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평안을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 어디에도 완전한 평화란 없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노르웨이는 지구상의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천년 이상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노벨상 중에서 평화상은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에서 수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노르웨이의 수도인 오슬로에 있는 정부 청사와 오슬로 교외 우토야섬의 노동당 청년 캠프 행사장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로 순식간에 76명이 숨졌다.(2011. 7. 22)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경악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32살 난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Anders Behring Breivik)이란 이름의 범인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어린이와 청년들의 천국처럼 알려졌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우토야에서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범인은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지 일 년 만에 부모가 서로 이혼한 상태에서 불안정한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새 가정을 이루고 사는 그의 아버지를 만나본 지도 16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곤고하게 살아가던 정신이상자의 증오심과 악한 행동이 엄청난 화를 부른 것이다.
인구 490만 명의 노르웨이는 세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의 상징적인 국가였다. 저들은 이미 전체 국민의 10%에 가까운 이민자들을 맞아 들였다. 그들 중에 삼분의 일이 이슬람이라고 한다. 유럽의 적지 않은 나라들이 자기나라 중심의 국수주의를 추구하는 이때에 노르웨이는 앞장서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포용적이고 문명적인 나라로 알려져 왔다. 사건이 일어난 우토야 섬은 우리나라로 하면 남이섬과 같은 평화롭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아름다운 섬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평화로운 섬에서 극악한 범죄가 일어난 것이다. 노르웨이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악은 사람들을 죽일 수는 있지만 노르웨이 전체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고 말하며 국민들을 위로하며 나섰다. 사건이 일어난 며칠 후에 오슬로의 시청 앞 광장에는 오슬로 시민의 삼분의 일에 가까운 20여 만 명이 손마다 장미꽃을 들고 모여와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유족들을 비롯한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였다.
우주 만물과 인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다. 신명기 33장 29절에 보면,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여호와의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을 생의 돕는 방패요 영광의 칼로 의지하고 사는 자들에게 그런 행복이 임한다고 했다. 세계에는 인종과 혈색과 종교와 문화와 풍습과 언어가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뒤 섞여 살아간다. 이 같은 다 문화 속에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가꾸어가는 것은 인류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이를 평강, 평안 혹은 평화로 번역하였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하여 그 중간을 쪼개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기도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 때에 응답으로 해 주신 말씀 중의 하나가,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라는 축복의 약속이셨다. 아주 평범한 말 같지만 이보다 더한 축복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이 날 이후 175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이런 복을 누리며 살아갔다. 그 동안에 아들 이삭도 태어났고 쌍둥이 손자 에서와 야곱도 선물로 받았다. 이런 복은 다윗의 때에도 있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삼하7:1)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평안이 사는 것이 은총이다. 시편 4편 8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다윗의 고백인 이와 같은 일상적인 평안이 평안 중의 평안인 것이다. 그런 다윗이 시편 38편 3절에서는 전혀 다른 불안을 고백하고 있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30살에 임금이 되어 7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갈 때까지 무려 40년간을 임금으로 지냈던 다윗에도 늘 평안이 계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질병과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과 배 다른 아들들로 인한 가정 내의 다툼등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믿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의 왕권을 찬탈하려고 반역을 일으키자 신발도 신지 못한 채로 기드론 시냇가를 건너 신하들과 함께 피신하고 도망하던 날들도 있었다. 시편 23편의 4절이 그런 다윗의 모습을 잘 묘사해 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말씀 말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 다음 고백이 그런 그의 의연한 모습을 교훈한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완전한 평화란 없다. 질병과 사건가 사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매 순간마다 잠시의 평안과 평화와 평강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생사화복은 그 분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다른 평안을 사모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요 신앙인 것이다. 예수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했다.
<톨레랑스가 필요한 기독교>라는 칼럼집이 있다. 저자인 이우근 교수는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보냈다. 법조인이요 음악인이요 문학인으로서 나중에는 신학도 공부한 적이 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사법연수원 수석교수와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를 거쳐 서울행정법원장을 역임한 후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지낸 기독교인이다. 그는 서로 다른 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중용과 소통으로 대하는 사회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가 책에서 제목 삼은 단어인 ‘톨레랑스(tolerance)’란 사랑과 관용을 말한다. 유럽 사람들이 소망하는 톨레랑스란 저들만의 오랜 역사의 아픔을 겪으면서 그 반성과 희망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는 서로 다른 종교적인 억압이나 박해 혹은 폭력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고 서로의 자유와 평화를 보호하려는 운동이다. 사상적으로는 근대 이후 존 로크나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이와 같은 사랑과 관용의 개념을 강조해 왔다. 영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북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1649년 메릴랜드주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톨레랑스 조례’를 만든 것도 이와 같은 염원에 기인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프랑스도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후에 계속된 국내 적인 불안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 같은 톨레랑스에 대한 관심이 깊어 왔다.
최근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과 관용의 장미꽃을 든 시민 행렬을 보면서 그런 ‘다른 평안’을 염원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지는 것은 단지 나 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이해와 관용과 사랑이 식어져서 이기주의의 병폐 속에 찌들어가는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사야의 환상처럼 다른 평안을 꿈꾸는 것은 너무 지나친 환상일까 싶다. 일찍이 이사야는 이런 세상을 보았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사6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