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의 철학을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일본의 카운슬러이며 컨설턴트인 여성 작가의 책 중에 야마시타 히데코의 <단사리斷捨離>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끊고, 버리고, 떠나라는 세 가지 명제를 소개한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모아들이는 것과 그 반대로 버리는 것의 연속이다. 얻고 버리는 것은 자연계의 순환 원리다.
이번에 또 다시 이사하게 되었다. 세어 보니 십대 후반에 고향 집의 부모 곁을 떠난 후에 21번째 이사다. 신학생 시절에도 자취방으로 하숙방으로 기숙사로 이사하고 또 이사하였다. 군대에 다녀와서 결혼하고 곧 시작한 목회 사역 중에도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다시 미국에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이사하곤 하였다. 이사할때마다 버린 것이 적지 않건만 이사하면서 보면 무엇이 그렇게 가지고 다니며 사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어차피 다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인데 말이다. 사람은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걸 구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요 믿음이다. 재활용이 불가능한 상태의 쓰던 물건이나 신발이나 옷가지는 낡거나 고장 나면 버릴 수 있다. 아니, 버려야만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신앙생활이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범죄와 타락이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버린 상태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에덴에서 추방되는 타락과 심판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짐승 떼가 번성해 가고 살만해지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언약의 사람인 삼촌 아브라함을 버리고 죄악의 도성인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 땅을 향하여 떠나가 버렸다.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 중에서 아이 성을 공략해 가던 심각한 전쟁의 때에 아간은 눈에 보이는 시날 산 외투와 금과 은에 대한 탐심 때문에 여호수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준엄한 전쟁 명령과 장래의 보장된 축복을 버렸다. 그리고 아골 골짜기에서 가족이 몰살당하는 돌과 불의 심판을 받고 말았다. 사사 삼손은 이방 여인 들릴라를 향한 욕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버렸다. 임금 사울은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버렸고 대를 이을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숨은 뜻과 은총을 묵살해 버렸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기 착각으로 인하여 언약의 통로였던 존귀한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버렸다. 일천 번제의 신앙과 함께 대단한 지혜의 왕으로 출발했던 임금 솔로몬은 재임 초기의 순결하고 성실한 신앙을 져 버리고 일천 명의 이방 여인을 처첩으로 맞이하며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을 버리는 내리막길로 치닫고 말았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의 말년 모습이 소개된다. 참담하고 안타까운 역사의 기록들이다.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이요 첩이 삼백이었다.(왕상11:3) 솔로몬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다.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신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성경은 하나님을 버린 솔로몬의 범죄와 타락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왕상11:6) 하나님은 두 번이나 솔로몬에게 경고하셨으나 듣지 않았다. 나중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더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책망하셨다.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11:11)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인간을 버리신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면 하나님도 인간을 친근히 대해 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백성의 뿔을 높여 주신다.(시148:14)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곁을 떠나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백성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수23:8)고 유언하였다. 또한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수23:11)는 분부도 남겼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주의 말씀과 율례와 법도와 규례와 계명을 평생토록 버리지 않고 잘 지켜 행하면 이것이 복 중의 복이다. 남 유다의 제 14대 임금이었던 므낫세는 무려 55년 동안이나 왕으로 지낸 이스라엘 남북 왕조 중에서 최장기 집권한 왕이었으나 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들으려 하지 않던 교만하고 어리석은 왕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의 군대로 쳐들어가게 하셨고 므낫세 왕은 쇠사슬에 사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불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뒤 늦은 그제서야 겸손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임금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용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바벨론에 쇠사슬에 묶여 끌려간 임금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셨다. 세월은 흘러갔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 날 이후의 장면을 이렇게 증언한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 33:13) 솔로몬과는 반대로 나중에라도 돌이킨 다행스러운 경우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버리는 것을 조심하고 근신하고 삼가야 한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주께서 붙잡혀서 가야바의 뜰과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 다니시던 날 아침에 예수를 버리고 말았다. 삼년을 따라다니던 주님을 배반하고 버린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만나보고도 또 다시 예수를 버리고 떠나서 갈릴리로 갔다. 일곱 명의 어부 출신 친구 제자들을 선동해서 밤새도록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새벽녘까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히지 않았다. 그 새벽에 예수께서 떡과 생선을 준비하여 해변가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불러내실 때까지도 베드로는 주님을 버렸고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그런 베드로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세 번 물음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의 승천을 목격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서야 버렸던 주님의 품 안으로 회복된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요 복음 전도자요 순교자가 되었다.
신앙생활은 버리기와 취하기를 잘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불의와 추악함과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독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비방과 미움과 능욕과 교만과 자랑과 악을 도모하는 행위와 부모거역과 우매함과 약속을 배반하거나 무정하고 무자비한 모습을 버리라고 경고하였다.(롬1:29-31)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단순화하여야 한다. 온갖 우상 숭배와 육체적인 탐심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 와야 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1서 2;16)의 뿌리인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부지런히 버리고 주께로 돌아 와야 한다. 진리의 말씀 안으로 돌아오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 와야 한다. 하나님 안으로 돌아오고 성령 안으로 돌아 와야 한다. 먼 나라로 떠나갔다가 거지신세가 된 둘째 아들처럼 실패한 자신의 과거를 과감히 버리고 아버지께로 돌아 와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도 제대로 살고 나중에도 영원히 살게 된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야 산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5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