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디를 가나 현대인의 큰 화두 중의 하나가 ‘소통’(疏通)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동서고금에 사람은 그 누군가와 반드시 소통하며 살아 왔다. 하나님도 인간이 소통할 상대가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을 좋지 않다고 하셨다.(창2:18) 하나님은 에덴의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쓸쓸하게 여기셨다. 결국은 아담을 돕는 배필로 지어 주신 또 한 사람이 아담의 아내가 된 하와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와 더불어 첫 인간인 아담의 창조 이후에 소통을 위한 또 하나의 창조로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잠들게 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는 성경의 일화는 유명하다. 아담에게는 하나님과의 소통만으로 만족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 완벽하고 그 좋은 동산인 에덴에서 살게 된 아담이었지만 소통의 상대가 없는 불안과 초조를 느꼈던 것이다.
여기에 심오한 신학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두 소통 가운데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이 중에서 어느 한 쪽의 소통만을 강조하면 균형이 깨지고 만다. 세상을 행복하게 살려면 이 두 소통을 원만하게 조절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기도라면 인간과의 소통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위 ‘언로’(言路)가 막히면 모든 것이 막히고 만다. 고독과 개인의 성찰을 위한 홀로 나만의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역시 인간은 소통을 통해서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그 누구나 또 다른 누군가와 더불어 소통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무인도에 격리된 사람이라도 소통은 필요하다. 상대방이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하늘과 바다와 산과 들과 새와 들 토끼와 물고기와 벌과 나비등과 같은 수많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향하여 소통을 시도하게 되어 있다. 심지어는 바다 저쪽에서 파도에 밀려온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생필품의 흔적만 보아도 가슴이 뛰고 울렁거리는 이유가 소통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겠는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소통이 되면 버틸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소설로 하면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이나 영화로 하면 탐 행크스(Tom Hanks)가 직접 제작하고 본인이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에서 전해주는 눈물과 감동의 무인도생존기의 이야기 전개가 그러하다. 파도에 떠 있는 다 낡은 배구공에 사람의 얼굴을 그려 넣고 울먹이던 그런 장면 말이다. 시간 낭비를 죄악이라 여기며 사랑하는 여인과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길 시간도 없이 일에만 몰두하던 영화의 주인공 척 놀랜드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죽음의 공포와 파도처럼 밀려오는 절망 중에서 탈출을 향한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유일한 말벗으로 삼았던 배구공의 이름이 ‘윌슨’(Wilson)이다. 그 배구공은 영화제작이 끝나고 흥행에 성공한 이후에 18,400불에 경매로 팔렸다고 한다. 그 배구공은 소통이 끊긴 무인도에서 무인도 탈출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생존해 나가도록 힘을 주는 유일한 소통의 도구였다. 사람이 곁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아휴! 내가 벽을 바라다보고 이야기 하지....... 자네와 이야기하겠나.”하고 탄식하게 된다.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소통의 정도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들은 소통에 한계가 있다. 최근에 미국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6살 이상만 출입하는 홍보를 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금방 20%나 뛰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처럼 음식만 먹는 공간이 아니라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는 소통의 공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여섯 날 미만의 어린이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섭섭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소통의 능력이 점점 성숙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나이는 들었고 몸은 성장했으나 소통을 제대로 훈련하지 못한 경우에는 가정생활과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집안의 대소사가 결국은 소통의 문제인 것이다. 이건 학교나 직장이나 회사나 그 어떤 상업이나 사업의 현장이나 교회 생활이나 다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소통의 한계가 생겨서 세계 대전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원만한 소통은 행복한 생활의 지름길이다. 남편이 아내와 소통이 잘 되면 처갓집 쇠말뚝을 보고도 절한다는 속담이 있다.
소통은 체험에 근거하는 것이다. 최근에 계속하여 문제가 드러나는 군대 구타와 비리의 현장에서 초급 장교 6명이 사병들 사이에 위장하고 들어가서 병사들의 병영체험을 스스로 자원하여 했다고 한다. 소통을 위한 시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서양에는 "남의 신을 신고 걸어 보기 전에는 함부로 남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는 속담도 있다. 그러므로 소통이란 쌍방의 문제이지 일방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소통의 훈련을 위해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는 말을 해 왔다. 그렇다. 우리나라 한글의 모음 표기법과 발음에서는 ‘아’와 ‘어’의 차이가 적지 않다. 어떤 개그맨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소통의 한계와 차이를 일본말로는 ‘아리까리’하고, 독일 말로는 ‘애매모호’하고, 프랑스말로는 ‘알쏭달쏭’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다. 소통을 간절히 열망하는 바람이 그 뒤에 숨겨 있어서 좋았다. 결국은 성공한다는 것은 남다른 소통 능력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교수인 마이클 해크먼과 조지폭스대학교의 경영학과 교수인 크레이그 존슨이 함께 쓴 책인 <소통의 리더십>(Leadership, A Communication Perspective)에서 강조하는 바도 바로 그러하다.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고,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팔로어의 역할도 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그는 17살 때에 열 명의 형들과의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생겨서 애굽에 종으로 팔리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대화와 소통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 옥중의 술 맡고 떡 맡았던 바로의 관원들과 또 다른 옥중 동료들 사이에서 언제나 뛰어난 소통의 인물로 성장하고 변화하고 성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바로 임금과의 영적 소통이 임금의 꿈을 지혜롭게 해석하는 것과 더불어 일약 그 유명한 총리대신으로 평생을 살게 했다. 요셉은 소통의 천재였다.
문화 평론가이며 역사 인물에 대한 리더십 연구가인 김헌식의 책, <세종, 소통의 리더십>에 보면,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과 카리스마와 조직 장악력과 비전 제시와 목표 달성력과 네트워크 능력 등이 소중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태종의 대를 이른 조선의 제 4대 임금이었던 세종이 바로 그런 소통에 능했던 인물이라는 강조이다. 평생토록 남편을 ‘저 인간’이라고 불러야 했던 상처와 식어버린 애정 속에 연명하듯 살아온 부모 곁에서 자랐으면서도 성장 환경을 긍정적으로 소화하며 자기 분야에 우뚝 선 국가적인 소통 분야의 명강사인 김창옥 소장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내용들이다.
예수는 소통의 원리를 이렇게 강조해 주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예수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소통의 달인으로 사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과 소통하며 인간의 죄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소통을 완성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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