 자락에 천년 동안 울려 퍼지던 목탁 소리 곁에서 새롭게 들리기 시작하는 진정한 복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손으로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변천이니 말이다. 그 분은 바벨론과 앗수르와 헬라의 말발굽 소리 가운데서도 예언과 섭리를 따라 베들레헴에 오셨고 애굽을 거쳐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분의 오심은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마2:18) 변하여 온 천하 만민에게 증거가 되는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이다. 그 분의 오심은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렁찬 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순전한 믿음>(The Faith)이라는 책을 쓴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리차드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경험하였다. 출옥 후에 그는 프리슨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이란 교도소의 재소자 선교회를 설립하여 35년이 넘도록 섬겨 오고 있다. 그의 방송을 듣는 이들은 200만 명이 넘는다. 그는 40여개 국가의 600여 곳의 교도소에 5만여 명의 자원 봉사자들의 힘을 빌려서 재소자 선교에 혼신의 힘을 쏟아 온 주인공이다. 그는 책에서 1954년 당시, 해병대 소대장으로 과테말라 정부를 향한 미중앙정보국(CIA)의 특명에 의한 극비 전투에 참가했던 경험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어서 1944년 6월 6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역사적인 의미를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풀어 나가고 있다. 그 작전은 900년 만에 영국을 거쳐서 구라파 대륙에 상륙한 역사적인 작전임을 강조한다. 좁은 지면에 당시 전쟁의 규모를 설명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히틀러와 파시즘의 악을 정복해 가시는 정복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이 세상은 끝이 없는 전쟁의 역사 속에 발전해 왔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고, 의로 불의를 이겨야 하는 것이 시대적인 사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땅에 있는 악의 세력을 결박하는 하나님의 지구 침공 작전의 성공이었다. 하나님은 거대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의 정혼한 처녀 마리아의 태를 일 년 간 빌려 쓰시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된 마리아에게 메시아로 보냄을 받은 아기 예수의 양육권을 위임하셨다. 쉽지는 않았으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에 끌려가서 매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하나님의 작전은 여전히 성공적이었다. 삼일 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를 바꾸어가는 시작이었다. 찰스 콜슨은 오늘 날의 교회를 “하나님의 구속 사명을 완성해 가도록 세워 두신 평화 유지군”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이제 작전은 시작되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의 소음과 지진과 불 가운데에서도 계시지 않던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다가 오셔서 엘리야를 격려 해 주셨다.(왕상19:11-12) 기도하는 우리 가운데 계신 주께서도 그렇게 역사하실 것이 분명하다. 요즘의 소음 뒤에 장차 다가올 세미한 음성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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