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용어 중에 ‘미숙아’(未熟兒, immature infant)라는 표현이 있다. 질병의학에서 말하는 사전적인 정의로는 “보통 임신 28주 이전에 태어나 출생 당시의 체중이 500~999그램으로 생존율이 극히 낮은 아기”를 말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아기 스스로 어머니의 젖을 빠는 힘이 약하고 감염에 대한 저항력도 약하여 사망률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발전과 인큐베이터를 통한 돌봄을 통해서 정상아로 성장하는 경우가 꽤 있다. 오늘 날은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듯 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의료적인 시도와 노력에 의해서 출생 당시의 위기를 뛰어 넘고 성장하게 하는 성공률이 높아가고 있다. 물론 적지 않은 금액의 의료비용을 감당해야 하지만 말이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U S C 메디컬 센터에서 혜택을 입은 멜린다 스타 귀도라는 이름의 어린 아기가 이 같은 기적의 주인공이다. 2011년 9월, 임신 24주 만에 태어날 당시의 몸무게가 269그램이었다.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이고 미국에서는 두 번째로 작게 태어난 경우이다. 생후 14주가 지난 지금은 손을 모아서 엄마의 손가락을 잡을 정도의 아기로 포동포동하게 잘 자라났다. 병원 측의 설명으로는 성탄절 전에 집으로 돌아가도 될 만큼 건강한 상태로 잘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신문에는 태어날 당시의 마음이 찡하게 하는 안타까운 핏덩이와 같은 아기의 출생 사진과 건강하게 잘 자라나고 있는 최근의 모습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생명의 경이로움과 양육의 신비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 진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양육에 의하여 성숙하고 한 개체로 탄생하게 된다. 이 같은 자연의 원리는 곤충과 같은 미물에서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보면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고 광야 길을 걸어서 행진하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민수기에 보면 애굽을 떠난 지 둘째 해 둘째 달 스무 날에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올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를 출발해서 바란 광야에까지 갔을 때에 구름이 그 곳에 머물렀다. 이처럼 광야의 백성들은 구름이 가면 따르고 멈추면 따라서 멈추기를 계속하였다. 저들의 광야 길은 고단하고 힘겨웠다. 목이 마르고 먹을 식량도 척박하였다. 결국 불평과 원망이 계속되었고 백성들의 입에서는 악한 말이 가득해졌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의 진영 한 귀퉁이에 불을 내리셨고 당황하여 부르짖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모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이 그 불을 꺼주셨다. 그 날 이후로 그 곳의 지명을 불이 붙었다는 뜻의 ‘다베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민수기 11장에 나오는 일화이다.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계속하였다. 애굽에서 살아갈 때에 즐겨 먹던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그리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광야에는 밤중에 이슬이 내릴 때에 하나님이 내려 주시던 만나라는 먹을거리 밖에는 달리 더 무엇을 구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백성들은 지쳤고 드넓은 광야에 황량하게 흩어져서 모세를 따르던 저들은 각기 자기들의 장막 문에서 우는 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우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모세의 마음도 편치 못했다. 이때에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모세의 기도가 이러하다.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민11:12-13) 여기 성경에 처음으로 ‘양육’(養育)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모세도 알았다. 한 생명을 양육하는 유모의 사랑과 아비의 정성을 말이다. 모세 자신이 그런 시대적인 격변기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성장기를 보낸 주인공이 아닌가. 그가 태어날 당시의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남자 아기들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1장 16절에 보면 바로 임금은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같은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남자아기 모세는 그 부모의 손길에 의해서 석 달 동안 숨겨 키워졌다. 그리고는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 강의 갈대 사이로 떠내려 보내게 되었다. 마침 그 날 그 때에 그 곳으로 시녀들과 함께 목욕하러 나갔던 바로의 딸 공주가 아기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서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동생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기며 뒤 따르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 의해서 소개된 모세의 어머니는 공주를 따라서 아들 모세를 품에 안고 왕궁에 들어갔고 모세에게 친어머니의 젖을 먹여 양육하는 믿어 지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이는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양육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어머니를 동원하여 모세를 친히 양육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모세의 부모에게는 모세를 더 이상 양육할 만한 힘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들키면 부모까지도 죽고 말 상황에서 이런 일이 가능해 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이요 시대적인 인물을 키워내신 하나님의 양육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들은 룻이 보아스의 부인이 되어 낳은 아들 오벳은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친히 낳은 아기처럼 양육하던 장면에서도 두드러지게 들어난다.(룻4;16) 에스더 2장 7절에는 부모 잃은 에스더를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였다고 했다. 예레미야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보내셔서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고 약속하신 바 있다. 그러나 이사야 1장 2절에 보면 인생의 양육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섭섭해 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1:2) 이는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신 장면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사49:21)하고 탄식하신 적도 있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부모들을 향해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고 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딤전4:6) 이처럼 양육이란 한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평생의 과제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군가에 의해서 양육 받기도 하고 또한 그 누군가를 양육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여든 된 노인이라도 배울 것을 세 살짜리 손자에게서라도 겸손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서로 교훈을 얻고 진리를 깨닫고 선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한 양육이 아니겠는가.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이 세상에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잉태되고 양육되고 탄생되신 한 아기로 오시지 않았는가. 예수는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베들레험의 마구간에 오셨고 애굽 피난길을 거쳐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양육을 받으셨다. 그리고 장차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구원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다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육체의 양식을 공급하는 양육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혼과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 공급받는 양육이다.
Friends in Recovery라는 사역 단체에서 발행한 <성인아이 치유를 위한 12단계>에 보면 이 같은 치유와 회복과 양육의 시작은 개인의 의지와 삶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기는 위탁으로 부터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한 양육의 혜택을 입지 않고 장성한 인물이 그 누구이겠는가.