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 소리 물새소리에 눈물 흘렸네”
이는 ‘기다리는 마음’ 이란 제목의 시이다. 이 시는 나중에 곡이 붙여져서 널리 불리어지면서 시 보다는 노래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를 쓴 이는 김민부(1941-1972)라는 시인이며 작가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MBC 방송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시 쓰기에 천부적인 소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찍이 고등학교 2학년 때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가 입선되고 같은 해에 이미 시집, ‘항아리‘를 출간하게 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인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되면서 그의 문학성은 객관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 서라벌 예대와 동국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방송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방송 작가의 길을 걸었다. 하루에도 원고지 200장 정도에 글을 써 내려 갈 정도의 정열을 불태우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돈 벌이를 위한 작가가 아닌 순수 문학을 위한 목마름이 언제나 그에게 죄책감처럼 따라 다닌 것이다. 그런 그가 연말이 다가 오면서 방송 원고의 마감 날짜를 재촉 받는 스트레스를 누르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아내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밥을 먹다 말고 안방으로 들어간 그는 석유난로를 발길로 찼고 순식간에 그의 온 몸에 불이 붙고 말았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한 불행을 당한 것이다. 1972년 10월 23일, 전신에 90% 이상의 화상 진단을 받은 그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곱 살 그리고 세 살짜리 애들을 남겨 놓고 아내와 부모 곁에서 서른한 살 한창 나이의 젊은 시인 김민부는 그렇게 비운에 세상을 마치고 말았다. 외로운 산모퉁이에 슬프게 서 있는 망부석을 보고 시감을 얻은 ‘기다리는 마음’을 쓴 시인 김민부를 추모하는 문학제가 2011년 10월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부산의 송도 암남공원 한 모퉁이에는 그의 ‘기다리는 마음’ 시비도 세워졌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끝이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그 누구나 다 기다림을 통해서 각자의 삶이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어른이란 말은 기다릴 줄을 알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매사를 참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잘 참고, 잘 기다리고, 잘 견디고, 잘 이겨내는 것은 기다림에 의한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이란 그 자체는 글이나 이론이나 지식이나 미사여구가 화려하게 장식된 그 어떤 문학적 정의보다 더 심오한 생의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기다리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광야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 야인들은 새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갱도에 내려가 애쓰고 수고하는 광부들은 지상으로 나가서 쉼을 가질 교대 근무 시간을 기다린다. 먼 바다에 나가서 며칠씩을 지내야 하는 뱃사람들은 안전하게 육지로 되돌아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학생들은 방학을 기다리고, 결혼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결혼할 날을 기다린다. 먼 나라에 가서 사는 이들은 가족을 만나 볼 날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가난한 사람들은 좀 더 부유해 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병약한 이들은 좀 더 건강이 좋아지고 회복될 날을 기다리며 산다. 군에 간 젊은이들은 휴가를 기다리고 제대할 날을 기다리며 산다. 전쟁 중에 최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은 어서 전쟁이 끝나고 살아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옥에 갇힌 이들은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나아올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살아간다.
최근에 지하철 내부에서 불을 지폈던 방화범을 붙잡고 보니 전과 7범으로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갈 곳도 마땅치 않고 이 추운 겨울에 끼니를 해결하고 잠 잘 곳조차 구하기 힘든 세상을 비관하면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붙들리면 감옥에라도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범행을 생각해 냈다고 고백했다. 감옥에라도 들어 가 있으면 그래도 지붕이 있는 공간에서 잠을 잘 수 있고 끼니마다 최소한의 먹을 것을 주니 차라리 그 곳이 더 행복하겠다고 여긴 것이다.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너무나 마음 아픈 소식이 이 연말을 가슴 찡하게 한다. 추운 길가에서 자선냄비에 천사의 손길을 기다리며 종소리를 울리는 이들은 누군가가 다가 와서 좋은 일에 동참해 주기를 기다린다.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의 한 가운데 짐승의 먹이통에 오셨다. 일찍이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성들에게 800여년의 긴긴 세월이 지난 후에 언약의 성취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사7:14, 미5:2)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기다림이다. 신앙생활이란 은혜 받을 날을 기다리고 죄를 용서 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거룩해 져 가고 성숙해져 가는 성화의 날들과 영화의 날들을 기다리며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불순종함으로 죄를 범한 후에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긴 구속(救贖)의 역사를 기다리고 기다리셨다. 역사란 하루도 역사이고 천년도 역사이다. 천년이 두 번 가고 다시 또 천년이 이렇게 시작되었어도 역사는 계속되고 기다림 또한 연속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하늘을 자세히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 곁에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예수는 하늘로 간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해 주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이 땅에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 가운데 그렇게 재림하실 것이다. 그 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가진 이들 곁으로 오실 것이다. 삶이란 그 분의 손안에서 이루어져 간다. 그러므로 그 분의 언약을 믿고 따르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에녹은 365년을 그렇게 주와 동행하며 살았다. 그래서 노아는 100년이라도 지루해 하지 않고 기다리며 산꼭대기에 방주 지을 생각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75살에 약속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이 100세가 되도록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언약의 아들 낳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지쳤을 때에 인간적인 욕망으로 낳은 아들이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의 탄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이삭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삭이 언약의 아들이며 기다림의 결실이다. 이삭을 통해야 야곱도 태어나고 열두 지파의 선조될 열두 아들들도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살아갈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다윗도 성숙한 기다림의 사람 보아스를 통해서 그 남편과 맞먹는 기다림으로 다듬어진 모압 여인 룻이 나은 오벳의 손자이며 이새의 아들로 이 땅에 왔다. 그 기다림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영광의 왕이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성탄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기다리는 영이시며 인생들 중에도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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