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한다. 그것도 단거리 경기가 아닌 장거리 경기요 마라톤 경기에 비유하고는 한다. 달리기는 모든 스포츠 종류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종목이다.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대구에서 열린다. 벌써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취재 열기가 뜨겁다. 100미터 세계 기록 보유자인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 선수도 참가한다. 비장애인경기인데도 참가자격을 받은 장애인들이 참가하기도 한다.
그 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두 주인공이 있다. 한 사람은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그는 무릎 아래 뼈가 없는 채로 태어났다. 한살 때 무릎 아랫부분을 제거했으며 보철을 한 뒤 의족으로 걷는 법을 배웠다. 그는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인해 네발자전거 타기와 수상스키와 럭비를 했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다. 그러나 2004년 럭비 경기 중에 크게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육상으로 전향을 하였다. 육상에서도 재능을 보인 그는 장애인 육상 100미터 10초 91기록으로 동메달을 탔다. 현재는 200미터 21초 79로 400미터 와 함께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별명은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이다. 탄소섬유로 특수 제작한 의족인 보철 다리의 모양이 스케이트의 날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의 주인공은 아일랜드 출신의 제이슨 스미스로서 블라인드 러너(Blind Runner)라는 별명을 가진 시각장애인이다. 그의 시력은 정상인의 7%정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망막 신경 이상으로 시력이 손상되는 유전성 ‘스타가르트(Stargardt)병' 때문에 여덟 살 때에 시력을 거의 잃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같은 병으로 시각 장애를 갖고 사셨는데 아버지의 대를 건너뛰고 자신에게 유전된 것이다. 그와 같은 시각 장애 상태에서 그의 100미터 기록인 10초 22는 우리 나라선수의 최고기록 보유자인 김국영 선수의 10초 23보다 더 빠르다.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와 제이슨 스미스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인가. 인생은 누구나 다 어떤 형편과 처지 가운데 살아갈 지라도 일정한 생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선한 경주를 끝까지 다 달려가지 못하고 인생기차에서 중도에 하차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안타까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리고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기독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가 남긴 말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종교심이 깊고 총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겸손하고 조용하고 평범한 집안의 하녀를 아내로 맞아서 그를 낳았다. 그는 아버지의 종교적인 우울함이나 심각한 모습을 많이 닮고 자라났다. 아마도 그의 이와 같은 고민은 절망을 넘어 서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마음의 병이요 고뇌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8년 전의 일기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결코 잊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바람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영적 고뇌가 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늘 영적 고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해 전에 목회자들과 함께 방문했던 도시 코펜하겐에서 그의 동상과 묘지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의 신학부에서 논문을 준비하던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어느 날 아홉 살 연하인 약혼녀 레기네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별의 이유는 "그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레기네는 울며 매달렸지만 키에르케고르는 "한 여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사내를 용서하오."라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그녀와 헤어진 이후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은 인생을 우울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절망은 인생을 더 이상 살아갈만한 가치를 같지 못하도록 침식해 버린다. 그의 그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은 니체와 하이데거와 샤르트르에게로 이어졌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절망의 늪을 통과하여야만 할 때가 있다. 문제는 그 좌절과 절망과 무의미와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는 것이다. 얼마 전, 운전 중에 극동 방송에서 최근에 자주 나오는 짧은 멘트를 들었다. 어느 가정의 남편이 사고를 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부인의 반응은 너무나 명쾌하였다. “그럼 해결할 일만 남았네!” 말 꼬리가 올라가는 시원한 멘트의 이와 같은 아내의 반응은 갑자기 무더운 여름의 얼음냉수 한 그릇 같은 신선함으로 전해져 왔다.
스페인의 속담에 “꼬리가 가장 다듬기 어려운 부위”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인간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갈 지라도 장애와 도전과 위기를 극복하고 앞을 향하여 달려 갈 줄 아는 의지 있는 모습을 키워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꼬리가 제대로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작이 중요하지만 과정과 나중은 더욱 더 중요하다. 화려하게 시작하고 초라하게 마치면 되겠는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표현을 꼭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업적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그가 진정한 사람이라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분은 결코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는 업적이나 공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존재의식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상 받는 달음질의 특징인 절제와 방향감각과 몸을 복종 시키는 순복의 신앙은 상을 받는 결과보다 훨씬 소중한 삶의 원리가 아니겠는가.(고전9:24-27)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원리를 온유와 겸손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포기와 순종의 삶으로 교훈해 주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나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신33:29)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진리의 발견으로 설명해 주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이다. 요즘처럼 무더운 계절에는 물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중국의 시자(尸子)는 물의 네 가지 덕을 말한바 있다. 소위 ‘수유사덕’(水有四德) 말이다. 그 네 가지란 ‘인의용지’(仁義勇智)이다. 인(仁)이란 만물을 깨끗이 하고 소통시킴을 말한다. 의(義)란 더러운 물을 씻어 내고 맑은 물이 흐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용(勇)이란 부드러운 듯하나 범하기 어렵고 약한 듯하나 강한 것을 이기는 것을 가리킨다. 지(智)란 가득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하게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성품과 덕성이 복음 안에서 어우러질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풍랑 중에도 뱃고물을 베고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그런 낭만과 여유가 있었다. 죽음까지도 뛰어 넘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답게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간에 주저앉는 중단이란 없었다. 오직 영원만이 있을 뿐이었다. 계속하여 달려 갈만한 그런 영원함 말이다. 그러므로 늘 그 분 안에 거했던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